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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의 전환
1970.10.13 (화), 한국 중앙수련원
섭리의 중요한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구원의 완성에 있다. 구원의 완성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중도이폐(中途而廢)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중도이폐하면 우리 인간들은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다. 사탄은 어떤 존재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유린한 원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실체의 하나님의 현현을 목표로 해서 아담을 지으셨다. 때문에 아담은 실체를 가진 하나님이다.
아담을 창조하신 목적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완성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알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다. 완전 주관은 그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할 수 없다. 완전히 알지 못하면 완전 주관은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알고 있는 하나님 이외에는 이 세상을 완전 주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담 자체는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 자체가 창조의 전반을 관장해서 그것을 완전 주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을 앞에 세워서 그 아담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시어, 아담의 육체를 하나님의 공명체(共鳴體)와 같은 입장에 세워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이 천주를 주관하려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째서 아담과 같은 형(型)을 거치셨는가. 만물은 형상적인 꼴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어떠한 형도 가지고 있지 않다. 크다고 하면 무한대(無限大)요, 작다고 하면 무한히 작은 분이시다. 그런 분의 어떤 표준적인 형을 형성하고 표시하더라도, 형체를 나타낸다 하여도 실체를 가진 만물은 그 하나님에게 직접 주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실체를 가진 피조세계에 있어서는 실체를 가진 주인적 인격과 형을 갖춘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의 주관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천사장이나 여러 형체를 가진 실체, 그리고 무형의 실체까지도 주관하려면 그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形狀)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을 중심으로 하여 영육 양면의 세계를, 즉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목적이다. 따라서 하나의 인격적인 실체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 완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 완성, 곧 형(形)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그의 형태, 인상(人相), 인격 등이 무형세계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담을 만들어낸 것이다. 형(形)이 없으면 형(形)의 세계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맺는 것은 무엇으로 하는가. 여기에서 평면적인 대표자는 인간이며 입체적인 대표자는 하나님이다. 그것을 일체화하고 영원히 결부하는 끈, 결부되는 결실점, 그 맺는 중심점이 이른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육체를 가진 인간 자체도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일체가 될때의 그 심정, 체휼경(體恤境), 그 감정은 무한한 사랑에 자신이 일치되었다고 하는, 최대의 행복감을 느끼는 경지이다. 그것이 이른바 최고의 행복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 행복한 경지의 이상세계, 선한 세계, 선한 창조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애정에 싸여 하나님과 일체가 됐다고 하는 것을 실감하는 세계, 그런 세계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 창조이상인 것이다. 이 소망이 결국은 사랑을 중심으로 한 소망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도 사랑의 환경을 떠나서는 달성될 수 없다. 인간이 자기 생애를 통하여 그런 것을 실감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의하여 인간과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다.
사랑의 부활노정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
한 사람이 남자와 여자도 그와 같은 입장이 된 사랑의 실체를 느낀다. 그리고 창조목적과 일체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자연인 것이다. 그러한 입장이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을 중심으로 연결하고자 했던 목적인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타락으로 인해 반대의 방향으로 되어 버렸다. 이 중심점을 천사장인 사탄이 노렸다.
그러므로 우주는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심점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했는 데 그러지 못하고 사탄과 연결되고 말았다. 그 연결된 동기가 반대의 작용을 받은 것이므로 연결된 그 자체도 언제나 반발한다. 그래서 여러분의 양심의 기준과 육심의 기준이 서로 반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연결된 그 끝을 어떻게 풀고 해방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걸어나온 길이, 지금까지의 인간들이 수천년의 역사를 통하여서 싸워 온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점을 회복하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육심에 들어와 인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싶었지만, 인간과 직접적인 사랑을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간접 전법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의 세계로 점점 깊이 임재하시어 지금까지 섭리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언자라든가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사랑의 체휼을 통하여 그 부분 부분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세상에 가르치고, 그것을 전부 취해서 점점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의 역사였다. 그러니까 복귀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랑의 부활 노정을 더듬어 왔다는 결론이 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몸과 그 양심 가운데 임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결합을 도모해 오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메시아가 필요한 이유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시작하여 4천년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선민권을 만들고, 선별된 민족의 대표, 아벨의 입장에 선 유대교를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메시아 사상을 갖게 해 왔다. 그렇게 그 민족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가는 믿음의 기대(基臺)에 해당되고 유대교는 실체기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이루어진, 국가 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횡적으로 일체가 된 경우에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자연히 완성되어질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기대 때문에, 그 한때를 바라셔서 4천년의 역사를 경과하면서 수고해 오셨다.
