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어제
포항교사불자회와 죽림사가 함께 주관하는 중고생을 위한 문화재교실 현장 답사 프로그램으로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답사코스는 굴불사지-백율사-분황사-황룡사지이었습니다.
답사 후 <<삼국유사>>를 뒤적이며 못다한 서비스를 홈에 올려 이렇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디카로 잡은 사진들과 함께요.
쓰다보니 자료, 설명, 감상이 뒤섞인 긴 글이 되고 말았네요.
***굴불사지-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는데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보게 하니 4방불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탑상>편에 전하고 있다.
부처님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이지만,
대승불교의 부처님관에 따라 부처님은
시간적으로 과거(연등불, 가섭불 등 과거의 7불), 현재(석가모니부처님), 미래(미륵보살)에 계시고,
공간적으로 동서남북 4방과 그 사이 4유(동북, 동남, 서북, 서남)와 상, 하 모두 10방(시방)에 두루 존재한다고 함.
오늘 답사에서 서방정토 아미타삼존불과 동방정토 약사여래, 남북의 두 보살상과 북방의 두 불상을 볼 수가 있었는데, 특히 서방정토 아미타삼존불은 뛰어난 예술솜씨를 전하고 있어 신라인의 불심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백율사-
박이차돈이 귀WHR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신라국가에 불교가 공인되지 않아 왕권으로 순교하며 신라왕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그의 사후 그 부인이 그의 명복을 위해 금강산에 절을 지었는데(<<삼국유사>> <흥법>편), 그것이 자추사로 백율사의 전신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실에는 박이차돈의 순교비가 현전한다.
***백율사 산 고개를 넘어가면 아미타삼존불이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경주 남산 삼릉골 선각6존불에 나오는 아미타래영도(극락세계로 중생을 맞아들이는 삼존불)과 매우 닮아있다. 바위 윗면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의 흔적이 완연하였다. 이번 문화재교실이 아니고서는 와보지 못하는 곳이었다.
*5세기 눌지왕 때
조령-문경-상주-선산(신라최초의 절로 전해지는 도리사)을 잇는 낙동강 서쪽 길과
죽령-봉화(북지지 석조반가사유상)-안동(신세동 전탑)-의성(탑리)-군위(삼존불)-영천을 잇는 낙동강 동쪽 길을 따라
고구려에서 신라 금성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합니다(다무라엔쵸, 김희경옮김, <<한국과의 만남>>, 민족사, 1995).
527년 법흥왕때에야 비로서 불교가 귀족중심의 신라국가사회에 수용되고, 불교를 통하여 비로서 왕권은 귀족권을 뛰어넘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울주 천전리바위그림에 새겨진 글 가운데 이전
에 볼 수 없는 '태왕'이라는( 법흥'태왕') 표기 방식에서 확인된다.
불교수용 이전에는 포항 신광 냉수리신라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왕이라고 하여 왕도 6부의 부장 중의 한사람으로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 왕이었다. 이 때 6부의 부장들도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 단계의 신라국가를 부체제단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삼국유사>> <탑과 불상>편 '백율사'조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692년 효소왕 때 화랑 부례랑이 무리를 1,000명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으로 수련차 갔다가 오랑캐에게 납치되었는데, 무리 중 안상만이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 신라의 국보로 궁궐의 천존고에 전하여 오는 '만파식적'과 가야금이 사라지고 없어졌지요. 이 두 보배를 찾는 이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고 임금님의 명이 내린 것은 물론이고요.
부례화랑의 부모님은 백률사의 관세음보살님께 몇 날이고 자식의 무사 귀환만을 위하여 빌고 또 빌었겠지요. 과연 며칠 뒤에 그렇게 애타게 기다린던 아들이 관세음보살님 뒤에서 홀연히 나타나 부모를 놀라게 하였지요.
