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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고 성령 충만한 언어를 사용하라!
성경본문: 잠언 6: 20-23
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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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규 목사(낙양교회)
역사상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하는 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말은 그 시대에 사람들의 전문 분야에서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철학 분야에서도 그렇고, 문학이나 정치나 종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와 세대와 역사적 시기를 막론하고 특정한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특정 시대 사람들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이런 말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상을 구현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는 죽어 있는 언어가 있고 살아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아 있고 성령 충만한 언어를 사용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 드리려고 합니다.
말의 힘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말들이 살아 있는 말이 되어 그것들 본래의 목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살아있는 말들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망령의 소리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살아 있는 언어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정결케 하다’(purgation)
‘정결케 하다’ 이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이 구절은 다윗의 유명한 회개의 시편에 나타난 단어입니다. 다윗은 옛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기를 갈망하였는데 바로 이 기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결케 하다’는 이 단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유익한 단어입니다.
제 친구 장로님이 특전사 장교 출신입니다. 그가 옛날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특전사에 들어가서 고공 낙하 훈련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서 낙하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하여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 죽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전사 요원들에게는 생명 수당이라는 것을 줍니다.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는 병사에게 “당신의 죄가 정결케 되었습니까? 당신은 피와 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질문은 단순히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그의 마음에 박힐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영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에 뒤 따르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죄에서 깨끗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라고 전할 때,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날의 풍조는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쉽게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죄를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선한 그리스도인이 못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주 끔찍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준엄한 성경 말씀을 사람들에게 다시 상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당신 미쳤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쳤냐는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미친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저 사람은 아주 균형 잡힌 사람이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다.’는 소리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바울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언어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서 정결케 되셨습니까?”
2. ‘내적 조명’(illumination)
두 번째로 권장해 드리고 싶은 살아 있는 단어는 ‘조명’(illumination)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진리의 빛으로 조명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분명 ‘성령의 내적 조명’은 있습니다. 죄에서 정결케 된 사람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소한 것들까지 따지고 들거나 복잡한 신학적 이론에 대해 논쟁하거나 미묘한 신학적 의미의 차이를 물고 늘어지면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날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에 대답합니다.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겔 1: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오늘날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고 찾는 사람들은 이사야나 에스겔 선지자처럼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찾아가 “내 생각이 옳습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조명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내면에 빛을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고 계십니까?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뜨거워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의 조용한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조명인데 성령의 조명이 있으면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자기 부정’(Renunciation)
세 번째로 권장하고 싶은 단어가 바로 ‘자기 부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현재 우리는 자기 부정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세상을 적당히 타협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세상과 십자가가 섞여 있어서 어느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옛 생활을 포기해야 합니다. 회심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에 속합니다. 그는 위로부터 태어난 자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을 자입니다. 하늘나라가 그의 고향이요, 할렐루야가 그의 언어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거부당하는 적은 무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가 인기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복음주의가 인기 있는 것이 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가 정결케 되고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는 사람은 세상을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고,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도박꾼을 회심시키셨다면 그에게 화투를 버리라고 말할 권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경마광인 사람을 회심시키셨다면, 그에게 모든 말(馬)을 다 팔고 꼬리를 짧게 자른 오래된 말을 다시 쳐다 보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부정’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르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그래야 진정한 제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4. ‘자기희생’(immolation)
네 번째로 권하고 싶은 단어는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은 어린양처럼 자신을 제단 위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어린양을 취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줄로 묶은 다음 그 목을 잘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자기희생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오늘날 신자들은 죽을 곳을 찾지 않고 반대로 안전한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안전한 곳(숨을 곳)을 찾지 말고 죽을 곳(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칠 곳)을 찾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47) 선교사는 지난해 12월 21일 수술을 받았습니다. 췌장에 생긴 종양 제거 수술이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의 한 종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통해 발견된 종양이었습니다. 수술하지 않고 치유되기를 기도했지만 결국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수술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알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수술대 위에선 모두가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수술대 위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깨닫기 마련입니다.
