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홍가네 생태 집 큰 아들
베이비부머, 정년이 60으로 늘어났지만 어느 새 퇴직 시간이 되어버렸다. 올해부터는 은퇴자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이다. 정년61세인 내 직장, 생일이 1년 늦춰지는 바람에 나도 이제 2년이 남았다. 그들이 손쉽게 창업하고 돈 벌기 어려워 망하는 게 생계형 자영업이다. 내수침체와 동종 업종 간 과열경쟁으로 자영업에 뛰어든 10명 가운데 7명이 3년 안에 망하는 자영업자의 몰락 상황임에도 손쉽게 가게를 차릴 수 있는 음식점, 치킨집, 카페, 편의점, 숙박업 창업에 여전히 생계형 창업자들이 몰리는 게 현실이다.
생계형 자영업자의 증가는 중장년의 이른 퇴직과 관계가 깊다. 연금 수급 시기까지 소득을 확보하기 위해 일할 곳을 찾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충분한 준비 없이 생계형 자영업 창업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현재 자영업자 121만명이 매출액 2,400만원도 안 되는 워킹 푸어였다. 워킹 푸어 (Working Poor·근로빈곤)는 일하는 빈곤층을 뜻하는 말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일하는 가구의 빈곤이라고 함은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빈곤선을 결정하고 일하는 가구라도 빈곤선 이하에 속하면 이를 ‘워킹 푸어’로 정의한다.
이들은 월급이 나오는 일자리가 있어 얼핏 보기엔 중산층 같지만, 고용도 불안하고 저축도 없어 언제라도 극빈층으로 추락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지난해 창업자 82.6%가 창업동기로 ‘생계유지“를 꼽았다. 자영업 창업자 123 만명 중 102 만명이 생계형 창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업종쏠림 현상 과 과당경쟁으로 워킹 푸어를 거쳐서 3년 내에 3분지2가 폐업을 하는 것이다.
음식장사라는 게 그렇다. 열 명중 7명은 파리 날리고 2명은 자신의 노동대가로 겨우 현상유지하고 1명만이 대박을 터트린다. 그나마 프랜차이즈 업종이 갑질 횡포를 당해도 망할 확률이 떨어지니 이를 택하는 편이 낫다고 전문가들은 조언을 한다. 구즉 마을 송강동에서도 숫하게 본 게 망해가는 과정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 식당을 차린다. 이에는 대박을 터트린 가게를 보면서 그 정도는 나도 해낼 수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손쉽게 창업하고 또 쉬이 문을 닫고 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송강동 생태 집, 내 단골집이기도 한데 그 집은 소위 대박이 난 집이다.
원래 명태라는 생선이 우리에게는 아주 흔한 생선이 아닌가.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으레 떠오르는 게 따뜻한 국물, 국민 생선 생태탕이다. 담백하고 깔끔하며 지방이 적어 기름기가 없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맑게 끓여낸 국물도 시원하고, 고춧가루를 풀어 칼칼하게 끓인 매운탕도 맛있다. 생태 살은 젓가락을 대면 그대로 부서질 만큼 부드러워 생태탕은 '밥상 차린 다음에 끓인다'는 말이 있다. 강한 불에 빨리 끓여내야 생선살이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말 문신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명천(明川)의 태(太)씨가 잡았다고 땅이름과 어부의 성을 따 명태라고 했다’고 적었다. 허나 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길 것만은 아니다. 명태 간(肝)을 먹어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또는 간의 기름으로 등불 밝혀 밝을 명(明)자 든 이름을 갖게 됐다는 얘기도 많다. 생것을 명태, 말린 것을 북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무태어(無泰魚)’나 ‘명태어’라는 이름도 나온다. 영어 이름은 ‘폴럭’(pollack)이다. 많이 잡히는 곳 이름을 넣어 ‘알래스카 폴럭’이라고도 부르는데 요즘 우리가 먹는 명태는 알래스카 바다에서 온 녀석들이다. 북어라 한 것은 북쪽에서 잡은 고기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녀석은 추워야 제 맛이고 추워야 나타난다.
자고로 동해는 명태 남해는 대구 서해는 조기라 하는 말이 고전에 나와 있으며 연암 박지원이는 열하일기에서 대구 말린 것으로 술 값을 대신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예로부터 국민 생선이다 보니 부쳐진 이름도 많다. 모양이나 성질에 따라 생태(生太), 동태(凍太), 북어(北魚), 황태(黃太), 코다리 등으로 불린다. 싱싱한 녀석은 생태, 동태는 얼린 것, 북어(건태)는 말린 것이다. 황태는 한 겨울 큰 덕장(건조장)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해 노랗게 변한 북어다. 더덕 같다고 더덕북어라고도 한다. 코다리는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네다섯 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반쯤 말린 것이다. 어린 명태 즉 애기태가 주당들에게 친근한 이름 노가리다. 그물로 잡아 망태(網太), 낚시에 걸린 조태(釣太)라는 이름도 있다.
