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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법
2013년 다해 연중 제21주일
복음: 루카 13,22-30
요즘 많이 보는 영화 중 ‘숨바꼭질’이란 약간 공포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한 부잣집에 입양되어 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얼굴이 흉측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 집의 아들자리를 꿰차고 싶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형이 성추행 혐의자로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형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증언을 해 버립니다. 이 형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부모는 이 아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줍니다.
드디어 고아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누구도 간섭받지 않는 커다란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얻은 그 큰 집에 사는 마음이 편할까요? 이 남자는 결벽증에 시달립니다. 한 사람을 밀어내고 합당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 양심이 자신을 짓누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라도 깨끗하게 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도 하도 열심히 닦아서 피가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꿈에는 형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 약점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마치 감옥에서 출소한 형이 그러는 것처럼 가장하여 그 집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자신의 집을 빼앗으려는 사람의 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딸은 주인공 핸드폰에 달려있는 작은 인형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딸이 선물한 것이라 안 된다고 했더니, 아이는 무섭게 “내 꺼야~”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소리 지릅니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그냥 그것을 떼어 그 아이에게 줍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 아이의 모습에서 양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 아들을 몰아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뻐꾸기는 붉은머리 오목눈이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알은 오목눈이의 알들이 부화하기 며칠 전에 먼저 부화하게 됩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그 뻐꾸기 새끼는 자신의 몸에 닿는 오목눈이의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버립니다. 자신 혼자 살기에도 너무 비좁기 때문입니다. 영화 숨바꼭질은 바로 자신의 공간을 더 차지하려는 이런 사람들의 공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많을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그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지막 날 많은 이들이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겠지만 집주인은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찬례를 의미할 것이고, 가르침을 주는 것은 말씀의 전례를 의미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은 세례를 받았고 미사에도 참례했던 사람들이라고 항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악을 일삼는 그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미사에까지 참례하여 성체까지 영한 이들을 마지막 날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은 편하고 좁은 문은 불편합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사람과 관계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편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에 혼자 살다가 결혼하면 그 집에 둘이 살아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집에 여럿이 살아야합니다. 넓게 살기를 원하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즉 좁은 문이란 내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싫어도 선택해야 하는 희생의 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관계하면서도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고 그분의 원하는 삶,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분을 나 몰라라 한 것입니다.
KonTV '순간포착'에서 ‘아들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든 아버지’란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보았습니다.
장소는 제주시 노형동 A아파트 화재 현장이고, 화면엔 연기가 솟구치는 아파트 베란다에 4명의 가족이 구조를 요청하며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기와 불길은 가족들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가족들은 “뜨겁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다행히 구조대원들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까지 무사하게 구조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들 1명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애타는 아버지는 혼자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119 대원들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아파트로 뛰어드는 아버지. 다른 소방대원이 집 전체를 다 뒤졌는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소방대원과 함께 아무 장비도 없이 보조 공기통에 의존한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듭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찬 아파트를 빠져나옵니다. 가족들 모두 울음을 터뜨립니다. 불보다 뜨거운 부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입니다.
불 앞에 선 아버지, 그의 선택은 그냥 밖에 남아있던가 아니면 불속으로 뛰어들던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냥 밖에 있다면 스스로 아들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일 것이고, 불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나 몰라라 했다면 아들도 아버지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 밖에 쫓겨난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사 때 가르침도 받고 성체도 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희생으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희생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좁은 문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 순간 그분의 뜻과 내 뜻 앞에 서서 어떤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 마음에 들어가는 방법은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님이 당신들의 불편함으로 우리 마음에 사시게 되는 것처럼, 그분 마음에도 우리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해 그분 마음에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 -
첫댓글 아멘!!!
불편하고 힘들지만 예수님 때문에 내가 그걸 선택하여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라는 거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