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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6)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돈은 행복 위한 ‘수단’일 뿐… 필요한 것 넘어서는 집착은 ‘죄’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개 숙인 채 돈을 보고 있는 마태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모습을 표현한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를 부르심>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5)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간의 최종 목적은 행복…진짜 행복은 인격의 고유성에서 출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인격은 교환불가능...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존엄성 지녀
‘땅콩회항’ 사건, 모욕을 못 견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등 ‘갑의 횡포’가 연일 보도돼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는 최근에도 불거진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이 대상과 정도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이전에도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인격’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 칸트의 정언명령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보에티우스는 인격의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보에티우스>(이탈리아 「철학의 위안」 필사본, 1385년) 출처 위키미디어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인격에 대한 정의
인격 개념은 근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특별한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이 중세철학의 전통 안에서 발전됐다. ‘인격’(persona) 개념의 정의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것이다.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라고 정의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선 보편적인 본성을 중시하던 그리스 전통에 따라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표현처럼 개별성을 중시하는 성경의 전통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인격을 보편적인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플라톤처럼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유물론자들처럼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스콜라철학이 시작되면서 보에티우스의 인격 정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이 정의로는 ‘관계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고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경우 ‘삼신론(三神論)’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성 토마스가 수용해서 확장시킨 보에티우스의 정의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 없이 해석을 심화시킴으로써 충분히 활용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비판까지 종합하여 ‘이성적’, ‘본성’, ‘개별적’, ‘실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담고 있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고, 다양한 입장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가 이러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의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 토마스는 인격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적 실체 안에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 자기 행위에 대해 지배권(dominium sui actus)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작용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용한다.”(STh I,29,1) 그는 이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본성’과 이에 따른 ‘자기의식의 중요성’, 윤리적 행위 결정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칸트를 비롯한 후대 인격 개념이 지녔던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개별적 실체’, 그 자신의 용어로는 ‘자립성’을 주목하면서 이를 인격의 ‘교환불가능성’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인격이 지닌 유일회성과 대체불가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타인의 인격을 대상이나 수단처럼 다루려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이를 넘어서 보에티우스의 정의에는 표현되지 못했던 ‘관계성’과 신과의 유비적 연결에 기반을 둔 ‘자기 초월성’에도 주목했다.(STh I-II,서문) 이러한 통찰은 현대에 각광받은 마틴 부버(「나와 너」)의 대화론적 인격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격이야말로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STh I,29,3)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가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발견한 셈이다.
성 토마스가 제시한 풍부한 인격개념의 활용가능성
물론 성 토마스의 이러한 종합이 결코 인격이 지닌 신비적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많은 인격론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풍부한 인격 개념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 및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의 존엄성이 위협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의 인격개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비판해 보자. 아마도 횡포를 부리는 갑들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의 ‘인격’마저도 구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부를 지닌 갑부도 결코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타인의 인격’은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직위나 부를 앞세워서 인격적인 모독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직장 갑질 방지법’, ‘교권 보호 위원회’ 등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가 각성하여 자신을 돕는 이들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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