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영 섭
(동국대 불교학과)
1. 대왕의 호칭 사용
일연은 신라의 불교공인을 담고 있는 조목 이름을 ‘원종흥법(元宗興法) 염촉멸신(猒髑滅身)’이라고 붙였다. 여기서 원종은 법흥왕이고 염촉은 이차돈이다. 법흥왕은 즉위 당시 신라 고유 왕호인 매금(寐錦)왕으로 불렸다. 영일의 냉수리비(冷水里碑, 503)과 울진의 봉평비(鳳坪碑, 524)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불교 공인이전까지 그는 왕으로서의 초월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신료들과 동렬에 머물러 있었다. 오랫동안 신라는 경주 지역을 분할 통치했던 육부족의 득세로 말미암아 왕권이 미미했다. 왕은 나라를 대표했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육부족장들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 어렵게 병부를 설치하고 공복을 제정한 뒤 율령을 반포한 법흥왕은 불교의 공인을 통하여 강력한 왕권의 확보를 모색하였다. 당시 육부족들은 지증왕대 이래의 축전(祝典) 성립과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보이는 살우(殺牛)의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교사상과 고유신앙에 기반해 있었다.
그런데 일연은 이 조목에서 염촉의 ‘멸신’(滅身)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정작 원종의 ‘사신’(捨身)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다. 법흥왕은 왕권을 공고히 하려는 일련의 개혁과정 아래 불교 공인을 시도했지만 육부족의 반대에 번번이 부딪쳐 그 의욕이 좌절되었다. 결국 그는 이차돈과의 밀약을 통해 불교의 공인을 성공시켰지만 불교의 교화에 대한 중신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법흥왕은 할 수 없이 특단의 조치로서 몸소 사신을 통해 출가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신들과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이루어진 법흥왕의 사신 행위는 조정과 재야를 막론하고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통치자의 사신 행위는 일찍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보니 조야에서는 그 일에 대한 기억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 없었다.
법흥왕은 염촉이 제안한 흥륜사의 창사 명령의 부인을 통해 정미년(527)에 불교를 공인했지만 왕의 사신(捨身)을 계기로 흥륜사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신라 불교 공인의 기원을 정미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신하들은 이차돈과의 밀약에 의해 불교 공인을 거부할 수 없었지만 왕의 신분을 유지한 채 삭발 염의한 법흥왕에 대한 비판의 의견들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법흥왕의 사신에 대해 최치원은 「봉암사지증국사비」에서 중국 양나라의 무제와 같이 “이미 신라에서도 (백성과) 함께 즐거워할[與民同樂] 뿌리를 심었다”며 신라불교사를 중국불교사와 대등하게 기술하고 있다. 법흥왕의 율령 반포 8년째가 되는 해인 을유년(535)에 흥륜사 중창 불사가 시작됨으로써 신라 불교의 홍법이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처형은 정미년 당시가 아니라 을유년 이전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원종흥법 염촉멸신’ 조목의 할주(割註)에 인용된 향전(鄕傳)에는 법흥왕의 칭호가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인(이차돈)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 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기에 (나는) 몸과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얽힌 인연들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두루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소서”라고 한 것에서처럼 불교 공인 이후 법흥왕은 ‘영즉지태왕’(另卽智太王, 川前里書石 乙未銘) 또는 ‘대성법왕’ 혹은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川前里書石 乙卯題記)으로 불리어졌다. 