선민권에 서야 할 그 민족도 그 권을 목표로 한 국가 기대를 바라 나왔던 것이다. 그 기대는 완성되지 않더라도 원리적으로 그 기간에 도달했으므로 하나님은 서둘러 예수님을 지상에 내보내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과 일체가 되었을 경우에는, 예수님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참부모의 자리에 서게 된다. 참부모의 자리에 설 수 없게 될 때에는 새로운 사랑을 중심으로 한 혈통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들은 왜 메시아가 필요한가.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구원의 근본 기점은 어디인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접촉점이다. 거기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되돌아가야 하는데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사탄의 혈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혈통과 관계 없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원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죄를 제거하는 데는 혈통적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로 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뽑아 내느냐 하는 문제, 이것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메시아가 필요한 것이다. 그 메시아라는 분은 우리 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닌가. 이 혈통을, 우리들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이 사탄의 혈통을 누가 제거할 수 있는가. 그것을 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참부모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어 선한 상대기준을 조성하고 세계를 자기의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참부모가 나타나기 전에는 절대로 이것을 뽑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의 부모와 선의 부모의, 이른바 사랑을 중심으로 한 싸움의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다 싸우고 최후에는 남는 것이 사탄의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았다고 하는 기준이 설 때, 비로소 사탄의 혈통권이 굴복한다.
예수님의 길
그러한 기준을 예수님은 바라고 나오셨다. 예수님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3년 공생애노정에 나서기 전에 선포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은 누구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라. 자기 아내보다도, 부모보다도, 자녀보다도,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안된다. 혈통을 빼버리는 것은 메시아가 하신다. 그러나 제거되도록 하는 행동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 일체가 되어서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준이 성립되지 않는 이상에는 우리는 구원되어 질 수 없다.
그것을 빼내는 것은 어떠한 입장에서 될 수 있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경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빼내지지 않는다. 생사의 경지인 것이다. 거기를 통과해야 악의 혈통이 제거되어 간다. 이것을 제거하는 데는 우리들이 그냥 이야기하고 느끼고 하는 그런 입장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40일의 금식 기도를 하거나 죽음의 경지를 더듬어 가야 하는 것이다. 피를 토하면서도 이 육체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소생할 것을 한마음으로 사모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한마음에 참소(讒訴)받는 어떤 하나의 빚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그 경지를 어떻게 해서 체휼해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고, 요셉 가정으로부터 가지가지의 많은 박해,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박해를 받아 왔던 것이다. 감정을 가진 산 사람이 산송장과 같은 생활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생사의 경지를 통과하면서도 일심불란, 내심에서 바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칙인 것이다. 여기에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결심을 해 가지고 거기까지 도달해 가지고 그 자신의 승리권은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가진 승리권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자기 개인에 있어서는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승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섭리역사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때까지 혈통 전환의 뜻을 품고서 섭리하신 노정에 있어서 실패한 그 고민을 여하이 자기가 이어받아서 승리한 기반 위에 서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이어받았다고 하는 기준에 서지 않으면 메시아로서 설 수가 없다. 그것을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시므로 메시아가 그 기준에 서도록 역사를 통하여 줄곧 실천해 나오셨다.
