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넘나든 나무 이야기-(4)―오색팔중산춘 동백 (A)
- 오색팔중산춘동백(五色 八重 散椿 冬栢) -
이미자씨의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십니까? -그리움에 지처서 울다가 지처서--, 아니면 세시봉 친구들(서유석)이 부른 <선운사>란 노래를 아시냐요? --눈물처럼 뚜우욱 뚜욱 지는 꽃 말이 예요,
시의 세계에도 들어가 봅니다. 우선 너무나 널리 알려진 미당 서정주 선생의 <동백꽃 보려갔더니>-- 막걸리집 육자배기가--, 혹은 김용택의 <선운사 동백꽃>은 읽어 보신 적 있나요?―-그까짓 것 사랑 때문에 /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 감추다가 / 동백꽃 불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 엉엉 울었다-- 는- , 연달아 생각나네요. 이재하 시인의 시에 곡을 올리고 요즘 조용남이란 카수가 리메이크해서 부른 <모란동백>이란 곡도 들은 적이 있나요? 이 노래 2절에 -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 데, --나를 잊지 말아요-- 하는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나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슬픈 일, 가슴 아픈 일 한 두 번 없을 가보냐? 그래서 이런 아린 사연을 원초적으로 간직한 꽃 동백이 우리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되고 수많은 시가 되고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지금 울산 시청 뜰에서 혹독한 겨울을 굳건히 잘 견디고 있는 아주 별다른 동백, 이름마저 기다란 <오색팔중산춘동백(五色八重散椿冬柏)꽃 나무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그 이름부터 풀어본다. 오색(五色)은 다섯 가지 색. 즉 청백적흑황의 오방색 이고. 팔중은 대계의 동백꽃의 꽃송이는 통꽃인데 이 동백꽃은 여덟 겹의 꽃잎파리가 모여 있다가, 산춘(散椿)의 산(散)은 꽃잎이 갈래꽃이여서 낙화할 때 살구꽃이나 벚꽃처럼 꽃잎 한 장 한 장이 따로 흩어지며 떨어지고, 춘(椿)은 동백나무를 뜻하는 한자이다. 같은 글자 춘椿이라도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국에서는 참중나무나 가중나무를 뜻하는 글자이다. 맨 뒤에 동백(冬栢)이란 말이 붙은 것은 역전앞이나 처갓집 같이 겹말에 해당되는 데. 그저 동백나무임을 강조하는 뜻으로 덧붙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동백의 이름은 “꽃색이 다섯 가지에다 꽃잎이 질 때 흩어지는 희귀한 동백나무”이란 뜻이다.
우리 인간사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이든지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 앞서 갈파한 바같이 그것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褪於日光則爲歷史, 染於月光則爲神話)라고 했지만 울산 시청 앞의 사연 있는 동백나무는 참으로 신화와 전설을 넘어 뒤늦게 햇빛, 달빛, 별빛까지 거슬려서 우리 앞에 힘겹게 큰 교훈을 주는 나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임란, 호란 때 우리의 국력부실로 수많은 아녀자들이 이국땅에 끌려가 갖은 수모와 유린당하고 곡절 끝에 고국에. 고향땅 가족에게 돌아 왔으나 그들에게 위로는커녕 천시당하는 슬픈 역사의 인물이 된 그분들을 우리는 환향녀(還鄕女)이라고 배웠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나무 중에도 바로 울산시청 앞뜰 동백꽃이 바로 환향녀 아닌 오랜 세월 뒤에 돌아온 바로 그 환향목(還鄕木 還鄕樹)이란 말이다.
