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7) 손이 오그라든 사람
신앙 실천 방해하는 규칙이라면 깨뜨려봐야 합니다
■ 흔히 ‘바리사이 같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을 두고 ‘바리사이 같다’고 말하는 걸까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주님,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두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일을 하느냐고 비난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성경의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바리사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보다 법을 더 따지는 바리사이 콤플렉스는 우리 교회가 가장 심합니다.
어떤 신자분이 영성체를 하러 나왔는데 손바닥을 어디로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데 본당신부가 그 신자의 손바닥을 때리면서 영성체할 자격이 없다고 무안을 주었다는 이야기, 혼인관계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사람이 그래도 성당에 나오고 싶다고 하자 죄인이라면서 내쫓았다는 이야기, 망설이고 망설이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서 고해성사를 봤는데 고해신부가 당신이 그러고도 신자냐고 망신을 줘서 마음의 상처를 받아 다른 종교로 간 사람의 이야기, 일이 바빠서 예비신자 교리에 두어 번 결석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우리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갑질들의 이야기는 모두 바리사이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병적인 콤플렉스들은 왜 생기는 것인가? 심리적으로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작은 권력 행사를 통해 자기만족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제들 중에 바리사이들처럼 갑질을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물음을 던지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 고정관념이 심한 사람들도 바리사이 콤플렉스가 심합니다.
이들은 얼핏 열심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주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치유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변혁을 꾀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가면서 보수화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것은 공산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기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시간이 가면서 전 정권보다 더 심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조직을 보수화하는 일들은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런 현상은 종교도 예외가 없습니다.
창시자가 시작한 종교들은 시간이 가면서 창시자를 신격화하고 전례가 생기면서 내적인 자유로움이 사라지고 조직의 유지를 위한 법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바리사이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주님의 말씀은 바리사이 콤플렉스라는 돌밭에는 씨가 먹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을 더 오그라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독성죄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살지는 않는지 매일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바리사이 콤플렉스는 교회를 키우기는커녕 죽이는 것이기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 마태 12,9-14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8)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님 씨앗 떨어지는 곳… 당신은 어떤 땅인가요?
■ 성경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면, 저는 좋은 땅이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 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땅’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사람들을 분류합니다. 길바닥 같은 사람, 돌밭 같은 사람, 가시덤불 같은 사람, 좋은 땅 같은 사람.
좋은 말씀을 들어도 씨가 먹히지 않는 사람들을 길바닥과 돌밭, 가시덤불이라고 표현한 것인데, 이 내용은 종교지도자들이 신자들을 평가할 때 사용하면 정서적 폭력이고, 신자 스스로 자신을 그렇다고 생각하면 정신적 자학행위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 의지로 성장시킬 수 있을 만큼 능력이나 역량이 있질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안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거나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결핍돼서 심리적 불균형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속된 말로 거의 대부분이 환자들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고서 “넌 왜 믿음이 약하냐”, “왜 복음말씀대로 살지 못하냐”, “너는 왜 마음이 길바닥이고 돌밭이고 가시덤불이냐”고 질책하는 것은 정서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때는 왜 내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지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 내 마음이 길바닥 같을까?”, “왜 내 마음이 돌밭 같을까?”, “왜 내 마음이 가시덤불 같은 것일까?”하고 물음을 던지고 원인을 찾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고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원인 분석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윤리적·도덕적 판단을 하거나 정죄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귀 운운하면서 정서적 폭력을 가하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저질러왔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자신을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는 구제불능이라고 여기면서 병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신경증적 증세들, 종교적 우울증, 완전강박증, 구원불안증 등에 시달리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신 주님과는 정반대의 어리석은 짓을 종교지도자들이 행해온 것입니다.