그러면 이 혈통의 전환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일신(一身)에 있어서는 생사의 경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신앙의 기준이 된다. 일신에 있어서는 생사의 경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경지를 통과하는 것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까지도 부정해야
하나님은 창조 본연의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과 결합시키고 싶어했던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 일신은 잊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대한 애정심(愛情心)에 접하지 않으면 생사의 경지를 극복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긍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완전 부정인 것이다. 생명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떳떳이 사탄 앞에 설 수가 없다. 그것이 지금까지 각 개인이 신앙 생활을 해 온 입장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개인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역사적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어떠한 역사과정을 통과해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을 전환시키는 데는 어디서부터 전환시켜야 하는가. 자기가 태어나 30세가 되어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전환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에서는 개인적 승리의 기준의 출발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전과 관계된 승리의 출발은 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공식노정을 출발하기 이전의 승리권이 중요하다. 공식노정 출발 이전의 그 생활권은 역사적 부활의 생활권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공식 노정의 출발 기준을 이룰 수가 없다.
공적인 3년 기간은 현세에 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있는 기간인 것이다. 사적인 30년 기간에는 역사적, 공적 심정 기준을 계발해서 현세를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사랑의 기대를 잇는 기대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아담에서부터 계속해서 해나왔다. 그 다음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메워졌을까. 사랑에 의해서 메워졌던 것이다. 어떠한 사랑인가. 가정 기준을 중심으로 악의 부모에서부터 출발한 인류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인 참부모의 가정 기준을 이루어서 그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거기서부터 전환 운동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적인 대표자를 줄곧 세워서 소생, 장성, 완성의 단계를 거쳐서 그와 같이 역사적, 혹은 세계적인 대표자를 세워 놓고 이러한 전환 운동을 완전히 해 나가면서 발전하는 역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혈통 전환의 조건
사람은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가 여자를 거쳐서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길은 어디에서 그 교차점을 만들어야 되는 것일까. 그것은 여자의 배 속이다. 그래서 여자의 배를 향해 되돌아가는 운동을 해 나왔다. 다시 말해 역사는 줄곧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을 세워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의 배 속에서 생명이 잉태한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은 아무렇게나 잉태될 수 없다. 거기에는 잉태해야 할 여자가 있는 동시에 잉태시킬 남자가 있어야 한다. 결국 한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해왔다.
그러나 완전 복귀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남자의 골육 속에 잠재해 있는 아이의 씨가 그 출발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의 혈육속에 있는 아이의 씨에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었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세우지 않으면 완전 혈통적 전환의 기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종교는 그러한 길을 가는 것이므로 세계적 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하면, 우리 인간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을 가진 종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멀지 않아 명실공히 세계적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문답과 같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지금까지 확실히 해명하지 못했다. 어디를 목표로 해서 부활의 기반을 출발시키는가. 그것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태어나 성장하여 30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거듭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심정적 내용의 발생지가 30세부터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부터다. 그것을 잇는 심정의 상속을 했다고 하는 조건을 갖지 않으면 거듭남의 출발과 동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을 모르면 안 된다.
혈통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담의 골수까지, 골육의 중심부까지 들어가서 장래의 아이가 될 그 씨에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된 승리적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장래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틀림없는 것이다. 성서에 그렇게 해온 기록이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모해야
지금까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하고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 생각하며, 그 안에 모두 들어가고 싶어한다. 또, 그와 일체가 되고 싶어한다. '아, 그립다'하며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경지에 서야만 예수님과 자기는 하나인 것이다. 자기도 예수님과 한몸인 것이다. 예수님이 슬퍼지면 자신도 슬퍼진다. 그 골육 속에 있는 아이의 씨가 있다고 한다면, 그 남자의 감정의 모든 것은 그 씨에 영향을 미친다. 기쁠 때는 기쁜 영향을 미친다. 슬플 때는 슬픈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예수님과 이어지는 아이의 씨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남자이시다. 사실은 타락하지 않는 원래의 아담인 것이다. 결국은 육적이면서도 영적으로 아버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길은 전연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골수에까지 들어갔다고 하는, 예수님을 목마르게 그리워하여 예수님의 애정과 맞닿는 그러한 것을 체휼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가르침인 것이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워하고 맞이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신랑으로 맞이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중의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데 있다. 하나는 그 골육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씨가 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배를 통과했다고 하는 조건도 얻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부의 입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씨로, 아담 속으로 모두 되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聖靈)은 해와의 신이다. 이것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낳을 수는 없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에 아담 속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작용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모두 예수님의 몸 속에 있는 애기 씨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이와 같은 신앙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런 것은 알지도 못한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다만 예수님을 무조건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한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수월하니까 그런 말을 한다. 