때는 1597년, 임란 직후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처 올라가던 왜군이 평양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전세는 역전, 명과 왜는 화의라는 미명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다. 이 때 왜는 일단 주력부대를 일본 땅으로 철수 했다가 다시 풍신수길의 광란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밀어 넣어 경상도, 전라도 땅만이라도 자기 영토로 하겠다는 야망에 들뜬다. 이것을 우리는 정유재란 이라한다. 당시 왜의 주력부대는 두 갈래로 한 부대는 전라도 쪽 또 다른 일단은 경상도 쪽으로 밀고 올라오다가 전북 직산 땅에서 합류 했는데 이 직산전투에서 왜는 조명연합군에 의해 대패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물러서기로 하고 후퇴, 그러나 남쪽바다에서는 우리의 이순신 장군의 활략으로 이미 퇴로가 차단되고 보급로가 막히는 상황에 이른다. 왜군은 할 수없이 우리나라 남해안과 동해안 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에 돌입, 견고한 저들 방식의 석성을 구축하는 데 후대 사람들은 이 성을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울산왜성. 웅천왜성 등등으로 불렸다. 그들이 성을 바닷가에 쌓는 실질적인 이유와 목적은 퇴각할 때 각 지역에서 수탈한 문화재의 일시보관. 노예로 팔 포로들 임시수용, 물길을 통한 연락과 보급품 조달 그리고 철수의 용이한 전략적 이점 때문이다.
바로 이때 울산 태화강과 바다 사이의 지형을 이용한 곳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부대가 왜성을 쌓는데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이 울산 왜성을 쌓는 중에 소서행장은 이제까지 본 일이 없는 동백꽃나무를 처음 만나게 된다. 소서행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 있었다. 일본에 있는 자기 주군 풍신수길(토요토미)이가 차(茶)를 마시며 꽃 감상하는 것을 아주 즐긴다는 생각. 하여 그는 풍신수길에게 조선 도공들과 같이, 유별나고 희귀한 동백나무를 일본으로 보낸다. 풍신수길은 이 나무의 꽃을 보고 아주 만족하고 즐거워했고 이 귀한 나무를 지장원(地藏院)란 절집에 내려서 잘 가꾸도록 지시했다. 일본으로 싹쓸이 해간 탓인지 그 후 울산지방에서는 단 한 그루도 그런 동백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한다. 일본으로 간 이 꽃나무의 아름다움과 명성이 널리 퍼지자 아예 절집이름을 <춘사(椿寺스바키데라)> 즉 <동백나무절>이라고 고처 부르게 된다. 그런데 세월을 이기는 자 없어 이 춘사의 조선에서 가져간 동백나무는 400연년의 시간 뒤인 1983년 밑동만 남 고사했다. 다행이도 절집사람들은 그보다 100여 년 전에 이 나무을 삽목으로 번식하여 2세 10그루를 잘 키웠는데 이 또한 꽃이 피면 절 주위가 실로 장관이어서 절집을 더 유명하게 했다.
세월이 흐fms 한참 뒤 한일양국간의 교류가 생기고 이 꽃의 전설 신화 같은 소문이 현해탄을 넘나들게 되어 드디어 1990년을 전후하여,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 당시 울산예총지부장이던 최종두씨, 당시 부산여대 정남이 총장, 김덕남 교수 등 여러 뜻있는 사람의 외교적 노력과 정성으로 드디어 1992.5.27 이 동백 3세 나무 묘목 32그루가 고국 땅에 귀환하게 된다. 실로 420년만의 귀향이고 애환 서린 환향목이다. 조국에 돌아온 이 어린 동백은 같은 해 6.1 울산 시청 뜰에 심었고 잘 자라서 이 동백이 필 3월말부터 4월초에는 뜻있는 다인(茶人)이 헌다례를 행하고 그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한다. 또 몇 그루는 정유재란 격전지 이었던 경남 사천 땅 조선과 명나라 이름 모를 병사들이 함께 묻힌 조중군총(朝中軍塚) 앞과 천안 독립기념관 뜰에 나눠서 심었는데 지금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더 반가운 것은 2013년 울산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이 나무의 유전자를 이은 95개체의 묘목증식에 성공하여 급속도록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4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환향목 <오색팔중산춘동백>, 이름이 좀 왜색냄새가 나고 너무 길어서 울산에서는 그저 원고향의 이름자를 따서 <울산동백>혹은 <학성동백>이라고 하자는 의견이 중론이란다. 미구에 곧 개명 될 것을 기대해본다. <울산동백>은 현해탄을 두 번이나 넘나든 슬픈 사연 있는 나무임이 틀림없다. (계속)
첫댓글 와~~정말 국경을 넘나드는군요...귀한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