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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다가 보이는 전망좋은집 원문보기 글쓴이: 변산반도
역사스페셜 (1998)
역사스페셜 대사를 적어봅니다
(성우)
400년전, 기생과 천민의 신분으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 이들이 있었다
이화우 흩부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두 연인은 가고 없지만
애닯은 싯귀가 남아서 그 옛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MC)
이화우 흩부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이별한 님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시존데요
지은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시조의 지은이는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의 한사람인 매창입니다
매창은 부안 출신의 기생으로
한문 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 또한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대 명성이 전국에 퍼져서,
당시의 사대부들 중에는 그녀를 만나보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매창과 친분을 맺은 사람중에는
전라도 일대의 현감을 지낸 이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같은 인물도 있었지요
그런데 정작 매창이 사랑했던 인물은
지위가 높은 관료도, 이름이 알려진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단 한사람의 연인,
그는 유희경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신분은 조선시대에 가장 업신여김을 받은 천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기생이 사랑한 남자가 천민이었다.
놀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양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한시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스페셜 오늘 이 시간에는,
매창과 그의 연인 유희경의 사랑을 통해서,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같은 사랑이 가능했던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매창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성우)
부안시내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서림공원.
이곳의 입구에서 매창의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
매창시비
지난 1974년에 세워진 이 시비는,
매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세운것으로,
그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정을 짐작케 해준다.
(2001년당시 김민성부안 문화원장)
매창이 이 곳에서 담소를 즐기고~~~
그런 장소가 되어서 그 뜻을 살려서 매창의
시비를 세우게 된것입니다
(성우)
다시 언덕을 따라 10여분을 걷노라면,
매창의 무덤 앞에 다다르게 된다.
변변한 비석 하나 갖추지 못한,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그녀의 무덤은
단정희 손질 돼 있었다.
부안 사람들에게 매창은,
시와 거문고 연주에 능했던 이고장의 대표적인 예술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매창의 시는 , 그녀가 죽은 이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것을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는데,
원하는 이가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올만큼,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매창은,1573년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계생이었는데 어린시절부터 한문 공부와
거문고 연주를 즐겼다고 한다.
기생이 된 후엔, 이름을 계량으로 바꾸고
직접 자신의 호를 지어 매창이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명성은 인근 양반들 사이에 알려지게 됐는데,
부안에는 그 시절 매창이 즐겨 찾았다는 곳이 지금도 남아았다.
(김민성 문화원장)
여긴 금대입니다
매창이 이 바위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인 묵객들과 함께 했던 자리이다.
(성우)
매창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수 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그녀를 보기위해 부안을 찾았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이귀와 허균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균은 매창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굴은 비록 뛰어나지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고 서로 시를 주고 받았는데,
저녁이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주었다.
여행하는 곳곳마다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 허균이었건만
매창과는 남녀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후 두사람은, 평생 우정을 나누는 친구사이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10년 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10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는가?(허균의 편지에서)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매창은 기생이면서도 기생이 아닌 것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매창을 사랑하는 이유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기 때문이다.
기생으로 살면서도 절개를 지켰던 면모들이
매창 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성적인 다정다감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두가지 면 때문에 부안사람들, 그리고 후세의 시인들이
매창문학을 그것때문에 후세사람들이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성우)
기생의 신분으로 하나,
매창은 행동거지가 바르고 절개가 곧은 여인이었다.
손님들 중에, 그녀를 유혹해 보려는 이들도 많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같은 매창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은 스물 여덟살 연상이었던,
촌은 유희경과의 만남이었다.
(MC)
시인 신석정은 개성에 송도3절이 있듯이
부안에는 부안3절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송도삼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박연폭포,황진이,황진이가 사랑했던 화담 서경덕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송도3절과 대비해서 신석정은,
부안의 명물인 직소폭포, 그리고 매창과 유희경을 일컬어
부안3절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두사람을 황진이와 서경덕의 사랑에 비유한 것이지요.