이제 법흥왕은 더 이상 신료들과 동렬에 있는 ‘매금왕’이 아니라 그들 위에서 초월적 지위를 확보한 ‘법흥대왕’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신라의 왕이 ‘대왕’이란 호칭으로 금석문 위에 처음 나타나는 갑인년(534)이 되면 법흥왕은 명실공히 신하 위에 군림하는 지위에 서게 된다. 이것은 이차돈의 처형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사신의 내력
불교에서의 ‘사신’(捨身)은 불교 수행의 한 형식으로서 자리해 왔다. 즉 사신은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붓다 혹은 진리를 위해 아끼지 않고 소신(燒身) 또는 분신(焚身) 혹은 자해(自害) 등의 방식으로 보시하는 것을 일컫는다. 대개 사신은 왕과 귀족에게서 이루어졌지만 일반인과 노비에게도 행해졌다. 궁내의 인척이나 반역으로 멸문한 후손들도 사예(寺隸)로 삼았다. 왕의 경우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한 뒤 세속의 신분과 업무를 저버리지 않은 채 승의(僧衣)를 입고 교단에 머물며 함께 수행을 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신라 왕실이 흠모했던 아쇼카왕과 관련 사적으로는 진흥왕대(573 또는 574) 또는 진평왕대에 조성되었다는 황룡사장육존상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아쇼카왕 관련 사적은 진(晋)대에서 남조와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아육왕사와 아육왕탑 등의 조성을 필두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또 중국 남조의 양나라 무제 역시 대통 원년(527)에 황궁 옆의 동태사(同泰寺, 현 남경 鷄鳴寺)에 가서 붓다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사신한 뒤 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 자신이 통치하는 전국 곳곳에 천불과 천탑을 세우며 사신을 거듭했다. 양무제는 자신을 ‘삼보의 노예’[三寶之奴]로 절에 바치고 신하들은 노예가 된 황제를 위해 수억만전(數億萬錢)을 절에 주어 죄를 대속[贖罪]하고 궁으로 돌아오게[還宮] 했다. 양무제는 짧게는 4일에서부터 17일, 37일, 43일간 네 차례나 동태사에 거둥하여 사신을 하고 교화를 하였다. 심지어는 정화조를 퍼기도 하고 불목의 일도 하였다고 전한다. 사신이 끝나면 돌아와 크게 사면을 베풀고[大赦] 연호를 고쳤다[改元]. 이 모두가 불교 수행과 신행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고기와 술을 엄격히 금지하는 단주육문(斷酒肉文)의 조칙도 내렸다. 이러한 일련의 불사는 신라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법흥왕의 사신이 이루어진 해 역시 양무제의 사신이 이루어진 해와 동일한 정미년이다. 최치원은 「봉암사지증국사비문」에서 양무제가 동태사로 나아가 사신을 하고 돌아온 날까지 기록하고 있다. 무제가 사신한 그날이 바로 법흥왕이 흥륜사에서 사신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최치원은 ‘같은 (해) 봄’[一春]에 양무제와 법흥왕이 사신했다는 사실을 통해 신라가 중국 남조불교와 접촉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호불황제인 양무제는 ‘단주육문’의 조칙을 반포하였고 호불대왕인 법흥왕은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있다. 일연은 「왕력」편의 법흥왕 조에서 “처음으로 십재일(十齋日)에 살생을 금하고 사람들이 비구승과 비구니승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적고 있다.
