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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고요한 나라 한국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선암마을과 청령포와 같이 마을의 3 면이 물로 둘러 쌓여 있는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천이 합수되어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아 마치 섬처럼 육지속의 섬마을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강변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마을의 중앙에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만운고택이 있다. 민속자료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집이며, 이집을 지은 만운 김휘걸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바로 시인 조지훈의 처갓집이다. 조지훈은 시 '별리'를 통해 이곳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무섬마을에서 묘한 매력에 빠져드는 곳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만든 외나무다리이다. 큰 비에 휩쓸려 가면 다시 세워야 할 만큼 삼면이 강물이고, 뒤편 산길은 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350여년간 무섬 마을과 강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이다. 1979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 역활을 한 외나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50m에 이르고, 폭은 30cm에 불과한 다리 이다.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채 건너야 한다. 외나무 다리는 해마다 새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장마철이면 불어난 강물에 다리가 떠내려 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겨우 한사람이 통과할 만큼 좁은 다리를 통해 마을로 시집오는 행렬과 마을을 떠나는 장례행렬 지나갈 만큼 주민들의 애환을 함께 한 무섬마을 유일한 외나무다리는 현대화에 맞물려 외나무 다리 대신 튼튼한 시멘트 다리인 수도교가 생겨났다.1979년 무섬마을로 들어서는 교통혁신이 일어났다. 낙동강 위로 ‘수도교’가 놓이면서 버스가 마을로 들어왔다. 버스가 마을 사람을 옮겨주기 전에는 외부로 나가는 가장 유일한 통로가 낙동강을 건너는 폭 30cm, 길이 150m 외나무 다리였고 수도교가 생겨나면서 다리는 자연스럽게 보강하지 않아 불어난 강물에 사라졌다.
수도교의 건설로 사라졌던 외나무 다리는 최근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를 만들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 원래 외나무 다리는 3개가 만들어 졌었다고 한다.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장보러 가는 다리, 학동들이 학교 가는 다리. 지금은 농사지으로 가는 다리 하나만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외나무다리가 없는 여름에는 바지를 홀딱 벗은 후 머리에 이고 건넜지. 강둑을 높이기 전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강을 건너는 사람의 엉덩이만 봐도 누군지 다 알아. 젊은이들은 소 꼬랑지를 잡고 헤엄쳐서 건너기도 했어. 학교 가기 싫어 일부러 물에 빠지는 아이들도 많았지.”
섬계고택. 마을 중앙 반남박씨 종택 옆에 있는 큰 규모의 고택이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공부를 많이 했다. 90세가 넘은 노인들 가운데에도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있다하니 학구열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관직보다는 학계에 많다고 한다. 50 여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현직 대학교수가 16명이라고 한다.
생동감 넘치는 한국
우리나라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다. 원래 이름은 흥인문이었는데, 여러 이유로 흥인지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성 안 북, 서, 남에 비해 이곳의 땅이 낮기 때문에 그 기운을 올려주기 위해 ‘지(之)’를 더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지대가 낮았던 것인데, 이 외에도 흥인지문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종로5가와 청계천5가 사이 한 블록에 지금 동대문시장의 모체라 할 광장시장이 있다. 1905년 7월5일 대한제국 한성부 개설허가를 받
아 탄생한 국내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다. 설립당시 명칭은 「광장 주식회사」.92년전 「거금」 10만원을 출연한 설립자는 4명이었다. 고종황제 비서실장격인 김종한, 국내성 대신 이봉래, 설립자 박승직, 거상 홍충현이다.
1950년대 동대문시장
1만여평에 이르는 미나리밭에 뚝섬서 퍼온 모래흙을 덮어 터를 닦고 건물을 세웠다.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 해서 시장이름이 광장이 됐다. 목조건물이 6.25때 모두 불타버려 54년 지금의 콘크리트 건물이 섰다. 58년 대화재로 2천여 노점이 불타버린 뒤, 61년 바로 그자리에 들어선 것이 평화시장이다. 이때부터 구호물자가 끊기고 나일론같은 화학섬유가 생산되자, 건물 2,3층에 공장을 차리고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곳은 섬유수출산업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고, 이에 힘입어 신평화, 동평화, 청평화 등을 탄생시켰다.