그러나 화담 서경덕이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였던 것에 반해,
유희경의 처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매창의 나이 스무살에 찾아온 사랑~~~
그것은 이름난 사대부의 관심을 함 몸에 받고 있던 기생과,
내세울 것 하나없는 천민출신 사내의 사랑이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 두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절 수 있었늕,
400년 전의 러브스토리, 그 첫장을 들려다 보겠습니다.
(성우)
남해 용문사에 유희경과 관련된 유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곳을 찾았다.
주시 스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대웅전,불상 좌대의 뒤편이었다.
30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보관해 온 것은, 나무로 만든 목판들이었다.
모두 쉰 두장인 이 목판은 유희경을 문집을 새긴 것이었다.
어떻게 이 목판들이 이곳에 보관되고 있을까?
(중현스님-용문사 주지)
이 책본은 유희경의 손자되는 분이 고성만호로 재직하고 계실때
만호는 지방무사계급 종4품에 해당하는 계급인데
치안을 담당했던 그런 자리인 모양입니다.
지역적으로 용문사와 보성이 인접해 있는 이런관계로
용문사의 도움을 받아서 책판을 제작하고 그 이후 책판은
용문사에 보관하고 있지 않아,그렇게 생각합니다.
병마절도사(병사..종2품 당상관) 군절도사(수사..정3품 당상관)
병마우후(종3품)첨절제사(종3품) 군우후(정4품) 첨절제사(종4품)
만호(종4품) 마절제도위(종6품) 목관(종6품)
(성우)
이 목판속에서 매창과 유희경,
두사람의 만남을 확인할 수있는 시 한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국의 계랑 이름일찍 일려져서
글재주 노래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서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촌은집>
시 속에서 등장하는 계랑은 매창의 이름이다.
결국 이시는 매창을 위해 지은 것임을 알 수있다.
(허미자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이 시는 유희경이 처음 매창을 만나서 읊은 시다.
서울에서 부안에 내려와 보고 정말 매창이 글재주와 노래솜씨가 뛰어나서
서울 장안에 소문난 기생인데 만나보니 틀림없는 기생이구나~~~
시솜씨등이 선녀에 비할만큼 훌륭한 기생이었다는 걸 극찬한 것이다.
(성우)
두 사람이 처음 만난것은 1591년, 봄날의 일이었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때 매창은 유,백중 누구냐고 묻고 있는데,
유,백이란 당시 천민시인으로 유명했던
유희경과 백대붕을 뜻하는 것이다.
(허경진교수)
매창은 유희경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도 유씨와 백씨중에 어느쪽이냐? 물었습니다
그걸보면 처음부터 두 사람은 만나기전부터 시를 통해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매창은 20살이 되기 전이다.
나이차가 많았는데 그때부터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성우)
촌은집에는,
유희경이 그때까지 뭇 여성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이때 비로소 파계했다고 적고있다.
그 어느 남자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던 매창과
뭇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던 유희경,
그런 두사람이 첫 만남에서 맺어진 것이었다.
유희경과 매창이,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린 것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신분의
한계에 대한 공감대가 컸을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문학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에
두 시인의 운명적 만남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듬해 찾아온 전쟁, 임진왜란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전국토를 휩쓴 전화의 불길속에서,
유희경은 의병활동을 결심하게 되고
두 연인은 이별을 맞게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매창은 유희경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움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손님들 중에 짖궂은 이들도 있기 마련,
그럴때면 그녀는 재치로써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의 옷자락을 잡으니
그 손길따라
명주 저고리 소리내며 찢어졌군요.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온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것이 두려워요.
독수공방의 나날을 이어갔지만
님으로 부터의 소식은 오지 않았고,
그리움만이 깊어질 뿐이었다.
(MC와 오정해)
지금 보신 드라마는 kbs에서 방송했던 허균의 생애를 다루었던
천둥소리라는 드라마였습니다.