십재일은 재가 신도가 매월 1, 8, 14, 15, 18, 23, 24, 28, 29, 30일의 열흘 간 몸과 마음을 삼가고 말고 깨끗한 일에 힘쓰며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팔재계를 지키며 착한 일을 하면서 정진하는 날이다. 법흥왕은 이들 10일 동안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게 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출가를 허가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신라는 빠른 시일 내에 불교를 자기화 하고 주체화 할 수 있었다. 신라는 양무제 이래의 남조불교를 모범으로 삼기는 했지만 이내 신라 ‘본위’(本位)의 불교로 소화해 내어 신라불교로 자리매김 해냈다. 법흥왕의 사신은 결과적으로 왕비의 출가로 이어졌고, 나아가 진흥왕의 사신과 그 왕비의 출가로까지 이어졌다. 이들 두 왕의 내외의 사신과 출가는 결과적으로 후발주자로서 갖은 산통을 겪은 신라의 불교가 국가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던 고구려 불교와 백제 불교 및 가야불교와 대발해 불교와 달리 이땅의 자생적인 불교로 자리잡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흥륜사의 금당과 오당
법흥왕은 신라 최초의 절인 대왕사(흥륜사)에서 사신했고 그곳에 살면서 왕무를 보았다. 그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入寺爲僧] 스스로 불법을 펼치고 행했다[肇行佛法]. 비구 법공(法空)이 된 그는 출가자의 몸으로서 세속의 신분과 세간의 업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법공의 모습은 조정과 재야 모두에게 낯설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밀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중신들과 적지 않은 갈등도 생겨났다. 불교에 대한 군신들의 반발은 천경림 숲을 베고 대왕사(흥륜사)를 세운 이차돈을 처형함으로써 활로를 열어나갔다. 해서 이차돈의 멸신을 통해 법흥왕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을유년에 대왕사(흥륜사) 중창불사가 시작되었다. 울주 천전리서석의 ‘을사제기’(乙巳題記, 原銘)와 을미제기(乙未題記, 追銘) 뿐만 아니라 갑인제기와 을묘제기 등 불교관계의 단편적 명문에 의하면 흥륜사에는 안장(安藏)이라는 승려가 머무르며 법흥왕의 개인적 신불(信佛)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차돈의 순교로 중단되었던 흥륜사 조성공사는 을묘(535)년에 천경림을 베면서 본격적인 불사가 이루어졌다. 흥륜사는 정미년(527)에 흥륜사 공사를 처음 시작[始開]했으나 군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중단되었다. 그러자 법흥왕은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는’[入寺爲僧, 捨身] 특단의 조처를 통해 ‘불법을 펼치며 행했다[肇行佛法]. 이 표현은 그의 ‘조행’이 처음에는 왕 개인의 신불 행위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왕이 사신을 감행하자 군신들은 이것을 크게 문제삼았고 이차돈에게 흥륜사 창건의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이차돈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처형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차돈 순교는 흥륜사 중창의 물꼬를 텄다. 해서 을묘년에 흥륜사는 법흥왕 개인의 사찰에서 국가사찰로 크게 개창[大開]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왕과 귀족간의 타협으로 왕의 정무를 대행하는 상대등(上大等)을 둠으로써 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흥륜사에는 금당(金堂)과 오당(吳堂)이 특히 유명했다. 중국 남조의 범칭인 ‘오’(吳)를 딴 전각인 ‘오당’은 신라 중고기말 경에 김양도(金良圖)가 남조의 동태사를 본받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주」편의 ‘밀본최사’ 조목에 의하면 그는 불교를 돈독히 믿어 일생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다. 김양도는 흥륜사 오당의 주불인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소성하고 아울러 그 당에 금화를 가득 채웠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흥륜사의 창건과 법흥왕의 사신이 남조 불교를 모범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법흥왕 이전 미추왕과 눌지왕 대에 이미 불교가 민간에 널리 전해져 있었다는 사실과 양나라 사신 혹은 오나라 사신이 신라 왕실을 찾아와 불교를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또 흥륜사의 금당은 오당과 함께 절의 상징이었다. 금당의 십성은 의상(625~702)의 제자인 표훈이 자리해 있음을 통해 경덕왕대에 소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법」편의 ‘동경 흥륜사 금당 십성’조에는 주불이 등장하지 않지만 「신주」’편에 의하면 오당의 미륵존상과 달리 아미타불이 주존으로 모셔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에 붓다를 시위하는 열 명의 제자를 붓다의 10대 제자가 아니라 신라의 8성(출가) 2현(재가, 염촉, 사파)을 모셨다는 것은 대단한 주체성을 보여준다. 더욱이 동쪽 벽에서 서향(庚向)으로 앉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과 서쪽 벽에서 동향(甲向)으로 앉은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등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10성의 면면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배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10성 모두를 이땅 신라의 ‘흙’과 ‘물’과 ‘기술’로 빚은 소상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증폭된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그의 사신은 신라 불교의 진경을 열어가는 초석이 되었고 전륜성왕을 꿈꾸었던 진흥왕이 이를 이어가면서 민족불교의 르네상스를 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