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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국방장관 간첩설까지... 이승만·신성모·채병덕이 부끄럽다
▲ 1948년 5월 10이 모진교에 위치한 23전초중대 로이드 스탠클리프 중위가 38 경계표시 위에서 찍은 사진 ⓒ 자료사진
대양 건너 남의 땅의 지도에 자를 대고 간편하게 '찌익' 그은 선이 38선이다. 바다와 섬과 강과 산을 넘어가며 남과 북을 깔끔하게 갈랐다. 그 가운데 북한강 다리 하나의 바로 북쪽을 지났다. 남쪽을 점령하기로 한 미군은 다리 북단의 공간이 초소를 만들기에는 너무 밭아서 다리 남단에 초소를 세웠다. 다리 중간에 38이란 숫자를 페인트로 큼직하게 써놨다.
이 다리는 모진교. 이곳의 북한강은 오래도록 모진강으로 불려왔기 때문에 1930년대에 세워진 이 다리는 모진교라고 명명했다. 춘천댐에서 물길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지점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시 사북면이다. 다리의 북단은 사북면 원평리 산70-5 이고, 남단은 인람리 산56-2이다.
모진교는 지금은 지상에나 공중에서는 보이지는 않는다. 춘천댐이 물을 가두자 수몰된 것이다. 모진교의 북쪽에는 말고개가 있다. 지금은 말고개 터널이 뚫려 대부분의 차량은 터널로 통행하고 말고개 산길은 한적한 옛길로 남아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북한은 5시), 운명의 그날 그 시각, 북한 인민군의 개전포격은 말고개 후방에서 시작됐다. 모진교 남쪽에는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가 배치돼 있었다. 포격 목표의 하나는 모진교 남쪽의 372고지의 관측소. 한 시간 가까이 포격이 계속됐다. 관측소 대원들은 전원이 전사했다. 대기하고 있던 인민군 보병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넜다.
그날 그 시각,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전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모진교를 건너다
▲ 모진교 기사연재 그래프 ⓒ 박종현
내 평생 쌓여온 기억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의 서사는 대략 이렇다. 적화야욕에 불타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괴뢰 김일성은 불법적으로 기습적으로 남침을 했다. 우리 국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에 뛰어들어 산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짚어 봐도 틀린 것이 없다. 참담하다. 그들이 희생한 땅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고개를 들면서 그들을 희생시킨 인민군과 국군의 절대적인 전력 차이의 안팎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병력이다. 개인의 싸움이든 정규군의 전쟁이든 병력의 차이는 승패를 가른다.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으로 병력은 9만5천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0개 보병 사단을 비롯하여 탱크와 자주포로 무장한 105기갑여단, 포병연대, 706기계화연대, 공병연대, 유격연대 등을 포함해 총 18만여 명이었다. 남북에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후 확군의 속도와 성과는 북한이 두 배가 될 정도로 우세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1949~1950년에 이루어진 만주 조선인부대의 대거 입북이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3개 사단(9개 연대)과 별도의 1개 연대가 무장한 그대로 입북하여 인민군에 편제됐다. 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과 4사단 18연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남북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실전 경험을, 그것도 승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당과의 화평을 깨고 시작한 내전, 곧 제2차 국공내전에 깊숙이 참전했고 승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을 포함해 소련군에서 활약한 조선인들도 소련군과 함께 또는 그 이후에 입북해서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됐다.
남한의 국군은 어떠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교육훈련과 실전 경험에서 정규군으로서 현대전을 수행할 최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보냈듯이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을 보내줄 동맹국도 없었다. 패전국의 군인이었던 조선인들은 애초에 계급도 낮았고 지휘관도 거의 없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했던 조선인들은 다수가 공산당 쪽으로 갔다. 일제 패망 이후 광복군은 만주로 가서 확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채 귀국해야 했다. 뒤늦게 귀국해보니 국방경비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대 출신도 일부 있었으나 역시 실전 경험은 거의 없었고 숫자도 적었다.