드라마에서 그리고 오정해씨 매창역을 맡으시면서 어떠셨습니까?
그 여인의 매력이 뭐든가요?
(오정해)
황진이와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두사람 모두 시인으로서 또 음악 연주가가로써
전국에 그 명성이 드높았던 기생이었잖아요.
황진이가 파격적인 행독과 남성편력으로
이름이 높았던데 반해, 매창은 언행에
품위가 있고 절개를 지키던 그런 기생이었습니다.
꽃에 비유하자면 황진이가 오뉴월의 붉은 장미 같은 여이었다면
매창은 초 봄에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같은 여인이었다고 할까요~~
(MC)
매창 자신도 그런 매화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호를 매화꽃피는 창이라는 뜻으로 매창이라고 지었던 은 아닐까요
(오정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여인이,
바로 매창이 아닌가 싶습니다.
(MC)
드라마 중에서도 매창과 유희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매창이 왜 유히경을 선택했는지,오정해씨 생각은 어떠신가요?
(오정해)
사실은 저도 그 부분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이 드라마는 허균의 생애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극중에서 매창과 유희경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과
유희경이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
아주 독특한 부분인데요
어찌됐든지간에 유희경이 어떤 인물이엇기에
그토록 사랑했을까 궁금합니다.
(MC)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촌은집에서 벼슬명칭이 나온다)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
이것은 촌은지비 행록에 기록된 것으로
전부 유희경에게 내려졌던 벼슬 이름입니다.
분명, 유희경은 천민이라고 알고 있는데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천민인 유희경이 어떻게 한성부윤까지
추존될 수 있었는지 저도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자 이부분을 오정해씨와 함께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보겠습니다.
(성우)
촌은집의 원본이 보관돼 있는 규장각을 찾았다.
족보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촌은집은, 유희경의 행적을 파악할 수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규장각 신병주 박사)
이게 유희경이 쓴 촌음집 원본입니다.
문집을 열어보면 촌음집서 라는 서문이 나오고~~~
(성우)
촌은집은 두 권의 책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앞쪽에는 유희경이 지은 시들이,
그 뒤로는 다른 사람들이, 유희경에 대해
적어놓은 기록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었다.
(신병주박사) 을사년에 출생해서~~
92세까지 사신 그런 인물입니다.
(성우) 일대기를 요약한 행록에 따르면,
유희경은 살아 생전에는 종2품 가의대부를 지냈고,
사후에는 정2품 한성부 판윤으로까지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오정해) 제가 알기로는 유희경은 천민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벼슬까지 할 수 있었어요?
(신병주박사) 벼슬이라는 것 차체도 실제적으로 그 직을 맡았다는게 아니라,
오늘날 개념으로 치면 명예직에 해당하는 품계를 받은것~~~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우)유희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천민신분을 벗어났고,
그 후 벼슬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은
조상의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이름:도치 아버지이름 :업동
이같은 이름은 당시 양반들에겐 사용되진 않던 이름이었다.
이처럼 낮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유희경에 대해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여러곳에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 역대 위인 천여명을 기록한 동국시화휘성
바로 이곳에 단군, 왕건, 이성계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발굴해 낸 또 하나의 자료는,
유희경의 행적을 기록한 구적첩이다.
그가 죽고 100년이 지난 뒤 쓰여진 이 책은
후대의 이름난 학자들이 유희경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것이다.
