겨울비를 촉촉이 받으며 걷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예보보다 하루 앞당겨져 부실거리는 겨울비가 내려 어쩌나 했는데
눈을 뜨고 챙겨 놓은 짐들을 다시 풀기 싫어 그냥 또 새벽길을 나서고 만다.
다행히 바람도 자고 머리만 덮을 수 있으며 걷기에는 그만인 날씨다.
직산역에 내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삼남길 이정표를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을 터인데 대수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냥 1번 출구로 나와 주변을 더듬다보며 눈에 뜨이리라는 생각으로
성환천에 걸쳐있는 직산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무조건 가고 보니
직산교 다리 난간에 이정표가 나타나
비오는 날씨에 천만다행이라는 안도에 살짝 미소를 흘린다.
결국, 직산역 앞에서 뱅그라니 한 바퀴 돌면서 철길을 따라 가는 형국인데
이번에는 모시지하도를 끼고 요리조리 사람을 놀리는 길안내라
잘못하여 이정표라도 놓치면 오늘 하루가 낭패라는 낌새가 찌르르 스치고 지나간다.
<흥타령길의 업성3길을 따라>
마침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따라 업성저수지까지 잘도 찾아왔는데
시멘트 포장이 끝난 농로는 질퍽거리고 농수로를 만드는 공사로 인해
한국기술교육대학교로 이어질 흥타령길 이정표가 뚝 끊겨 왔던 길을 되돌리고 만다.
<이정표를 따라 업성저수지까지 왔는데도 농수로 공사로 길은 끊어지고>
그렇다고 다시 직산역으로 원점회귀 하기에는 억울하다는(?) 심정으로
시멘트가 깔린 농로를 최대한 이용하여
두정역을 바라보고 논둑길을 따르기로 마음을 토닥이며 성환천 개울을 끼고 논둑길을 가노라니
고라니 한마리가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친다.
비록 길이 잘못 나고 이정표가 떨어져나가 길을 잃어도 그렇게 억울해 하지 않는 사연이다.
어차피 통하는 길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긴, 요즘엔 낙엽이 깔려도 너무 깔려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마저 맥 못 추고 주저앉는 시절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개울을 낀 논둑길을 따라>
<철길을 이정표 삼아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천안대로를 다시 만나고 두정역을 향해 가다보니
두정역동1길을 따라 벽면에 천안을 자랑하는 사진들이 이어져간다.
생각지 못한 수확에 흐뭇해하며 두정1교 부근에서 끊어졌던 삼남길 이정표를 발견하고
두정역동1길을 따라 두정역으로 방향을 고쳐 잡는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하야들길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두정역동1길을 따라 두정역으로>
<두정역을 지나 이안더센트럴@ 옆길을 따라>
부지런히 이정표를 따라 동서고가 옆길을 끼고 천안천의 방죽다리까지 왔는데
다리를 건너자 이정표가 또 사라져 그냥 천안대림아파트를 끼고 빙 한 바퀴 돌면서
이정표가 사라진 까닭을 챙겨보다 빈 밥통을 채우고 보자는 심사로
근처에 있는 적당한 식당에 털썩 주저앉아 걸어온 길을 곰곰이 따져보다
밥통이 채워지면 천안역 방면으로 가서
비를 핑계로 오늘은 일찍 마무리를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다시 찾은 이정표지만 금방 놓쳐버리고~~>
간사한 것이 마음인가?
터미널사거리에서 신세계백화점을 만나고 400번 버스를 보자 마음이 달라져서
2코스 종점인 천안삼거리공원에서 역으로 이정표를 찾으며 천안역으로 향해보자고
다시 생각을 돌려 먹고 기다리고 있는 400번 버스에 올라 얼른 자리를 잡는다.
이정표를 순진하게 따르자던 초심이
이정표를 잃자 다시 갈팡질팡 정말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시간도 넉넉하겠다.
걷는 것도 아니니 내친 김에 버스의 종점인 병천까지 가보자고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 애라 모르겠다. 갈 데까지 가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뭐라도 걸리겠지.
병천순대나 맛보고 갈까 하던 흔들림이 유관순열사 사우라는 관광안내판을 발견하자
발길은 어느새 치근거리는 겨울비를 마다않고 그쪽으로 저절로 옮겨가고 있다.