잘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원리적으로 보아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완전 복귀는 안 된다. 이론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은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라고 했다 해서 예수님 앞에 모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골육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이것을 역사상에서 섭리하시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어떤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 중간에는 수많은 사탄권, 원수권이 가로막고 있다.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는 이 사탄권을 돌파하는 것은 단번에는 안 된다. 그래서 수많은 싸움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나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의 골육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다 들어간다고 한다면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육체는 들어가지 못한다. 심정밖에는 안 된다. 사랑밖에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이외에는 인연을 맺을 아무것도 없다. 진리도 아니고 정의도 아닌 것이다. 생명이 있기에 앞서 사랑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난다. 사랑 없이는 그것을 맺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역사도 뛰어넘을 수 있다. 거리나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왜 이렇게 분명히 가르쳐 주느냐 하면, 복귀의 노정이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이요, 지금부터 여러분이 심정적 문제를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제 일보를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혈통적인 전환기가 아니라 생애의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와 같이 분명한 내용의 기반을 닦아 나가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한다. '이것봐, 어디에서 이전해 왔어? ' '어디에서 출발했어? '라고 하면, '타락하지 않은 에덴 동산, 하나님의 품에서'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무엇이 그러냐고 물었을 경우, 여기가 이렇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로서는 설 길이 없지만, 이러이러한 분이 싸인해 주신 것을 받았으므로 그렇다고 해야 한다.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세웠으나, 그 소유권은 종이 한 장으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우리가 받았으니 사탄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길
그렇게 해서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고, 참부모의 혈육에 접할 수 있는 내인(內因)을 세웠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성신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길을 더듬어 가야 거듭나게 된다.
예수님의 상대자는 성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실체인 예수와 성신의 사랑의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듯, 예수와 성신의 일치된 사랑의 경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을 것이다.
성신의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이 매우 그리워서 견딜 수 없게 된다. 성신은 그러한 감동의 역사를 한다. 예수님은 신랑, 성신은 신부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그리워하여 이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 기쁨을 체휼해야 비로소 잃었던 본래의 사랑의 기준이 새롭게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중생의 체휼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의 원리는 그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하나님도 이 때문에 오랜 역사과정을 통과하셨다. 예수님도 역사적 비애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것을 극복해 나오시며 지금에 이르신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6천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6일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을 경우에는 타락한 인간 자체가 주관권을 복귀할 수 없다. 인간 자체가 그것을 찾아서 '이것이다'하여 세계적 인격의 권위를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절망적인 세계에 선생님과 같은 사나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슬픈 일인가, 기쁜 일인가? 여러분은 기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기쁘지가 않다. 나는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왔다. 그것은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어렵다고 하는 것은 하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저 해서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는 되지 않는다. 완력이나 폭력으로서는 되지 않는다. 원칙을 철칙으로 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방 팔방에서 그 표준을 겨냥하면서, 중심적 위치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 나간다고 하는 것,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하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와 같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그에 대한 내적 기반을,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왔다. 여러분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반을 만들어 여러분이 몰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평안권을 이룩했다는 것은 천주적(天宙的)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방면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걸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성령이 예수님을 도와 타락시킨 해와를 끌어내고, 사탄편에 넘겼던 것을 끌어들여, 본래의 애정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낳았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는다고 하면 완전 복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는데 있어서도 역사적 내인의 심정 기준에 결합시키기 위한 섭리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여자의 복중으로 들어갔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싸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가정에서는 아벨과 가인이 싸운다. 둘이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형님인 가인이 동생의 입장에 서야 한다. 형님이 어떻게 하여 동생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을 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복귀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형제의 싸움인 것이다. 가인도 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아벨도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 이후에도 다시 이러한 싸움을 하게 된다. 모두 형제를 중심삼고 싸운다. 에서와 야곱, 이들은 쌍동이로 태어난 자들로서 싸웠다. 이들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싸웠다. 그리고 언제 또 싸웠느냐 하면 성장한 다음에 싸웠다. 40대에 싸웠던 것이다.