규장각 서고 깊숙이서 잠들고 있었던 유희경에 대한
평가가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신병주박사)
이것은 유희경이 살아 생전에도 많은 사대부 학자와 교류가 있었고
그 이름을 넓혀갔는 그런 점 외에도
죽어서도 양반사대부들에게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걸
충분히 확인할 수있는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성우)그런데, 어떻게 천민 출신인 유희경이
한시를 짖고, 이처럼 세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촌은집에 따르면, 유희경이 열세살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유희경은 혼자 3년상을 치렀는데이것이 당대 이름난
학자였던 남언경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허경진 연세데 국문과 교수)
우리 조선시대 때 모두들 3년상을 지켰다고 믿고있다~
3년상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3년동안 집에서가 아니라 무덤 곁에서 지키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3년상을 지키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3년상을 잘 지켰다는 것 때문에 효자로 인정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못 지켰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남언경이 이 사람이야 말로 효자다 인정하고,
효자라는 것은 삼강오륜 중에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거든요
자기 학문을 전수할 제자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그에게 예법을 가르첬던 것이다.
(성우) 남언경으로부터 정통 예법을 배운 유희경은
천민의 신분에는 드물게 당대 손꼽히는 상장례 전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경사가 된 것이었다.
경사란, 장례절차를 모르는 일반인들을 대신해 상장례전반의 예법을 조언하고
장례를 도맡아 하는 이들을 뜻하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사대부들의 초상은 물론이고,
국상때도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당시 항간에는
유희경의 명성을 짐작할 수있는 소문이 떠돌았다.
허준의 스승이었던 어의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고영진 광주대 역사학과 교수)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죽었으니까 의사였던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이 장사를 치르기위해 대접을 받으며
앞문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라고 할 수있다.
그만큼 유희경이 상장례에 있어 유명했음을 알 수있다.
(성우) 유희경에게는
남언경 외에 또 한사람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이었다.
남언경에게서 예법을 배웠다면
박순은 시를 가르천 스승이었다.
그는 당대의 화려하기만 한 시경향을 비판하고,
담백한 시를 추구한 그시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바로 그가 유희경에게 시를 가르첬던 것이다.
유희경이 박순을 만난 것은 독서당을 드나들면서였다
상갓집에 불려다니는 틈틈이 시짓기를 즐겼던 유희경은,
이곳의 젊은 학자들과 곧 잘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유희경의 시를 본 박순은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 그에게 시를 가르치게 됐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유희경은
더 많은 양반 사대부들과 교류를 갖게된다
이로써, 그는 천민의 신분임에도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시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MC)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유희경이 매창과 이별한 후에 그녀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입니다.
촌은집 속에는 이같은 연시가 여러편 나오는데,
이것을 통해서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했듯이,
유희경 또한 그녀를 그리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것은
첫 만남이 있은지 15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이 두사람의 이별이 계속되고 있는동안
유희경은 한문학 공부와 시작에만 열중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침류대라 이름을 짓고
그 곳에서 시짖기에 열중을 하게 되는데
임진왜란 이후엔 명성이 잦은 학자들과 양반 사대부들이
이곳을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왕실의 일원이었던 완평부원군 이원익을 비롯해,
장유,김상헌, 이수광, 신흠 등 당대의 손꼽히는 학자들과 양반사대부들이
침류대를 찾아와 그와 함께 시를 나누고 풍류를 즐겼다는 것인데,
신분을 비춰볼 때 , 천민에 불과한 그의 신분에 비춰보자면,
어떻게 이같은 일들이 가능했던 것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수광은 침류대를 일컬어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비유했는데요,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대.즉 너른 바뤼 주위에는 복숭아 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있고,
시냇물 양쪽으로는 꽃비가 흩뿌리니 바단물결이 춤추는 것 같다
옛날의 도원이 이보다 더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 침류대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유희경의 책 <행록>에 보면
[家在淨業院下下流]집은 정업원 아래쪽의 하류,
속칭 원동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같은 기록을 단서로,
대체 침류대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던 것인지,
또 왜 그토록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드나들었던 것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성우) 창덕궁 기록 속에서 단서가 된 정업원은
현재의 창덕궁 서편 원동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 외에 , 침류대의 위치를 추정해 볼 있는
기록들을 중심으로 그 위치를 찾아보기로 했다.