자초지종을 말하길, 납치되어 가서 목동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양 손에 가야금과 젓대(만파식적)를 들고 와서 고향으로 가자고 하였는데, 바닷가로 걸어오다가 안상을 만났지요. 그 젓대를 두 쪽내어 부례랑과 안상에게 각기 한쪽씩에 타게 하고, 자신은 가야금을 타고 잠시 날아오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지요. 이야기에서 스님은 중생의 온갖 고통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구원하여 준다는 관세음보살님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지요?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가야금과 젓대를 들고 온 부례화랑을 맞이하고 엄청난 상을 두 사람에게 내렸음은 물론이고요. 부례랑의 아버지 대현 아찬을 태대각간으로, 어머니 용보부인을 사량부의 경정궁주로 삼았지요. 그리고 혜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가야금과 젓대에 벼슬을 내리지 않앗아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 후부터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이 영험스런 관세음보살님은 전단나무로 만들어진 아주 거룩한 자태를 하고 있는 부처님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조선초기에 백율사의 전단나무로 된 관세음보살님이 태조 이성계의 왕릉을 위한 절 개경사?로 유출되더군요. 지금 개경사는 폐사되고 중생의 괴로움을 구원하여 주신 이 아름답고 영험스런 관음보살님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제가 며칠전 경주문화엑스포의 세계벼룩시장인도 가게에서 전단나무로 조각한 불상을 보았는데, 전단나무는 예로부터 향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 최고급목재로 고대로부터 무역품으로 유명하답니다. 아프리카 세네갈 가게에는 전단나무 중 윤기나는 검은빛의 흑단조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제에게 식민지가 된 시절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짓밟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경주부청(시청)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는데, 그곳으로 청동약사여래입상을 유출시켰지요. 그리고 현재의 새 박물관 미술실 2층에서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지도 못하시고 외롭게 잘 보존되고 있어요. 물론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그 당당한 기상, 훤칠한 미모가 신라시기 최고수준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하죠.
***분황사-신라시기의 큰절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건물들이 불타고 지금은 좀 초라한 유적만 전합니다. 고고학 발굴이 끝나고 빨리 예대로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벽돌탑모양의 석탑은 벽돌탑의 형태로 한국에서는 인도의 벽돌로 쌓은 스투파와 가장 유사하며 신라의 탑으로 만들어진 시기가 삼국시대이지요. 나중에 안동 등에 전하는 벽돌탑과 비교해보세요.
그 옆엔 신라시기의 우물이 전하는데, 이 우물과 얽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기이>편에 전하는데 여러분이 한 번 찾아 보세요.
우물 옆엔 약사여래를 모신 보광전이 있는데, 18세기 영조 때 지어진 건물이지요. <<삼국유사>>에는 755년 경덕왕 때 무게 30만 6, 700근의 청동약사여래를 본피부의 기술자 강고내말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에 한기리의 희명이란 여인의 아이가 다섯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지요. 하루는 어머니 희명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천안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바치며 빌었더니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답니다. 어머니의 비원이 서린 향가인 그 노래는 이러했어요.
무릎을 끓으며
두 손바닥을 모아 괴어서
천수관음 앞에
축원의 말씀을 올리노라
천 개 손으로 천개 눈에서
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도록
두 눈이 다 먼 내라
하나나마 주어 고칠레라
아아! 내게 끼쳐준다면
내놓아도 자비심 뿌리로 되오리
이런 일을 두고 <<삼국유사>>를 지은 13세기의 일연 스님은 이렇게 찬미하는 시를 지었답니다.
대나무말타고 파잎 피리 불며 놀던 아이
그만 하루 아침에 어여쁜 두 눈 잃을 줄이야
보살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이 없었던들
버들꽃 피는 봄 헛되이 보낼 것을.
저도 여러분들 몰래 가만히 약사여래부처님께 삼배로 절을 올렸습니다.
요즈음 두 아이를 키우는 제가 몸을 혹사시켜 요새 건강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와 이제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제 어릴적 감기로 열이 펄펄 끓을 때 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온 몸이 담금질하네, 불덩이야 불덩이!"
라고 하며 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고, 저 대신에 당신이 앓았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절을 하였지요.
오늘 보니 원효스님의 영정이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더군요.
탑 앞에는 고려시기 숙종 때 원효스님을 화쟁국사로 추존한 화쟁국사비좌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는데,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친필로 새겨 놓은 '차화쟁국사비지 김정희 근서'라는 추사체 글씨를 볼 수도 있었지요.
문종의 4번째 왕자로 송나라에까지 유학갔다오기도 하며 <<속장경>>을 간행하며 엄청난 공부를 하고, 해동 천태종을 열었던 의천스님이 가장 존경한, 세계역사에 길이 빛날 대스승 원효스님이 오래 머물렀던 가람이지요.