다말과 밧세바
다말, 여러분은 다말에 관해 연구를 하면 원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다말은 누구와 관계하였던가? 시아버지였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계승할 수 있었는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였던가? 밧세바이다. 밧세바는 어떠한 여자였던가? 우리야의 아내였다.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 되었는가? 우리야는 어떠한 입장인가 하면 둘째 부인인 것이다. 이들을 타락하기 전의 에덴 동산의 그 위치에 세워 놓고 볼 경우, 다윗은 아담의 입장, 우리야는 천사장의 입장이 된다. 천사장의 아내는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해와의 입장이다. 천사장이 아담의 상대자인 해와를 타락시켜 끌고갔다. 사랑으로 점령하여 훔쳐 간 것이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그러한 삼각 관계에 다시 되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원리적 기준에 입각한 조건을 세운 기대 위에서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의 아이가 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영광의 아이인 것이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자기의 시아버지하고 관계했다. 그런데 그녀는 시아버지하고 관계하는 데 있어서도, 정신이 훌륭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법도는 음행을 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권에 있어서 다말은 자기의 첫째 남편 둘째 남편이 죽어 버렸지만, 어차피 이 혈통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혈통을 지키는 데 있어서 자기의 체면이라든가, 자기의 위신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말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혈통을 어떻게 하면 남길 수 있을까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이 혈통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혈통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말은 혈통을 복귀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권에 설 수 있었다. 심정적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이 된 것이다. 거기에서 시아버지와 관계했던 것이다.
태중에서 승리한 이 기준이 줄곧 전통적 역사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의 자손에게 이어져 발전해 나왔다. 그런데 왜 국가적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사탄 세계에 국가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늘 세계에도 국가적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가인 아벨로서 상대 기준에 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권을 이와 같이 발전시키면서 내적, 혈통적 승리의 기준을 이루어 나왔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선조들의 심정을 계승해 온 것이다.
마리아의 심정
자기 체면이라든가, 자기의 위신이라든가, 사회적인 환경과 같은 것은 모두 잊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전부라고 하는 심정을 가진 대표적인 한사람의 딸이 마리아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적 승리의 기준을 이어받은 마리아의 태중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 기반에 선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잉태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적인 싸움을 끝낸 승리의 기반, 하나님 앞에 태어날 자격 조건이 갖추어진 기반 위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역사를 통과하지 않은 자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혈통적 내용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비로소 사랑을 받는 독생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표어이다. 이것을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라도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종의 종교나 양자(養子)의 종교권에는 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적자권에 서는 종교는 되지 못했다. 그런 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심한 기독교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면 그런 입장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사탄의 참소를 받는 입장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가 와서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땅 영계가 총동원해서 그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당시 예수님 앞에 천사장은, 가정적으로는 세례 요한, 교회를 중심삼고는 유대교, 그리고 나라를 중심삼고는 이스라엘이었다.
예수님의 탄생
세례 요한의 가정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유대교와도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세례 요한과 하나가 되었다면 유대교와도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은 예언자로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힘을 합쳐 계획을 세워서 제사장을 앞세워 로마의 반대자들을 모두 추방해 버리면 되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일체가 되었다면 로마 법왕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일체가 되어 국가를 세워 로마를 병합하고 지중해 전반에 걸쳐 있는 로마 문명권을 예수님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했으면 세계 통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전세계를 복귀하고 지상 천국의 이상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룩하려 했지만 이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천년 동안 죽음의 희생을 치르고 이제 겨우 세계적인 제2 이스라엘권을 이룩했다. 그러나 옛날과 같이 제2이스라엘권의 기독교는 지상에 나라가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속죄하는 기간으로서의 2천년 동안 방랑하며 세계 만민으로부터 학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탕감의 철칙은 용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모두가 환영하는 환경에서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주위 환경과 또 다시 싸워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국가는 설 수 없다. 이것을 선생님이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역사적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때가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잃고 말았으므로, 이스라엘은 열둘 이상의 아랍 국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태어나셨다. 그런데 기독교는 지상에 나라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탄과 대결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땅이다'라고 할 수 있는 땅이 있는가? 없다. 제1 이스라엘을 중심한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렸던 것이다. 뜬 구름 모양으로, 바람 부는 대로 쫓기고 쫓기면서 지금까지 나온 무리가 수는 많지만 지상에서 가치가 없는 종교권의 무리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수많은 정권의 박해를 받아 왔다. 그리고 그 싸움을 방비할 수 있는 법칙이 없으니까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는 오래된 갈등 문제를 안고 있으며, 여러 가지 비참한 사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종교의 자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와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해야 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다.