광장시장을 모태로 삼아 동대문시장이 지금 상권을 갖추게 되기까지는 6.25때 월남한 이북 사람들 영향이 컸다. 돈도 땅도 없어 광장시장에 가게를 가질 수 없었던 실향민들은 전란중 청계천변에 노점을 차렸다. 구호물자, 미군복, 담요를 이리저리 오리고 붙여 만든 옷을 팔았다. 당시 일대에서 장사하는 사람중 60%가량이 실향민들이었다.
지금처럼 패션 중심지가 되기까지 동대문시장은 꽤나 많은, 또한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1970년대 재단사와 숙련된 미싱사만이 ‘가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았고(3만원에서 15만3천원), 대부분의 미싱사(7천원에서 25천원), 재단보조(3천원에서 15천원), 시다의 임금은 1800원에서 3000원)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시다 임금은 ‘1인당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칠 만큼 인색했다. 4인 기준으로 1973년 도시지역 최저생계비는 20,617원이다. 최저생계비를 100으로 보았을 때, 재단사 임금은 146%에서 742%이며, 재단보조는 15%에서 73%, 미싱사는 34%에서 121%, 시다는 9%에서 15%이다. 최저생계비는 식비를 중심으로 계산된 것으로, 말 그대로 생존임금 수준이다. 재단사만이 겨우 4인 가족의 생계비를 벌 수 있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이후 결성된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를 거쳐 1975부터 1981년 강제해산 이전까지 일요일 휴일제 획득, 다락철거, 시다임금 사용주 지불 및 임금인상, 퇴직금 지급 등을 이슈로 활동했다.
1960년대 평화시장의 모습. 주변풍경을 제외하면 외관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이때쯤 나는 이길을 걸어 서울운동장을 끼고 돌아 학교를 다녔다 차가 다니던 길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청개천의 물이 눈으로 보이게 흘러갔었다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서 말없이 일했던 사람들. 누가 이들을 알아주었을까?
100여 년의 역사 동안 광장시장의 판매상품 은 여러 변화를 겪었어요. 초기의 광장시장에서 인기 있던 거래품목은 농산물! 1920년대까지 총 거래액의 80% 이상이 미곡상, 과일상 등이 차지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의 군수품, 외제품 등이 활발히 거래되다가 60~70년대에는 서울 산업의 중심이었던 직물, 의류 전문시장으로 전성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체기가 있었으나 현재 광장시장은 제 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바로 먹거리 시장으로써의 유명세 덕분이죠.
1905년 문을 열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울 시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대한민국을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이색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는 광장시장! 사람들을 사로잡은 광장시장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녹두빈대떡이 수북해도 내가 먹을 것은 이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
뉴욕 맨해튼의 1000만불짜리 야경, 수준 높은 공연이 하루종일 펼쳐지는 브로드웨이, 눈 닿는 곳마다 고급 옷과 가방이 즐비한 5번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화려한 일상을 보내는 뉴요커들이 100년 전통 한국 재래시장에 뜰 예정이다. 한국관광공사는 10일 오후 미국 뉴욕에서 20여명의 단체 관광객들이 광장시장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광장시장과 자매결연협약체결 이후 적극적인 해외홍보를 통한 첫 단체 관광객 모객이다. 관광공사는 올 해 초부터 자체 답사와 함께 해외 관광 전문가들을 초청해 시장을 소개했다. 공사 측은 “‘촌스러워서 좋다’는 반응이 많았다”며 “종종 자유 여행객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상품화를 결정했다” 고 밝혔다. 2012년
세계속의 한국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2016년 방한 무슬림 관광실태조사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을 찾은 무슬림 관광객이 전년의 77만명에서 33% 증가한 98만명으로 집계됐다. 곧 무슬림 관광객 100만명 시대가 열린다. 무슬림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도 상당 부분 한류 덕이다. 한국 드라마로 촉발된 뒤 K-Pop이 견인하면서 한류 열풍이 상당하다. 그 열풍의 근원지를 찾아 한국을 찾는 무슬림 관광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무슬림 관광객 증가율 33%가 지난 해 외래 관광객 증가율 30.5%를 상회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지난해 한국을 찾은 무슬림 총 관광객 중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약 74만 명, UAE 등 중동 지역에서 약 16만 명, 기타 구미주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 약 8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동남아시아 지역이 가장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한류커뮤니티 한사모(Hansamo)의 한국문화체험행사
난민이 유럽을 둘로 쪼개다 "모두 수용" 獨 메르켈 발언에 헝가리 자국난민 독일로 `퉁` EU 이민처리협약 유명무실화.