간혹 스스로 ‘좋은 땅’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늘 기도 중에 살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살피면서 한 점의 죄도 짓지 않고 산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들. 이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영적 교만 중독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참 겸손한 사람들이며, 주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심리치료에서는 치료가 되는 사람은 자기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기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치료가 안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성격장애자들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잘 보이고 자기문제는 안 보이는 사람들, 스스로 좋은 땅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이 복음의 내용을 거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주님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 마태 13,1-9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유익한 심리학] 되돌아오는 악령(마태 12,43-45)과 선무당
어떤 이들은 “사람이 스스로 법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살면 그만이지 무슨 하느님이 필요하냐?”라고 말한다. 그들은 실제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면서 주변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얼핏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생각 속에는 커다란 모순이 숨어있다. 마치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 한 자락 자신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본능적 반응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불안에 서 벗어날 수 없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간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귀감이 되었던 사람들이 말년에 피폐해지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사람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빠진다면 그것은 자칫 자아도취적 태도요, 자의적 관점에 그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 주시는 참 존재이시다. 우리는 자의적 성실과 진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깨닫게 된 성실과 진실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의 현실인 한계성과 불완전성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만나고 그 빛의 도움으로 어둠을 이겨내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 종교를 갖는다고 타박하며 자기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역설한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역시도 인간 의지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스스로 내면에서 남모르게 무너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한 맹세조차도 지탱하지 못하는 존재다.
이렇게 세상에는 세상이 주는 거짓 신념과 믿음, 허영과 허상 속에서 마치 그것이 참된 것인 양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도중에라도 거짓된 삶을 깨닫고 제 자리로 돌아오면 좋으련만, 지금까지 쌓아 올린 아성(牙城)을 허물지 못하여 모래 위에 지어진 성(城)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여태껏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합리화하기 급급하다.
또 어떤 이는 용기를 내어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삶이 허상의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참된 진리의 길을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이따금 닥쳐오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만하면 됐지? 이보다도 못한 사람이 많은데’ 하며 머물러버린다. 그러나 사람은 진리의 꼬리만 잡고 살 수 없다. 한계를 안고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우리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현실의 시련과 고통에 굴복하여 머물게 되면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2,43-45)
아무리 세상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다고 해도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다수의 군중이 비웃고 조롱한다 해도 진리는 진리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 가지(유혹)를 모두 거부하셨다. 그것을 거부하는 데 있어 겪게 되는 모든 십자가(현실)를 기꺼이 참아 받으시며 견디셨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싫어하고 마지막 카드인 ‘죽음’을 내밀었지만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9 · 끝) 성경이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인생길, 우릴 이끌어주는 빛은
성경은 거룩한 책,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살아야할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역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오해와 왜곡된 해석이 적지 않고 더욱이 사이비 종교인들이 성경을 멋대로 해석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라 마지막 글을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성경은 글자 그대로 봐야지 다른 책을 보거나 인문학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모든 답이 있으니 다른 학문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그냥 읽어나갑니다. 그리고 자기식대로 묵상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가장 악용하는 것이 사이비 교주들이란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다 자기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종말론의 숫자들을 협박용 혹은 금품갈취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식의 성경묵상은 자의적인 해석·편향적 해석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보는 사람의 지적 수준, 결핍 욕구의 내용에 따라서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 눈에 똥만 보인다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내용만 선택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기는 것이 광신도 혹은 사이비 교주들인 것입니다.
이런 오류 속에 빠진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구약의 내용이 자신들을 선민으로 증언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오래전 가나안 땅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을 마치 하느님께서 주신 양 하면서 침략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사실 중동지역의 구약은 이사악 계열의 것과 이스마엘 계열의 것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건만, 그 후손들은 서로 자기들이 장자라고 우기면서 살상극을 벌이는 우매한 짓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오래전 미국 나사(NASA)에서 우주로 두 개의 우주선, 보이저 1호·2호를 쏘아 올렸습니다. 이 두 위성은 배터리가 없어질 때까지 우주의 행성들을 찍어서 지구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작고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 박사가 나사에 부탁을 한 가지 했다고 합니다. 보이저호의 카메라를 한 번만 뒤로 돌려서 찍어달라고. 즉 지구를 찍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사가 칼 세이건 박사의 청을 들어줘서 찍은 지구의 사진. 그 사진에서 지구는 불그스레한 우주 안개 같은 것 어느 구석에 작은 빛 하나, 먼지 같은 빛 하나였습니다. 이 작은 빛 안에 수많은 사람들, 우주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같은 존재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짓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보시기에 경악할 만한 짓을 종교적 명분, 정치적 명분으로 저지르면서도 반성 없이 사는 것이 인간이란 미생물들입니다. 보이저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을 보면 성경이 왜 쓰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특정 종교,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먼지 같은 지구에서 사는 미생물 같은 인간들에게 함께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 신의 뜻을 알려주는 책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