수술을 받는 그날 이 선교사의 책 ‘떠남’(규장)이 나왔습니다. 몽골에서의 선교 사역을 마치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로 떠났던 그의 여정이 나옵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는 떠남을 ‘내 인생의 가장 담대한 순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선교사 인생 가운데 던져진 메시지는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그 결단을 하기 위해선 믿음의 대상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책에는 ‘떠남’이란 키워드를 통해서 이 선교사 자신을 인도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란 시편 34편 8절 말씀도 책의 전체를 흐르는 주제입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이 선교사의 책 ‘내려놓음’에선 서울대를 나오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양양한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몽골로 떠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몽골에서 이 선교사는 몽골국제대학교 부총장으로서 기독교대학이 굳건하게 서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책 ‘떠남’에서는 몽골에서의 모든 사역을 정리하고 다시 한 번 ‘영적인 번지점프’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 그의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자기희생이 없다면 불가능한 순종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구명보트로 이용하여 어려움에서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리로 이용하여 불구덩이를 건넌 다음,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희생할 곳은 결코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배부르고 등 따스운 피난처를 그만 찾아야 합니다. 낮아지신 나사렛 예수의 제자로서 편한 길을 버리고 제단을 찾아 우리 자신을 희생해야 할 때입니다.
5. ‘경배’(Adoration)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성령 충만한 단어는 ‘경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정결케 되고, 불세례를 통해 성령의 내적 조명을 얻고, 세상을 포기하고 세상의 온갖 유혹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을 제단 위에 희생 제물로 드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경배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다리를 불태워버리고 세상을 완전히 포기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숭모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싹틀 것입니다.
칼빈주의자였던 아이작 왓츠는 1714년에 이런 찬양을 지었습니다.
숨 쉬는 동안 내 창조주를 찬양하리라
숨이 끊어져 목소리가 사라지면
더 큰 능력으로 그분을 찬양하리라
‘우리가 이런 찬양을 드리려면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칼빈주의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말을 타고 80세가 될 때까지 4만 킬로미터를 전도여행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교회를 세웠고, 잉글랜드에 복음의 불이 타오르게 하였습니다. 늙어서 찬송을 부를 힘조차 없을 때, 그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지만 아직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찬송을 부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느 날, 죽어가고 있던 이 알미니안주의자의 입에서 찬송이 희미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소리를 들으려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웨슬리의 입에서 어떤 찬송이 흘러나왔을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옛 칼빈주의자의 찬송가였습니다.
숨 쉬는 동안 내 창조주를 찬양하리라
숨이 끊어져 목소리가 사라지면
더 큰 능력으로 그분을 찬양하리라
신학적 입장을 뛰어 넘어 아이작 왓츠와 존 웨슬리는 팔을 뻗어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경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온 영혼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의미를 상실한 언어의 사용을 거부하는 용기를 냅시다. 누군가 일어나 우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상투적인 말을 외칠 때마다 기계적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하던 그런 것을 더 이상 하지 맙시다. 그의 외침이 정말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 분별합시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아멘’으로 화답하고 죽어 있는 언어라면 과감하게 던져 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 있고 성령 충만한 언어를 사용합시다.
용기 있게 일어나 “우리는 불과 보혈로 죄에서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조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을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경배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다면 나의 모든 이야기가 엉터리인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이 일에 임합시다. 그러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옛날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고, 우리는 성령의 불을 체험할 것이며, 꺼져가던 부흥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숨 쉬는 동안 내 창조주를 찬양하리라(아이작 왓츠)
숨 쉬는 동안 내 창조주를 찬양하리라
숨이 끊어져 목소리가 사라지면
더 큰 능력으로 그분을 찬양하리라
내 찬양의 날은 끝나지 않으리
생명이 있을 동안, 생각이 있을 동안 계속되리
그 후에도 영원한 시간 동안 계속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