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소부酬張少府 장구령張九齡에게 보내다 / 왕유王維(당唐699-761)
만년유호정晩年惟好靜 나이 들어 그저 조용한 것만 좋아해
만사불관심萬事不關心 모든 일에 관심이 없다
자고무장책自顧無長策 스스로 돌아본들 별 방책이 없는지라
공지반구림空知返舊林 헛되이 옛 숲으로 되돌아 갈 것을 알뿐
송풍취해대松風吹解帶 솔바람은 풀어헤친 띠에 불고
산월조탄금山月照彈琴 산에 오른 달은 거문고 타는 모습 비춘다
군문궁통리君問窮通理 그대는 궁통의 이치를 물으시는가
어가입포심漁歌入浦深 어부 노래 포구에 깊이 든다
수酬 ; 갚다,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내다
장책長策 ; 원대한 계책, 양책良策
반返 ; 돌아오다, 되돌아오다, 돌려주다, 바꾸다
궁통窮通 ; 성질이 침착하여 생각을 깊이 함. 궁달窮達,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어가漁歌 ; 당唐나라 때 은사隱士인 장지화張志和의 어부사漁父詞나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淸兮어든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이오, 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어든 가이탁오족可以濯吾足이로다 /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하는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부사漁父詞 / 장지화張志和
서새산전백로비西塞山前白鷺飛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도화유수궐어비桃花流水鱖魚肥 복사꽃 흐르는 물에는 쏘가리 살쪘구나
청약립靑箬笠 파란 삿갓
녹사의綠簑衣 푸른 도롱이
사풍세우불수귀斜風細雨不須歸 바람에 흩날리는 보슬비에도 돌아 갈 줄 모른다
장구령張九齡(673~740) 중국 당나라의 정치가ㆍ시인. 자는 자수子壽. 현종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진자앙을 이어서 당시唐詩의 부흥에 힘썼다. 작품에 <감우感遇> 12수, 문집 ≪곡강집曲江集≫이 있다. 소부少府는 현위縣尉 즉 고을의 관리.
왕유王維(당唐699-761)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산동성山東省 임평현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동남의 현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 지은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 위응물韋應物 ·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