'미들급' 인민군을 상대한 '플라이급' 국군... 예상됐던 KO패
▲ 모진교 전투 전적지 ⓒ 윤태옥
사정이 이러하니 건군 초기에는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거나 약간의 군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고 이들이 곧 국군의 핵심 간부가 됐다. 경력으로 보면 중대장이나 대대장급이었으나 연대장이나 사단장에 보임됐다.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실전 경험은 물론 기본적인 교육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실전 경험이라야 제주도와 지리산에서의 반정부 무장대를 토벌하거나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을 감당한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국군의 사단장급 지휘관으로서 정규전에서 소총 중대급 이상의 부대를 실전에서 지휘해본 경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총참모장인 채병덕부터 병기병과 출신으로 작전지휘에는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따라 붙었다. 남한에서는 말로 하는 정치 지도자는 많았으나, 몸으로 전쟁을 감당할 군사지도자는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교육훈련도 차이가 심했다. 국군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교육훈련을 담당하던 주한 미군은 1949년 철수하면서 마지막으로 한국군에게 대대작전 시범훈련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인민군의 교육훈련은 다양했고 나름 체계적이었다. 북한군은 사단 단위의 야외 기동훈련을 마치고, 각 부대별로 남한의 목표 지역에 대한 지형 분석과 도상 연습까지 실시했다.
국군은 1950년 6월 15일에 가서야 수도경비사와 7사단과 8사단의 일부만이 대대훈련을 완료했고, 대개의 경우 중대급 훈련에 그쳤다. 심지어는 소대급 훈련도 안 된 부대도 있었다. 국군은 장갑차 운전병, 통신병 등 특과병 교육과정을 설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병 기초교육을 이수한 특과병들을 실무현장에서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948년부터 1년 동안 걸쳐 1만여 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소련의 극동군사학교에 파견하여 전차, 항공, 통신교육을 받게 했다.
병력뿐 아니라 부대의 배치에서도 남한은 불리했다. 국군은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만이 38선에 배치됐고, 나머지 4개 사단은 후방에서 반정부 게릴라를 상대해야 했다.
무기 역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국군의 장갑차는 총 27대였다. 이에 대응하는 인민군의 무기는 T-34 전차 242대, SU-76 자주포 168대, 장갑차 59대, 모터사이클 500대 정도다. 소련이 잉여 군수물자를 북한에게 적극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남한에게 무기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
이 정도가 링에 올라가기 전에 계체량에 나선 두 선수의 간략한 비교다. 북한이 미들급이라면 남한은 미들급보다 네댓 급은 떨어지는 플라이급 정도랄까. 경기를 해봐야 미들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일방적으로 두드리다가 1라운드도 끝나기 전에 KO패 또는 몰수패로 끝날 형국이었다.
실제 한국전쟁 초기의 양상이 그랬다. 38선에서부터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적지 않은 부대는 대오가 흩어져 말로는 작전상 후퇴이지만 패잔병과 다를 바 없이 지리멸렬하기까지 했다. 다만 미국이란 헤비급 선수가 서둘러 개입하여 완전한 패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이유
▲ 말고개 옛길의 38선 표지 ⓒ 윤태옥
선수의 승패는 곧 구단의 성패다. 선수인 국군이 패퇴를 거듭하자 국가의 존망은 휘청거렸고 백성들은 전후방 어디든 커다란 고통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음미할 것의 하나는, 선수의 체급 문제는 선수가 아니라 구단과 구단주의 문제란 것이다. 미들급 선수와 맞붙는데 플라이급 선수를 내밀 수밖에 없는 구단이라니.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1920~2002)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군지휘부에 통비(通匪)분자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기습남침 직전의 모든 상황은 그나마 갖고 있는 국군의 방어력을 스스로 가장 낮은 수준까지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1950년 4월말 총참모장으로 다시 부임한 채병덕은 전방부대와 후방부대를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작전지역에 익숙해진 부대를 뒤로 빼고 낯선 부대를 투입했으니 북한의 기습공격을 알아서 도운 꼴이 됐다. 지휘관도 전부 교체하고 육군 지휘부도 새로 구성했다. 정보국장과 군수국장을 제외한 모든 참모와 사단장들이 바뀐 것이다.