입적(入籍)할 나라가 있어야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상에 발판을 만들고 싶어하실까, 그렇지 않을까? 만들고 싶어하신다. 도대체 어디에다 만들 것인가? 우주 전체라고 하더라도, 얼음이 얼 때에도 한 점이 문제인 것처럼 어느 한 곳이 문제다. 얼음인가 아닌가 하는 경지(境地)인 것이다. 여긴지 저긴지 분별할 수 없는 자리,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어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자리,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지금이 그러한 시대이다. 어느 한 곳에 얼음이 얼었다고 할 경우에는 세계는 단번에 얼어 붙는다. 그래서 선생님은 세계 각국의 성지를 결정하였다. 여러분은 성지에서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니면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절대 권한을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지상의 기반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쭉 본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누구 이름 아래 있고 싶었겠는 가? 하나님 앞에 있고 싶었으며, 참부모님 이름 아래 있고 싶었다. 만물은 시초에 아담 해와로부터, 참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일체가 된 완성한 부부, 부모의 이름 아래 있고 싶었다. 그것이 창조 본연의 위치인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천사장의 소유인 것이다.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은 천사장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통일 사상은 참부모를 중심삼고 세계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현재의 여러분들은 적(籍)이 없는 것이다. 입적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이 입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적을 하려면 나라가 있어야만 한다. 여러분은 나라가 없는 자들이다. 살아 있지만 사탄 세계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자기의 위치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기반이 없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천민(天民)으로서 입적해야 하는 것이다. 그 주권은 커도 좋고 작아도 좋다. 유엔에서 보면 미국이든 작은 나라든 투표의 권한은 같다.
나라 없는 이스라엘
통일교회는 나라 없는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다. 제3의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떠한 수고, 어떠한 싸움을 하더라도 본향땅을 탈환하고 점령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권을 갖추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제2 이스라엘의 주권 기반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까지 고통스런 노정을 더듬어 온 그 희망은 무엇이겠는가? 그 나라로 돌아가 주권을 복귀하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국민의 위치에 서서 입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소망인 것이다. 이것을 빠른 기간 내에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내심을 가지고 이 목적에다 자기의 모든 것을 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원리적인 것이다.
입적을 해야 하는 때가 된 경우에는 나라를 초월해서 모두 돌아가고 싶어한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다. 지금 아랍과 전투를 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입적함과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 나라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입적하는 순번에 따라 조상의 그 위치가 다르다. 제1 입적자는 제1 조상의 위치에 서며, 제2는 제2, 제3은 제3의 조상이 된다. 그리고 비례적으로 수가 많으면 자연히 그 주권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권위를 이어받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어떠한 국민이 그러한 국민이 되는 것일까? 일본인이 그러한 국민이 될 것인가? 미국인이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할 때, 서로 경쟁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 나가야 하겠다. 아무리 일본이 해와 국가일지라도 가만히 있어 가지고 해와 국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뜻을 위해 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길을 넓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번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최후의 애국심인 것이다. 만일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와 같은 조건 기반이 지금의 통일교회 기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재림의 길
그러나 예수님은 가엾게 죽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골수에 잉태되어 있는 아이의 씨는 어떻게 영적 결합을 하고 그 실체적인 내용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예수님이 역사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원리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에 예수님은 재림해야 한다. 즉,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지상에 다시 오지 않고서는 이 숙명의 과제는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러기에 다시 오신다.