또 하나의 단서는, 이수광의 기록이다
배경 - 금천교위
(신병주 박사) 이수광이 쓴 침류대기란 글에 보면,
유희경이 이수광에게 내가 거처하는 곳은
금천의 상류라고 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금천교를 따라 상류를 올라간 곳에
침류대가 있었다는 실을 확인 시켜주고
(성우) 금천교는, 궁궐 입구쪽에 위치해 있는 다리의 이름이다.
기록대로라면 이 금천의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침류대가 있던 자리와 만나게 될 터였다.
두가지의 기록을 종합해,
침류대의위치를 추정해 보면~
먼저 침류대는 정업원의 아래쪽 계곡 하류에 위치해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그 물길은 금천교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상류쪽으로 백여보를
올라간 지점이 침류대의 위치임을 알 수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침류대는 궁굴 안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있다.
(오정해) 어떻게 해서 침류대가 대궐 안에 들어와 있을까요?
(정현숙 창덕궁 관리소)
대궐의 확장공사가 있게 되는데 서쪽담장은 효종때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병주박사) 아마 그 말이 맞을 겁니다.효종때 만수전을 지으면서
이지역 침류대를 편입했던 것 같아요
개인의 집터가 궁궐 안에 있는 것이 넌센스이긴한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 궁굴의 확장 공사 과정에서
유희경의 집터는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성우)후대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효종때 궁궐 확장공사를 하면서,
침류대는 완평부원군 이원익의 집과 함께 궐안으로 편입됐다고 한다.
창덕궁의 돌담에서 , 그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볼 수 있었다.
서편담장에는 ㄱ자로 꺽여있는 확장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찾던 침류대는
현재의창덕궁 서편, 담장 안쪽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희경이 살았을 당시의 침류대 위치를 추정해 보면,
궁궐의 경계는 지금과 달리 금천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궐의 출입문(경추문)에서 침류대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침류대는,
조선 상류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었는데,
왕비(인목대비)가 궁궐너머로
침류대를 거니는 유희경을 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신병주박사)
당시로는 상당히 계곡이 발달했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복숭아꽃 버드나무가 만발해서 아주 풍치가 좋았던 공간이다
~~~ 당시로 치면 중심지였다.
이래서 당시를 대표하는 명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서로 교우관계를 갖기도 하면서 이곳은 17세기 초반 조선의
문화 사랑방의 장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성우)침류대를 드나들었던 수 많은 문인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도원속으로 걸어들어가니
봄바람 속에 꽃도 많은 것이
친한 친구 술 권하는데
석양이 기우는 줄도 몰랐소<임숙영의 침류대기>
수 많은 양반들이 침류대를 찾게 된데는,
유희경의 신분상승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난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였는데,
전쟁중 의병활동을 인정 받아 신분상승을 이뤘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두번의 전쟁은
조선시대 전체를 통털어 신분 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전쟁 비용이나 군사를 충당하기 어려웠던
조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헌납했던 노비들에게 면천 증서를 주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노비가 적의 목을 일급 참수하면 면천을 허락하고
노비가 군의 목을 벨 경우 이급이상이면
수에 따라 수문장 등의 직위를 줌]
그 많고 적음에 따라 면천, 혹은 벼슬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고영진 교수) 바로 유희경이 태어났던 시대도 그런 것이 활발히
이뤄졌던 시대이고, 유희경도 임란때 공을 세워서 천인을 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봉사도(사신행차도)
1609년, 유희경은 또 한차례의 공을 세운다.
조정의 고민거리였던 중국사신들의 접대
비용 마련에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정3품 당상관의 벼슬을 내리게 된다.
결국 유희경은 천민에서 양인으로,
다시 명목상이긴 하지만 사대부 당상관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그 후에도,유희경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대부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즐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침류대를 드나들었던
사대부들 의 면면을 살펴보면
차천로, 이수광, 신흠, 조우인 등
당대의 내노라는 문인들이 포한돼 있었다.
면천됐다고는 하지만,
유희경은 엄연한 천민 출신었다.