그러나 2018년 6월에 헝가리는 난민을 돕는 개인과 단체에 징역 1년 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반 난민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마르타 파르다비/헝가리 의회 공동의장 : 망명신청자들 돕는 개인이나 인권옹호 단체들은 처벌받게 됩니다.]
난민의 어머니 메르켈 독일 총리의 결정으로 유럽행 난민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기왕에 죽을 바엔 앉아서 죽음을 맞기 보다는 유럽의 불법 난민선이라도 타고 탈출을 시도해 볼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갈등하던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대문을 활짝 열고 난민들을 무조건 받겠다고 했을 때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유럽행을 결정하고 유럽으로 몰려들었다. 시리아 난민들 뿐 아니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모로코 리비아 ...등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진군했다. 마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2015년 9월 5일 헝가리를 거쳐 뮌헨역에 첫 난민 열차가 도착하자 독일 사람들은 “난민 여러분 독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걸어 놓고 자원봉사사자들이 준비해 놓은 따뜻한 음료와 옷과 과자, 아이들을 위한 인형 등의 선물들을 나누며 환영했고 난민들은 눈물을 쏟으며 감사했다. 이날 하루만에 8천 여명의 난민이 독일 땅을 밟았으며 독일 정부는 예상 유입 인원을 80만명 정도로 보았으나 그 숫자는 점점 불어나 100만 명에 육박하여 독일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EU(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이 나눠서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무슬림들의 숫자가 급증하는 것을 반기지 않아 이를 거부하면서 43년 동안 유지해 왔던 EU 회원국 자격을 반납하고 EU를 탈퇴했으며 이를 브렉시트라 한다.
우려했던 대로 이들은 평화스럽던 유럽에서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하는 테러들의 대부분이 이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급증하는 유럽 여인들에 대한 집단 강간 사건과 살인 절도 및 끊임없이 발생하는 테러 등으로 유럽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이슬람의 최종 목적은 세계를 이슬람율법인 샤리아로 통치하는 것이다. 샤리아는 인간의 생명이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고장난 부품은 언제든지 빼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새 부품으로 교체하는 것처럼, 사람도 이슬람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교리다. 우리가 보기에는 잔인한 테러이지만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의 관점으로 보면 거대한 이슬람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샤리아로 통치를 하면 언론, 집회의 자유도 없고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든지 형법이라는 것이 있고 그 법을 범한 자들은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 그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필요한 것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경을 건너는 난민 행렬 (사진=Jeff J Mitchell/Getty Images)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줄을 지어 가는 난민들. 이 가운데 아이들과 노인들은 어찌 살아가야 할지 ~~~
2017년 독일의 상황
인기 추락한 안젤라 메르켈
유럽에서 무슬림들 때문에 사회혼란과 국가 안보의 위협 때문에 난민들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는 안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로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벌어졌던 무슬림들의 테러는 결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까지 평화롭게 두지 않았다. 독일이 난민을 무조건 받아주기로 결정한지 꼭 1년만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슬림들의 테러 덕분에 메르켈 총리의 텃밭인 독일 북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州)에서 실시한 주의회 선거에서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교민주당은 19%의 지지율로 제 3당으로 전락하고 참패하면서 개인적으로도 70%를 넘던 그녀의 지지도는 40%선까지 급락하여 4선이 불투명해 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난민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난민 추방
프랑스 파리의 바타클랑 극장 등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132명을 사살한 파리테러 등 유럽의 급증하는 난민들에 의한 테러 때문에 이들에 대한 불만은 고조되었다. 독일인들의 불만은 베를린 테러에서 극에 달했다. 난민 출신의 테러범은 트럭을 납치하여 2016년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특별 마련된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시장에 몰려든 인파를 향해 19톤 트럭을 몰아 12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이는 2016년 7월 프랑스의 혁명 기념 축제를 위해서 니스 해변에서 불꽃놀이 축제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19톤 트럭을 몰아 86명을 사망케 한 테러와 방법이 일치한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난민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비난받지 않으면서 도울 수 있을까?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방향은 맞았으나 방법이 문제였다. 난민 수용에 필요한 자금을 터키에 지원하고 거기 정착시키는 방법도 실제로는 에로도안 총리의 이슬람 원리주의 쪽으로 기우는 것을 볼 때 돈만 제공하고 효과는 없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를 않는다. 우선 더 이상은 난민을 받는 것을 자제하면서 난민으로 수용되지 않은 사람들을 즉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6년 3월, EU는 터키와의 협정을 체결하고 시리아에서 오는 이주자들에 대한 수용 중단을 선언했다. 협상에 따라 터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그리스에서는, 모든 새로운 “부정한” 혹은 불법 이주자들을 터키로 송환할 수 있게 됐다. 그 대신, EU 회원국들은 터키 정부에 시리아 난민들의 터키에서의 재정착 비용과 재정적 원조를 늘릴 것을 약속했다. 이 협정에 따라 2017년 터키에서 그리스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수는 97 % 이하로 급감했다고 EU 이주 위원이 밝혔다.
