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해야 할 축어록이 두 달치 밀려 있었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지만 7월 이후로 아예 손을 못 대고 있다가 드디어 축어록 작업을 시작했다. 8월 세미나때 진행한 세션에서 나는 기분 좋게 배부른 만족감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문제를 내놓았다.
그 세션 후에 배부름을 잘 느끼지 못해 폭식하는 문제가 좀 나아졌고 내 기억에 그 세션이 크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축어록 작업을 시작할 때는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실제로 동영상을 보면서 작성을 하다 보니 그렇게 가벼운 세션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내 세션 동영상을 보면서 축어록 작업을 할 때마다 가장 힘든 점은 내가 횡설수설하는 걸 봐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 말을 받아쓰고 있자면 짜증이 날 정도였다. 생각이 엉겨 있으니까 말도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세션에서 우선 눈에 들어온 건 화면에 보이는 내 시선과 움직임이 매우 불편한 점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 때문이었는지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지 의아스러웠고 안구의 움직임도 불안정했다. 차분히 앉아있질 못해서 몸의 움직임도 산만했다. 그게 나의 심리상태인 것 같은데 왜 이 세션에서 도드라졌는지 궁금했다. 대역을 바라보는 카메라로는 녹화가 안 되어 의뢰인과 촉진자를 클로즈업한 동영상을 보게 되어 내 모습이 크게 잘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건 그렇고 다시 이 세션의 내용으로 가 보자.
유 선생님은 감각을 못 느끼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시면서 신경계 장애와 관련성을 초반에 언급하셨다. 만족감 대역과 내 대역이 세워졌다. 내 대역은 만족감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정말 그랬다. 만족감 대역은 껄렁껄렁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뜻밖이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을 들여다보니 껄렁껄렁함은 사회의 틀에 저항하고 싶은 나의 욕구와 관련이 있었다. 그런 저항감을 가지고 반쯤 발을 빼려고 했지만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했다. 어렵게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살았던 걸 기억했다.
그 껄렁껄렁한 캐릭터가 오빠와 연결이 된 것도 의외의 발견이었다. 언니도 나도 모범생 타입이었는데 오빠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엽서를 꾸며서 라디오에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딴짓한다는 이유로 하얀 런닝까지 찢으면서 오빠를 심하게 때렸다.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육체적 폭력이었던 사건을 세션에서 이야기하면서 나는 허걱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확 눈에 들어왔다. 삼십여 년 전 그때 엄청 놀랬나 보았다. 그 후에 나는 오빠가 아버지한테 맞았던 그 자리에서 공부를 했다. 그 책상 이미지가 아직도 뚜렷하다.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 더 강화되었나 보다.
세션에서 껄렁껄렁한 만족감 대역에게 내 대역은 계속 “차렷!” 외쳤고 혀를 찼고 안 된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나중에는 너무나 간절하게 안된다고 말하면서 우는 것 같았다. 동영상을 통해 이 장면을 다시 만나자 가슴에서 통증이 일어났다. 이 세션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오빠는 24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오빠가 옳았다. 유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먹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그렇게 자유롭게 껄렁껄렁 잘 살다 갔다. 내게 껄렁껄렁하면 안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삼십 년 넘게 나는 배부른 건지 배고픈 건지 못 느끼는 사람으로 살았다. 참!
또 하나 수확이 있다. 이제 비로소 오빠와 제대로 연결이 되는 기분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언니와 달리 오빠에 대해서는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사이가 좋았는데도 그랬다. 언니가 나한테 더 각별한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오빠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껄렁껄렁함이 내게도 있는데 그 모습을 거부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 가족 모두 껄렁이 캐릭터를 제외했던 걸까? 세션에서 “나는 이제 껄렁이가 되겠다.”라고 말했을 때, 힘이 별로 실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껄렁이가 매우 흥미롭고 친해지고 싶은 캐릭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첫댓글 이햐~
내안의 껄렁이가 기를 펴는 기분입니다.
껄렁이를 무의식적으로 눌렀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얌전이 코스프레 하느라 좀이 쑤셨던 껄러이를 느끼니
갑자기 껄렁껄렁한 몸짓이 나오네요.~~껄렁이 춤 한판! ^^
인상깊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4살 연상 언니가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는 걸 보면서 스스로 단속을 하며 자라서 그런지
공감이 많이 됩니다.
자세하게 올려준 후기글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저도 좀더 자주 올려야겠습니다.~^^
껄렁한 대역이었던 게 참 인상깊어요. 기분좋고 장난스럽고 개구진 느낌이었고 앞에서 아무리 호령을 쳐도 긴장하지 않는 여유였어요. 많은 대역 중에서도 유독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있어요. 제게는 그런게 없을줄 알았는데, 제가 아주 적은 동작으로 그걸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사셨던 분일거라고 생각됐어요.
잊고 있었던 것은 만족감 대역이었다는 건데요. 글을 읽고나니 만족하면 세상을 가볍게 살수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