오시는 데에는 쫓겨 간 그러한 슬픈 입장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적 기반을 이루지 않고는 오실 수 없다. 이 때문에 세계적 기독교의 선교 문제가 추진되어 왔다. 이것이 2천년이나 걸렸다. 2천년이나 걸려서 민주주의 국가권을 이루어 놓았다. 과거 이스라엘과 로마와 같은 입장을 세계적인 대립권으로 세워 놓았다. 기독교권이 공산권과 대립하여 우위의 입장에 선 기준을 준비한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권인 것이다. 그 내적 사상, 이것은 영적 제2 이스라엘의 세계적 국가 기준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 내적, 유대적 세계 기준에 서야 할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그것은 영적 기준이다. 그 영적 기준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경우, 내적 상대 기준은 자연히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원리적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제2 이스라엘권이 영적이긴 하지만, 세계적인 기준 위에서 민주 국가, 유대 교회권, 종교권, 기독교권을 이루어 왔다. 여기에 세계적 기독교의 기대를 생각해 볼 때, 3단계의 과정을 통과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구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소생 과정을 통과해서 장성 과정을 통과한다. 이것이 신교이다. 원리적으로 볼 경우, 구교는 율법적 신앙이요 구약적 신앙이고, 신교는 신약적 신앙이다. 신교가 주장하는 것은 말씀을 주장한다.
그러면 그 말씀의 실체는 누구일까? 재림주이시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의 세계적 기반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그 실체는 무엇을 겸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면 심정이다. 그것을 아울러 갖는 실체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사에 있어서 완성 기반이 된다. 그리고 그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는 자는 심정이 일치된 내용의 기독교적인 진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통일교회인 것이다.
기독교의 사명
통일교회가 이와 같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신약적 사명을 갖고 있는 신교가 다 통일교회를 맞아 들여야 한다. 맞아 들여서 일치될 경우에는 소생, 장성, 완성이 단번에 이뤄진다. 단번에 교회가 하나가 될 경우에는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같이, 기독교와 일체가 될 경우에는 민주주의 국가 세계는 자연히 일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자연히 구원권내에 세워진다. 공산권이 근세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때는 제2차 대전 이후다. 적어도 14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왜 14년이냐? 14년까지 해결을 짓지 못할 경우에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최후의 7년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리를 통해서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한 입장을 거쳐야 할 선생님은 사명적으로 혼자인 것이다. 외톨박이다. 선조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있어서 새로이 신교에 대해 기반을 만들려고 한 것이 실패하였다. 반대를 받았다. 깜짝 놀랄 정도로 반대했다. 아우를 때려서 시작되었던 역사였기 때문에 아우를 맞아 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알지 않는다면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 의한 인습적인 교리라든가,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선생님은 교회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쫓겨난 예수님과 같은 입장인 것이다. 실체 예수님의 입장을 이어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다시 복귀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2천년의 역사를 20년으로 탕감하려고 한 것이 지금까지의 싸움이었다.
이북에 들어간 이유
그리고 탕감은 어디서부터 하는가? 이남, 남쪽에서는 할 수 없다. 북쪽으로 가는 것이다. 선생님이 북쪽으로 간 것은 사탄의 본거지로 간 것이다. 사탄의 공산권으로 갔다. 그것은 세계적인 사탄이다. 공산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가 유대교에 쫓겼을 때에 로마로 들어가 거기서 400년 동안 싸움을 함으로써 기독교의 승리권을 만든 것, 즉 그리스도의 자유의 평면적인 기반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가서 그와 같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북으로 간 것이다.