이와 함께 6월 24일 비상령도 해제됐다. 토요일 아침에 비상령이 해제되자 자연스레 병력의 반 정도에게는 휴가·외출·외박이 주어졌다. 농번기인데다가 가뭄 끝에 비가 오자 농사일을 거들려고 귀가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맞춰 적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바친 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하나하나는 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러나 지휘관이 해야 할 종합적인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38선의 일선부대는 북한의 남침 징후를 계속 보고했는데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 내지 무시했거나, 대단히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적이 기습을 한다고 해도 그에 대비하고 있으면 기습의 효과가 반감할뿐더러 역습의 기회까지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남한의 정부와 국군 수뇌부는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6월 24일 저녁 용산의 장교클럽에서 전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남침 징후가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는데 겨우 육군 장교클럽 오픈기념이란 이유로 댄스파티 술자리를 열었다니. 이것은 몇몇 장교들의 사적인 모임이 아니라 국방장관 신성모가 호스트가 되어 전방의 사단장들과 주요 간부들을 전부 호출한 자리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술자리가 길어져 2차까지 하고는 새벽 2시에 귀가했다. 그는 새벽 5시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육군본부 상황실 근무자의 보고를 받고서 전군에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비상시국의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화연락도 되질 않았다.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영국 경험이 있는 신성모는 자신의 휴무에 충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긴급한 전화였으나 일요일 새벽이라서 그랬을까,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채병덕이 신성모의 비서와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달려간 것이 오전 7시 정도.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있는데 전화연락도 되지 않는 국방장관이라니.
대통령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이날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은 오전 10시쯤에야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인민군은 38선 후방에서 38선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접근하여 개전포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한의 국방장관은 전방의 주요 사단장들을 전부 불러 댄스파티를 벌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에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것이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허언 일삼은 권력 엘리트들
▲ 모진교가 수몰된 지점 ⓒ 윤태옥
전쟁은 양쪽의 총사령관이 일대 일로 링 위에서 싸우거나, 양쪽의 사단장들이 미식축구를 하듯이 스크럼을 짜고 일렬로 맞붙는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의 6월 25일 새벽, 숙취에 젖어 있다가 부대도 아닌 서울의 집에서 비상령을 전달받은 국군 사단장들과, 두 눈을 부라리고 일격에 적을 제압하려고 기습공격을 감행해온 인민군 사단장들의 표정을 비교해서 상상해보라.
플라이급밖에 되지 않는 국군이 링에 끌려 올라가 피투성이가 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쓰러지게 한 이승만이, 신성모가, 채병덕이, 그들로 대표되는 당시의 권력 엘리트들이 부끄럽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안전하게 지킬 모든 방책을 사전사후에 강구해내야 했다. 선제공격을 하든, 미국이나 중국 소련을 상대로 외교적 술수를 쓰든, 김일성을 구워삶든, 무슨 수단을 쓰든 그는 그것을 해내야 하는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는가. 어떤 방법이든 북진 이전에 남침을 막아낼 병력과 무기를 끌어다 군에 공급해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1925년 탄핵당한 것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1960년 또 다시 국민들의 피를 보고서야 하야한 것보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도 북한의 무모한 남침을 막아낼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그래서 수많은 장병들이 죽었고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극악한 고통에 빠진 것이, 나는 더 부끄럽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어처구니없는 허언으로 요약되는 무능한 국방장관 신성모가 부끄럽다. 총참모장으로서의 책임은커녕 급박한 상황에 후들대면서 성급하게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국군 3개 사단을 적 앞에 고립시키고 수많은 서울시민을 적군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게 한 채병덕이 부끄럽다.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란 사실보다 더 부끄럽다.
술 파티 참석 거부... 부대 지킨 단 한사람
그런데 그날, 남침 징후가 있다고 보고를 했을 뿐더러 장교클럽 파티에 참석하라는 호출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킨 사단장이 딱 한 사람 있었다. 춘천의 6사단장 김종오(대령)였다. 다른 사단들이 기습공격에 무너지고 뚫릴 때, 6사단만은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진공하려는 인민군 2군단을 3일 동안 완강하게 저지했다.
이승만이 공급한 병력과 무기는 빈약했으나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냈고 거꾸로 인민군에게 상당한 피해까지 안겨줬다.
이로 인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한강도하를 3일이나 지연하게끔 만들었다. 6월 25일 운명의 그날에 인민군에게 뚫리지 않은 유일한 전선이 바로 춘천이었고 그래서 나는 모진교부터 찾아온 것이다. 이제 모진교에서 춘천시내의 치열한 전장으로 갈 차례다.
6사단이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의 현장이다.
▲ 말고개 옛길의 38선 표지 ⓒ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