인삼으로 치면 홍삼 격인 귀한 황태로의 변신 과정에서 ‘낙오자’가 된 명태들에게도 이름이 있다. 푹한 날씨로 풀려버리면 먹태(흑태), 얼어서 하얗게 마르면 백태, 너무 딱딱하게 말라버리면 깡태다. 이밖에도 여러 이름들이 줄섰다.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생선이기도 한 것이다.
머리 꼬리 살 내장 다 기찬 먹거리다. 살코기와 곤이(鯤鮞·물고기 배 속의 알)는 국이나 찌개, 알과 창자는 명란젓 창난젓이 된다. 생태찌개 생태매운탕 황태구이 황태찜 북엇국 북어무침 등이 모두 명태요리의 한 가족이다. 명태와 함께 넙치 돔 다랑어 상어 고래 대구 등의 간에서 얻은 간유(肝油)는 ‘눈의 보약’이다. 버리는 게 없는 놈이다. 우리 겨레와 아주 오랜 인연을 맺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연 추우면 떠오르는 생태탕, 이는 한겨레의 DNA인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그 말은 그 생선이 흔해 빠진 만큼 너도나도 쉽게 달라붙었다가 쉬이 망할 수 있는 음식 소재란 말도 된다. 그러기에 그 동네에도 동태탕 간판이 즐비하다. 헌데 홍가네 생태탕 집만 대박이 났다. 본가가 번성하더니만 송강 전통 시장 옆에 그 집 큰 아들이 1호점을 냈는데 그곳 역시 날로 번창 일로에 있다. 이에는 뭐니 뭐니 해도 맛에 있다. 나는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는데 벌써 곳을 찾은 지 햇수로 7년이 넘는다. 분명 숨겨진 비법이 있는 집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상술이 뛰어나다. 그 집 큰 아들은 그런 점에서 타고났다.
한 번 찾은 사람은 꼭 기억해두고 밝은 인사성에 그 사람의 습성도 어느새 캐치를 했는지 서비스도 따른다. 퍼주며 돈 번다고 할까, “저 번 코다리 냉면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입가심으로 조금 그냥 드립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 봐가며 유혹의 물결도 만만하지 않은 친구다. 사실 나는 그런 부류의 상술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아니 어느 면 나는 분개도 한다. 그들은 왜 하필 우리냐 하며 억울해 할 것이지만 상술이 동원되어 이 땅에 순수성을 망가트린 장본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뭐 퍼넘기는데 당할 재간 있는가. 아무튼 뭐 이런 말이다. 속을 감추고 연실 하는 겉치례 말로써 도대체 진실은 뭐냐 하는 의구심이 바로 그들로부터 탄생됐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진수성찬을 차리고도 변변치 못 하다거니 제 여식이 곱지 못하다 하는 등등의 표현에 대해 이중적 해석을 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뭐 겸손이란 허울로 그렇다고 용서를 하자 치자 이제는 맛이 괜찮다는 표현은 맛이 없는 것으로 판정하게 되고 밉지 않다는 말은 밉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도 해석이 가능토록 하여 정반대 의미마저도 손아귀에 넣는 행실을 범하고도 있다. 요즘 부쩍 는 맛자랑 코너 TV를 보면 맛을 상대한 표정과 판이한 엄지 척이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야!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자.’ 이 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 그냥 인사치레 말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집 큰 아들의 친절을 진실로 순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반 이상은 믿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 같이 대한다싶은 말들, 그런 친구들에게는 조금 전에 만난 사람도 이모님이고 형님이고 선생님이고 사장님이다. 아무튼 나는 코다리 냉면 서비스에 그가 보인 친절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내 책을 한 번 선사를 했었다. 그 다음부터는 나는 조 작가님으로써 극진한 대접을 받아 주변사람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 친구는 냉면 양념을 한 통 보란 듯이 내게 선사를 했다. 심심할 때 국수에 말아 같이 먹으라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나에 대한 그의 행각은 두드러졌다. 애초 굳은 결심이었지만 나 좋다는데 마음이 왜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내 글을 주워 꿰다시피 특히 몇몇 글에 대해서는 내용도 소상히 ‘눈물이 나대요.’ 라든지 ‘큰 외삼촌 생각이 났어요.’ 하며 친근감을 표시하곤 했다. 한 명의 독자만 있어도 글을 쓴다는 내 신조로써 이는 진정성에 가깝다고 아니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득 이 나이 인연은 더 이상 길게 늘이지는 않겠다는 신조에서 한 걸음 물러서 그를 진정성 반 상술 반으로 자리매김을 고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인연은 또 인연을 낳는다. 그와의 돈독함은 아주 엉뚱한 데서 촉발됐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본격적으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