결국 두정역에서 본 사진이 이끌었던
아니며 서대문형무소에서 마주친 여옥사의 안내가 길잡이가 되었건
비오는 날에 유관순열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전적 의미야 비슷할 것 같은데 보훈처에서 업무의 편의상(?)
무력을 사용하면 義士가 되고 맨몸으로 저항하면 烈士라고 구분하여 정의를 한 모양이다.
하여 유관순 누나는 옥중에서도 맨몸으로 만세만을 외쳤으니 분명 열사임에 틀림이 없겠다.
어차피 한번은 와야 할 길이 아니던가?
월요일은 대개가 휴관인데 유관순 사우(祠宇)는 다행이도 길손을 받고 있어 반가운 일이다.
1902년생이니 만약 살아있다면
100세를 넘겨도 훨씬 넘긴 꼬부랑 할머니도 그런 꼬부랑 할머니가 아닐 터인데
남아있는 뇌리에는 아득한 먼 옛날의 유관순 열사보다 유관순 누나가 더 귀에 쟁쟁하니
어릴 적의 추억이 정말 길게 가는 모양이다.
하긴,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만세를 부르다 구타와 영양실조로 병사(?)하였으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꼴이 되었으니
낭인에 의해 처참한 꼴로 운명을 달리한 대한제국의 명성황후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그저 열사를 안타까워하는 초혼묘(招魂墓)만이 길손을 쓸쓸히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유관순열사 사우 전경>
<1972년 건립된 유관순열사 추모각>
<2007년 2월 28일 봉안된 유관순열사 영정-석정 윤여환 화백>
<유관순열사 초혼묘 오르는 길>
<1989년 10월 12일 봉안된 유관순열사 초혼묘>
아우내 만세운동이란
아우내는 竝川의 순우리말로 두 개의 개울이 만나는 곳이니 바로 두물머리인 셈이고
이 아우내 장터에서 광무황제(고종)의 붕어로 일어난 1919년 서울의 3•1운동에 이어
그로 인해 내려진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유관순의 주도하에
음력 3월1일인 4월1일에 3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아우내 장터에 함께 모여 만세를 부르다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현장에서 순직한 만세시위운동이다.
꽃다운 나이에 철장신세를 졌으니 그 억울함이 오죽했을까
그나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녀의 혼을 때늦게 불러온 것도
아마 박통시절 위인들의 성역화작업의 일환으로 추모각과 봉화탑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유관순열사의 영정을 제대로 봉안한 것이 그리 멀지 않은 2007년이니
새삼스레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은 이미 아니지 않는가?
아무튼, 초혼묘 오르는 길에 그의 후진들이 지어서 새겨놓은 글들이 있어 뿌듯하고
24곳의 봉화를 함께 불러온 매봉산 봉화탑 가는 산책로가 아담하여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진다
<매봉산 봉화탑 가는 산책로를 따라>
<1977년 170m 매화산 정상에 건립된 유관순열사 봉화탑>
봉화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유관순열사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비는 오락가락 하여도 소복이 쌓인 낙엽이 그렇게 미끄럽지 않는 산책로라
가족과 함께 하는 나들이로 집을 나서도 안성맞춤이겠다.
한때는 부부가 함께 낙엽산행을 한답시고
천등산으로 인등산으로 무작정 헤매던 시절이 떠올라 새삼 그리워하면서
조병옥박사 생가를 뒤로 하고 발길을 유관순열사 사우로 돌리며 하루를 접는다.
<유관순열사 생가 가는 산책로를 따라>
<유관순열사 생가 전경>
<매봉산 아래에 복원된 생가 관리사 - 매봉교회 - 생가 원경>
저녁놀
따사롭던 그 햇살은 다 어디로 떠나가고
그렁그렁 눈시울이 붉어지니 저녁놀
찬바람
쌩 하게 불어
지는 해가 너무 춥다.
그저 들꽃으로 피길 원했습니다.
진정 내 조국의 땅속으로 흐르는 물길로
가슴을 채우고
진정 내 조국의 땅 위에 부는 바람으로
모질게 일어서는
들꽃으로 피길 원했습니다. (이화여고 이 승희 짓고 연호 박 영옥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