원효스님의 비조각을 동국대의 문명대교수가 찾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원효스님이 불교의 여러 책들을 쓰시다가 의문이 나면 스승 혜공스님을 찾아 포항 오어사로 온 이야기도 <<삼국유사>>에 전하지요. 하옇튼 원효스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온 세계에 정말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원효스님을 나중에 여러분이 한번 공부하여 보세요.
*황룡사-인도 마우리아제국의 아소카왕이 보낸 모델과 구리를 가지고 553년 진흥왕 때 시작한 장육존상이 모셔진 2층 금당의 1.8미터 망새(치미)와 자장스님이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선덕여왕 때 지어진 높이 80미터의 세계최고의 9층목탑이 1238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타버렸답니다(<<삼국유사>>를 보세요).
지금 경주박물관 미술실 2층에 황룡사의 모형과 목탑 속에서 나온 사리함과 당시의 내력을 기록한 금동판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지요. 황룡사의 종은 현재 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의 4배 크기였다니 짐작이 가시죠.
황룡사의 기록엔 초대 주지 환희스님, 2대가 국통이었던 자장스님, 3대 혜훈,4대가 상률스님이었다고 하네요.
수, 당에 유학갔던 일본인 승려 에온이나 소빈 등은 모두 경주에 머물면서 원광, 원효, 자장, 의상 등이 활약하던 황룡사와 분황사 등을 참배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다무라엔쵸, 김희경 옮김, <<한국과의 만남>>, 민족사, 1995.)고 합니다.
<<삼국유사>> <감통>편엔 황룡사의 정수스님이 겨울 눈이 깊이 쌓인 날 해저물녘에 삼랑사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천엄사 대문 밖을 지나는데, 한 거지 여인이 아이를 낳고는 추위에 얼어누워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쓰러져 있었답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들어 안고 한동안 있으니 이윽고 여인이 깨어 났습니다. 즉시 옷을 홀랑 벗어 그를 덮어주고 알몸으로 자지 절로 달려가 짚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더니 밤중에 대궐 뜰의 하늘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황룡사의 스님 정수를 마땅히 왕사로 봉하라!"고 하였지요.
임금님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고 그를 대궐로 맞아들여 국사로 임명하였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슬프고 눈물겨운 이야기입니까! 재미있다고요? 물론 재미도 있네요. 희극과 비극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니까요!
황룡사 2층 금당에 그려진 솔거의 그림은 흔적도 없더군요.
아쉽긴 하여도 얼마전에 일본 호류사의 2층 금당에 그렸던 고구려 담징스님이 그린 저 위대한 관음보살님의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기도 하였답니다.
아뭏튼 <<삼국유사>> 읽어보지 않고서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하지 마시길!
다음 제5차 문화재교실은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갈 예정인데,
여러분의 많은 참석바랍니다.
박기백 선생님의 명강의를 잘 경청하시고, 의문점은 질문도 하시고, 답사 다녀와서 <<삼국유사>>나 출판사 대원사의<빛깔있는책> 시리즈, 혹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1,2,3 따위를 보시면 공부가 아주 많이 될 겁니다. 설명 중에 잡담이나 딴전 피우기는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또 문화재교실, 불교배우기를 위한 학생회가 만들어지면
저가 인도, 일본의 불교와 문화유산들을 대형스크린이 있는 교실에서 슬라이드로 여러분들을 다리고 함께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해외로도 배낭여행하면서 여러분이 지금 쌓은 공부를 더욱 넓고 깊게 하세요. 그리고 훌륭한 책도 펴내고요.
첫댓글어제 가족과 함께 찜질방, 해수탕을 오가며 논 이 사람. 부처님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며칠 전에도 다니는 절의 스님께 포교사 공부만 하고 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야단 맞았습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자신이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첫댓글 어제 가족과 함께 찜질방, 해수탕을 오가며 논 이 사람. 부처님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며칠 전에도 다니는 절의 스님께 포교사 공부만 하고 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야단 맞았습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자신이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청담스님도 토끼띠이시지만, 본래 새벽기운을 듬뿍받고 태어난 토끼띠사람들은 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제 생각엔 선생님은 이미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이시네요. 소소히 나리는 비에 가을이 익어가네요.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