침류대를 드나들었던 당시의 사대부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천민 출신인 그와
격이 없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서울대 한용우 교수는 이들이,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개방적 성향의 학자들이었음을 주목했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
침류대 학사들이 수십명인데 상당수가 화담 서경덕 선생의
학풍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화담 서경덕 선생은 아시다시피 개성사람이다.
개성은 고려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중국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이쪽 사람들이
대단히 사상적으로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다.
(성우)화담학파의 사상적 경향은
율곡이이와 퇴계학파등 조선의
정통 성리학파들과는 달리 당시 이단으로
여기던 양명학과 도교 등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이 학풍을 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위에서 천민인 유희경과도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용우 교수) 화담학파의 신분적 개방성 때문에, 유희경 같은 사람도
천민이지만 침류대를 설치하고 이곳에 서울 궁중 대부 및
각계 각층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고 볼 수 있다
(성우)이같은 배경속에 침류대는
당대 학자들의 토론의 장이자 문학 활동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무엇보다 주변의 뛰어난 풍광과,
궁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백악산 자락,
이같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침류대는 많은 사대부 학자들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MC)
결과적으로 유희경은 천인의 신분에서 출발해,
당대 최고의 문학 살롱으로 부각된 침류대의 주인이 된 셈이니
그야말로 지위가 격상된 셈인데요, 물론 이것은 그의 학식과
겸손한 사람 됨됨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가지의 의문이 생깁니다.
유희경이 양반 사대부들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가 면천한 이후이 일이지만 글을 배우고 시를 읇었던 것은
분명 천민시절부터 였습니다.
조선시대! 신분제가 엄격하게 지켜졌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유희경은 어떻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천민도 글을 배우는 것이 가능했을 것일까요?
서울대 정옥자 교수님께 그 해답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
조선왕조는 문치주의국가다.
문치주의라는 것은 글을 숭상하는 그런 나라라는 것,
오늘날로 말하면 무력이나 이런 것을 숭상한게 아니라
문화를 숭상한다고 그렇게 풀어볼 수 있겠습니다.
글자를 아는게 중요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은 혈연적인 그런 요인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잘 하는 그런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자를 익히고
자기 문자의 능력으로써 사회적인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고,
누구나 글을 배우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게 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중인이하의 계층들도 글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부각시키고
세습직을 수행하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그러면서 시대가 뒤로 갈 수록
그것이 신분상승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MC)
그렇습니다.조선시대에는 신분이 낮다고 해서
글을 배우는 게 원척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던 것 입니다.
실제로도 전국에 서당이 존재했고, 글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죠.
선조때 서기라는 인물은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양반 자제들까지
자신의 문하에 두고 가르치기도 했고,어무적, 이달과 같은 이는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문학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희경이 살았던 조선중기는 아직 신분제가 확고해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양반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만 뛰어났다면
사대부들로부터 인정 받을 수있었고 교류를 갖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시대 중인이하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문학세계를 만들어 나가기도 했는데요,
바로 그 중심에 우리의 주인공 유희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우)젊은 시절, 유희경이 친하게 지낸
사람 중에 백대붕이란 자가 있었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전함사의 노비였는데
그 역시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유희경은 백대붕과 더불어 시짓기를 즐겼는데
두 사람의 명성은 양반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 이 두 사람을 가리켜 풍월향도라고 일컬었다.
(고영진 교수)
풍월향도는 임진왜란 전에 백대붕과 유희경을 중심으로 한
천민과 평민들이 모여서 만든 문학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월이라 하는 것은 결국 문학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상두꾼이라 하는 것은 향도를 의미하는데
그래서 풍월향도란
풍월이라하는 문학과 향도라하는 상두꾼, 상장례가 이렇게 결합돼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할 수있다. 결국 유희경이 상장례에 정통을 했고
문학에도 능해, 그런 이름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할 수 있죠.
