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으로 투병하던 중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경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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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민중의 소리 |
서울대 상대 3학년 때인 1967년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갔고, 70년 복학한 뒤에는 교련반대 등 학내 시위를 주도, 71년에는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1979년까지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김근태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조작이 시작됐다.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폭력행위, 잠고문 등을 10여 차례나 당했다.
그 시간에 대해 김근태는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근태는 부인 인재근과 함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고, 부인 인재근이 김근태로부터 들은 고무의 실상을 녹음한 테잎을 미주 한국일보 기자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냄으로써 뉴욕타임즈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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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김근태 미니홍피 |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원칙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킬 줄 알며, 무엇보다 ‘진정성’을 인정받았던 김근태는 2009년 노무현 전 태통령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모두가 검찰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4월 28일 홀로 개인 성명을 발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손을 잡아줬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의 본질은 정치보복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권을 검찰에 돌려줬다. 그러나 현 검찰은 돌려받은 검찰권을 다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헌납했다. 검찰이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권력에 굴종한다면 그 최후는 철저한 국민의 외면일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열린우리당 시절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관련해서는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서기도 했다.
‘바보 정치인’이었지만 끊임없이 차기 대선 주자로 꼽혔던 사람,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치면서도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김근태 상임의장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지난 10월 18일, ‘2012년을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유훈처럼 남긴 글에는 이런 당부가 남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김근태 고문의 별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권미강 씨는 "밤새 서릿발 같은 바람 불더니 또 한 꽃잎 떨어졌네. 깜깜하게 사방을 짓누르던 어둠 속에서도 가지마다 매달린 꽃잎들 가슴과 가슴 맞대고 서로의 힘이 되었는데"하며 안타까와 하며 긴 추모사를 올렸다.
"저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항상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욕심 같은 바람은 '생각의 사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을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 시대에 과분한 사람이었습니다. 20년도 넘은 시절, 지하철에서 본 그분에게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급하게 시국관련 전단지를 돌리는 저에게 '수고하십니다' 한 마디 던져주시던 그 분. 흘끗 돌아보다 숨이 멈췄습니다. 마른 얼굴에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 얼마전 감방에서 출소한 김근태 선생님이셨습니다. 너무 반가워 환한 미소로 웃었습니다. 그 전에는 신문에서나 봤던 그 분이 저에게 인사를 건냈던 것입니다. 그 모습 아직도 선명한데, 오늘 새벽에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를 고문한 권력의 하수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목사가 되어 '고문기술은 예술이다'라고 설교하는데 그 분은 그를 역사적인 용서를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리 '죄는 용서 못해도 사람은 용서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분이 돌아가신 아침, 죄도 사람도 이 시대의 권력사냥꾼들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김근태선생님의 마지막 남기신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되새기며 다시는 이기적이고 매국적이고 국민들 이간질 시키는 수구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없도록 진보세력이 결집하는데 하나의 작은 조각이 되겠습니다.
백종옥 씨는 "아침의 미명이 조금씩 느껴지는 시각.. 페이스북에서 김근태 선생님의 영면 소식을 읽고 몸을 돌려 누우려는 찰라 갑자기 이근안의 그 퉁퉁한 모습이 눈앞에 분명해졌다. 용서의 'ㅇ' 조차 아까운.. 허나 몇 시간 지난 지금 과연 진정 살아있는 이가 누구고 죽어있는 이가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근안.. 그와 그를 만든 권력에 대한 용서.. 그건 그들의 몫이다. 김근태 선생님.. 이 세상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하고 전했다.
최선희 씨는 "늘 선배로 기억되는 분이 영면하셨습니다. 그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오픈활동은 극렬한 탄압을 받던시절 민주화쳥년연합회 사무실에서 처음 뵜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도 참 많은 억압과 탄압이 있었지만 언제나 의연하게 그러면서도 유우머도 풍부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여성운동진영에 오시면 늘 모든 여성동지들의 연인처럼 인사를 아끼지 않았던 분, 이 아침에 소천하셨단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인명은 재천이기에 하늘의 뜻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파괴된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셨으니 더 아파옵니다. 부디 하늘에서는 참 자유를 얻으소서"라고 올렸다.
마지막으로 김근태 민주통합당 고문의 별세를 추모하며 페이스북에 올라온 김광석의 노래 한곡을 덧붙인다.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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