귀국을 거부하는 난민 신청자들
난민 인정을 거부당한 무슬림들은 귀국을 원치 않는다. 불법체류라도 좋으니 유럽에 살겠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는 자국으로 유입된 난민 가운데 자격이 미달되어 수용이 거부된 이들의 송환을 받아달라며 이들 난민의 17개 출신 국가(알제리, 모로코, 에티오피아, 베닌, 부르키나파소, 가나, 기니, 기니비사우, 말리, 나이지리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소재 국가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레바논 등 아시아·중동 국가)에 편지를 보내 호소했다. 이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 독일 내 망명이 거부돼 송환돼야 할 난민 20만 명 가운데 송환이 성사된 이는 2만 914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국가는 이들의 여행 서류가 위조된 것이 많고 여권조차 없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자국인이라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경우 2014년 기준으로 망명이 거부된 580명 가운데 단지 2명만이 송환됐고, 전년도인 2013년에는 533명 중 3명만이 되돌아가는 데 그쳤다한다. 튀니지는 독일의 전체 망명 희망자 중 4.0%에 그치는 수준인데다 망명신청 수용 비율 역시 0.2%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민자 범죄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범죄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라디오코리아 2016.2.24)
"갑자기 아래층에서 총격이 들렸다. 쇼의 연출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세 명의 남자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커다란 총으로 무장한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총격을 멈추질 않았고, 피와 시체가 어디에나 있었다." 2015년 11월 파리테러
우리나라의 형편
우리나라는 난민 수용에 인색한 나라로 인식된다. 2015년 현재 세계 난민들의 숫자는 6천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이들 중 우리나라는 94년부터 2015년 말까지 1만5천250명의 난민 신청자가 있었다. 이들 중 576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고 난민에 준하는 인도적 체류허가(G-1비자)를 받은 사람들이 910명이라고 한다.(프레시안2016.2.13.) 이는 난민 수용률이 3.77% 정도라는 의미다.
6월 25일 제주 지역지 제주의소리는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 3명이 체류허가지역제한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주지역 사상 초유의 무더기 난민신청 사태와 관련해 예멘인들이 제주지역 역 출도제한 조치를 풀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1993년 발효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 26조에 해당하는 이동의 자유도 제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26조에는 각 체약국은 합법적으로 난민에게 거주지를 선택할 권리
및 그 체약국의 영역 내 자유로운 이동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올해 예멘인들이 무사증 제도를 이용해서 제주에 들어온 이후 대다수가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들이 유출돼 불법 체류를 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지난 4월 제주 출도제한조치를 내렸다. 법무부는 더 많은 예멘인들이 제주에 유입되는 것 역시 막고자 지난 1일 제주 무사증 제도에 예멘을 제외했다.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올해 제주에 들어온 예멘인은 모두 561명이다. 이들 중 건장한 남성이 일부 몰려다니며 낯선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제주에서 알선한 일자리를 중도 포기하는 등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요즈음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무엇보다 먼저란 말인지 생각해 볼만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본다.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국제관계에서는 사람이 먼저라기보다 국민이 먼저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온 인류가 연합하여 동거하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