(성우)유희경과 백대붕을 리더로 하는 풍월향도는,
임지왜란 이전까지가 그 전성기였다.
전쟁 과정에서 백대붕이 사망하고
유희경마저 신분이 상승한 후
서민출신들의 시모임인 풍월향도는
<삼청 시사>에게 그 전통이 이어진다.
삼청시사는, 주로 삼청동에 모여
시 활동을 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희경의 제자격인 최기남을 중심으로
아전, 서리,역관, 등 중인이하 신분들 모여
시와 문장을 지으며 자신들만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허경진 교수)
유희경의 제자 가운데 최기남이라는 사람이 서당을 했는데,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친구들이 모여서 시를 썼던 곳입니다
최기남의 신분이 신익성이라는, 선조부마인데
그 집안의 노예였습니다.
자연히 그의 집에 아전이나
역관들 중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성우) 이들은 자신들끼리 주고 받은 시를 모아서
1658년,육가 잡영이란 시집을 발간한다.
이것은, 위항문학 최초의 시집이었다.
(정옥자 교수)
위항문학이라고 당시에는 위항이라고 썼습니다
대저택이 있는 부촌이 아니고 꼬불꼬불 길이 나 있는 달동네란 뜻으로
위항이란 말을 썼는데
그건 중인이하 계층은 전부 포함된다는 얘기입니다.천인까지도~
(성우)풍월향도에서 시작된 위항문학인들의
모임은 인왕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간다.
인왕산이 그 중심지가 된 까닭은,
양반들이 많이 살던 안국동이나
종로 등이 중심가와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땅값이 싸고 경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옥계시사였다.
이들은 주로 우두머리격인 천수경의 집근처,
송석원에서 모였다고 한다.
현재 옥인동47번지가 바로 그 송석원이 있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옛 모습을 기억할 수있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시의 개발로, 인왕산 자락에서 옛 풍류의 현장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옥계상류에 다다라서야,
위항 시인들이 모였을 것을 추정되는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경진교수)주로 시냇가 왼쪽 옆에 그런쪽에, 솔숲이겄거든요
소나무 숲 바위 밑에 거기서 모여서 시를 외고 그림을 그렸던
지금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냥 우연히 모인게 아니라 약속을 했어요
1년에,1달에 한번씩 12번, 처음에 모인 사람이13명인데요
한달에 한번 시를 쓰니까 156편이 되었겠죠.
그 묶은 시집이 옥계사라는 시집이구요. 그때 그림이 있는데
주로 인왕산을 배경으로 철 따라서 그림이 네폭이 남아있습니다.
(성우)위항문학은 이 옥계시사로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한문학은 양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 외에 사람들은 업무상의 이유나 출세을 위해 글을 배울 뿐이었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
이같은 실용적 목적뿐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모임에 대해, 조선왕조에서도
후원해 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정옥자교수)
지금 시대가 문치주이 시대니까 글자를 해독하고
문학 활동 하는 것은 굉장한 국가적이 어떤 흐름하고 맞 물리는
좋은 운동이라고 파악을 했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이들의 성장이나 결집을 너무 전부 제한하고
누를 경우에는 크게 폭발하면 어떠한 체제 위협적인 사고가 나거나,
그럴까바 이들한테 어떤 숨구멍을 터주는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우)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위항 문학 모임은 후대로 내려가며
조금씩 그 성격이 변하게 된다
처음엔 순수한 문학적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신분 상승운동의 한 흐름으로 발전했고,
조선 말에 이르면, 근대화 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 거대한 흐름의 꼭대기에,
유희경과 풍월 향도가 있었다.
유희경 자신은 면천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대부 지향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비롯된 풍월 향도의 정신은
후배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위항 문학인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졌던 것이다.
