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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시민사회, “대부분의 죽음 막을 수 없어”
그리스도교 기관들,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신앙인의 양심”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이 발의 원안보다 한참 후퇴된 ‘누더기 법안’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노동,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7일 이를 강력 규탄했다.
애초 제출된 중대재해법안은 재해의 책임 대상을 "유해, 위험 방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업주, 법인, 기관, 경영책임자, 감독 또는 인허가 권한을 가진 공무원"으로 규정했다. 또 용역을 준 업체뿐 아니라 경영자와 사업자의 책임을 따질 수 있는 재해 발생의 인과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조항도 뒀다.
그러나 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소위원장 백혜련 의원, 더불어민주당)를 최종 통과한 법안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 적용이 배제됐고, 불법 인허가 및 안전관리 감독 의무를 소홀히 한 공무원 처벌 조항이 삭제됐다. 경영책임자 의무조항에서는 발주처 공사 기간 단축, 일터 괴롭힘 등 조항이 빠졌다.
또 처벌 대상에 사업에 대한 최종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 외에 ‘안전보건업무 담당’을 추가해 최종 책임자가 빠져나갈 구실도 마련됐다. 당사자나 유가족이 산재 피해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필요했던 재해 반복 및 은폐 기업에 재해에 대한 인과관계를 묻는 조항도 없다.
중대재해법은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공포 1년 뒤부터 시행되며, 50인 미만 사업장만 3년의 유예기간을 둔다. 중대 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고 법인에는 50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지난 12월 11일 국회에서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시작 기자회견에 선 김도현 씨. 2019년 건물 신축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숨진 청년 노동자 김태규 씨의 누나다. (사진 제공 = 민주노총)
한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 운동본부는 법사위 소위를 통과한 법안이 애초 발의됐던 중대재해법의 입법 취지를 훼손한 "누더기 법안"이라면서, 재논의를 촉구했지만 통과 법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들은 7일 입장문을 내고 중대재해법이 누더기가 돼 버린 이유를 하나씩 짚으면서 “이대로 통과된다면 대부분의 죽음을 막을 수 없으며, 인간 존엄과 평등의 가치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는 국민동의 입법청원은 물론 다른 발의 법안에도 없던 내용이라면서 “5인 미만 재해 사망 비율이 20퍼센트로 연간 2000명 중 400명이 죽는다. 그동안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로 인해 헌법에 명시된 노동기본권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일한 것도 억울한데 생명과 안전에도 차별을 준다는 말인가”라고 규탄했다.
현재 법사위를 최종 통과한 법안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노동자가 일하다 죽어도 중대재해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경영책임자 의무조항에서 ‘발주처 공사 기간 단축, 일터 괴롭힘’이 적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이들은 “건설사업장, 조선업 등 중대재해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은 발주처의 무리한 공사기간 단축 때문인데도 이를 삭제해 발주처의 무리한 공기 단축과 단가 깎기 등의 요구가 횡행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일터 괴롭힘’에 대한 경영 책임자의 책임이 빠진 것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죽게 만든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라면서 한 해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500명이 넘고, 괴롭힘을 동력 삼아 경영 효율과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문화가 직장 괴롭힘을 방조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장성요양병원 화재참사, 인하대생 춘천 봉사활동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등에서 관계 당국과 공무원의 관리감독, 인허가 문제가 재난,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만큼 공무원 처벌 조항도 발의 원안대로 유지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천주교와 개신교 기관, 단체도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을 외쳤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가 기업처벌법을 비롯한 전태일3법 제정에 적극 앞장설 것’, ‘임시국회에서 제대로 된 기업처벌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고,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단식농성에 연대의 뜻을 밝혔다.
이들은 성명에서 한 달 동안 산재 유가족 등이 단식 농성이라는 절박한 방법으로 중대재해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이 있어야만,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이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에서 별일 없이 일하다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7일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그리스도인 기자회견에서 단식 32일째인 특수고용노동자 이태의 위원장(전국대리운전노조)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 = NCCK 인권센터 사무국장 김민지)
“가족 잃은 슬픔 넘어 목숨 건 농성에 깊이 고개 숙인다”
이들은 “간절함을 담은 단식은 성서가 제시한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이기에, 이 자리에 모인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적극 연대할 수밖에 없다”면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넘어 목숨을 걸고 농성 중인 분들에게 맘 깊이 고개를 숙인다”고 말했다.
이들은 “법 제정 논의 과정에서 보이는 정부, 여당의 다양한 물타기 시도에 참담할 뿐”이라면서, “인권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으려면, 174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당은 더 늦지 않게 중대재해법을 비롯한 ‘전태일 3법’ 제정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전태일 3법은 근로기준법 11법 개정(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노조법 2조 개정(특수고용노동자에 헌법 상 노동3권과 노조 할 권리 보장), 중대재해법 제정을 말한다.
이번 성명은 천주교인권위원회,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및 나눔의집협의회, 청어람ARMC, 평화누리, NCCK인권센터가 공동 제안했으며, 1월 6일 오전11시 기준으로 그리스도교 교회, 기관, 단체 등 100곳이 참여했다.
천주교에서는 우리신학연구소, 한국 천주교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위원회, 천주교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동참했다.
한편 이날로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김용균재단 이사장), tvN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 씨, 이상진 씨(민주노총 부위원장)가 단식 28일째며 김주환 씨(전국대리운전노조 위원장)는 단식 32일째다. 이들을 비롯해 산재 유가족, 노동, 정치, 종교계 등에서 연대 단식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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