(MC)
그야말로 유희경의 모든 것을 살펴 본 셈인데요,
오정해씨가 본 유희경,
한마디로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오정해) 글쎄요 자수성가란 말이 있듯이 유희경이란 사람은
이런 표현도 미흡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신분의 계급도 뛰어 넘을 수 있었고
당대 내노라 하는 그럼 매창과도 풋풋한 사랑을 이루어 질 수 있었던
바로 이 사람은 그 시대로 보나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유희경의 삶은
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MC)
젊어서는 천민이라는 한계를 딛고 시인으로 이름을 드높였고,
말년에는 명예직이긴 하지만 종2품의 벼슬까지 올랐으니,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무리한 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게다가 92세까지 천수를 누려서, 당시로는 정말 보기 드물게
장수를 한 셈이니, 그의 인생이 정말 대단히 성공적이고
순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의 90 생애를 통털어서 단 한번 그의 가슴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매창과의 사랑이었습니다.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
그 애닯은 러브스토리의 마지막 장을 열어보겠습니다.
(성우) 매창과 유희경이 다시 만난 것은
이별 후 15년 만이었다. 그러나 기나긴 세월의 공백도
두 사람의 사랑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예부터 님찾는 것은 때가 있다는데
시인께선 무슨일로 이리도 늦으셨는가
내 온 것은 님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라는 열흘 기약 있었기 때문이요.
뭇남성들을 상대해야 하는 기생과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이 두 연인에게는<시>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 매창과 유희경은 부안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함께 시를 읇고 사랑을 노래했다.
(유희경)
버들꽃 붉은 몸매도 잠시 동안만 봄이라서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선녀인들 독수 공방 어이 참겠소
무산에 운우의 정 자주 내리세
(매창)
외로운 산비둘기 물가로 돌아오고
날저문 모래밭엔 안개까지 내리는데
술잔을 맞들고서 마음을 주고 받지만
날이 밝으면 이몸이야 하는 끝에 가 있으리라
이별을 예감했던 매창의 싯귀처럼
짧은 재회의 시간이 지나고,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두 번째 이별은, 매창에게 더욱깊은
그리움을 남겼다.
유희경과 함깨 다녔던 장소를
홀로 헤매거나, 늦은 밤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매창은 자신의 외로움을 대신했다고 한다.
(허미자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매창의 생애 전체를 통털어서 유희경과 떠나서는
존재 의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겁니다.
(성우) 매창의 죽음.
그것은 이별 뒤 3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유희경에게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이 휴희경에 대한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것이다.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땅에 묻어주리
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MC)
짧은 만남이었지만
평생을 이어갔던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유희경은 말년에 지은 시들을 통해서
여전히 매창을 그리워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우리는 이 아련한 연시들을 통해,
죽음도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희경의 삶에서 다른 여인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에
비춰볼 때, 그에게 있어서도 매창은
단 한사람의 연인어었던 셈입니다.
매창이 사랑했던 남자, 천민 유희경,
400년전, 신분의 구별이 엄연하게 존재했던 그 시대에,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침류대의 주인으로 생을 마치기까지
유희경의 일생은 우리에게 그가 살았던 시대를 엿보게 해주는
스펙트럼인지도 모릅니다.
양반이 아니어도 글을 배울 수있고,
시를 짖고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사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반과 천민이 함께
더불어 풍류를 나누었던 시대,
이처럼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조선 중기의 참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제가 완고해지지 이전에,가능성과 유동성을 지닌
열린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한문학을 매개로
기생 매창과 천민 유희경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이야기가 남아서 400년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토막이 전해져 오고 있는것입니다.
첫댓글 400년전 애틋한 사랑이야기에 홀려...
사랑에 천민과 기생이 따로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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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들을 옮겨 담으신 언니를
저에 대한 -사랑을 전해주는 마음이구나...생각했지요.
울기 좋은땅에 가서 같이 실컷 울고 싶은 유명옥 샘 이지요 ...
이런 옛 사람들 만큼 정말 멋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왜 보이지 않는지 저는 그게 늘 안타깝습니다.
수수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