북으로 가서 공산당과 싸웠다. 거기서부터 기반을 만든 것이다. 거기서 몇 사람이고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상세히 말하자면 한이 없다. 여하간에 몇 사람을 복귀해 나왔다. 몇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위기대이다. 수적인 사위기대를 만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그 후 여러 가지 생활을 한 것이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몇 사람인가가 함께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제자와 같이 반대하고 도망쳐 버리는 입장이어서는 안 된다. 공산당의 공포권이 아무리 두렵다고는 하지만 목숨을 아껴서 모두 도망쳐 버리는 입장이어서는 안 된다. 그 환경에 있어서 몇 사람이라도 식구가 남지 않으면 안 된다. 투옥되는 그 당장부터 지상천국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감옥 안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의 세 제자는 남자들만 설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정을 이루어 서야 했다. 그러한 내용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오신 목적은 제자만을 찾아서 오신 것이 아니다. 최초에는, 제자는 방편인 것이다. 3시대의 가인이 반대한 것을 탕감하고 3시대 가인 완성의 요건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세 제자의 입장
예수님은 아벨의 입장인 것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3시대에 걸쳐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가인의 입장을, 단번에 탕감시키기 위해 세움 받은 가인의 입장이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과 같이 죽겠다고 했을 경우에는 예수님은 천상(天上)으로 가시지 않는다. 지상에서 성령과 예수가 횡적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6백년이면 세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었기 때문에, 영계로 가 버렸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 않으면 만날 길이 없다. 만일 승천하지 않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일체가 되었다면, 가인 아벨이 하나가 되었을 경우에는 하나님을 맞을 수가 있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을 맞아 영적 아담과 영적 해와가, 이른바 예수님과 성령이 일체가 되어 횡적 발전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인적인 기반은 무엇인가. 그것보다도 예수님을 대한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인고. 제1차 아담 가정 섭리에 있어서 해와를 잃은 것이 하나님의 원한인 것이다. 예수님은 태내에서, 마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을 복귀시키기 위해 오셨는데, 그것 또한 잃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3대(代)째에 그것을 복귀하려 한 것이다. 이른바 역사적 여자인 할머니, 어머니, 상대를 통해 복귀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3대 기준에 걸쳐서 여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3대권의 여자의 형을 복귀할 수 없다면 진정한 부부를 겸한 자녀를, 가인과 아벨로서 일체가 된 자녀를 맞이할 수 없다. 그러한 탕감적인 여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세 사람의 역사(役事)
세 사람의 역사가 없으면 안 된다. 그 기반과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3시대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와 국가의 조건적인 평면적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복귀는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귀한 분들이 세 분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지구(地區)를 중심삼고 기도하라. 한국 교포 몇 사람을 포함시켜서 사방 팔방으로 12명을 세워서 기도를 하라. 예수님은 그것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도 그러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다면 일본 복귀는 빨리 이룩할 수 없다.
선생님도 그러한 내용을 정하고 북한에 갔었고 가서 구해 온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그는 김씨다. 20년 전의 일이다. 20년 전이기 때문에 뜻이 있다. 세 여자와 한 남자를 데리고 남으로 와서 새로이 통일교회의 출발을 했다. 원리는 머리로 생각할 수 없다. 원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면 공산권에서부터 하나되어 함께 쫓겨와 이룬 것이 되기 때문에 누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더라도 이제부터는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해서 발전한 것이 통일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교에 쫓겨서 오셨으니 하는 수 없이 그 길을 다시 더듬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더듬어 승리를 거두려면, 그 실패의 근원적 내용을 해결한 기준에 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을 세우고 지금까지 발전해 나왔다. 가정의 기반을 중심으로 해서 줄곧 발전해 왔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반대권에서는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는 반대하는 기독교권을 제쳐놓고 아벨적 기독교권을 만들어 나온 것이 통일교회권인 것이다.
통일교회가 걸어온 복귀노정
통일교회가 둘째로 태어났지만 아벨임에는 틀림없다. 아벨이 성장해서 형님과 대결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을 다 이룬 입장이 현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20년 이전에 합했어야 할 형제의 결합을 국가적 기준에 있어서 할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그때 형제가 결합했더라면 가정은 자연 결합, 씨족도 자연 결합, 민족도 자연 결합, 국가도 자연 결합, 이렇게 한꺼번에 결합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결합 과정에 대한 탕감을 거듭해서 하고, 개인적 아벨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선생님은 많은 고생을 했다. 개인을 중심한 가정적 기반, 개인을 중심으로 한 씨족적 기반, 그리고 민족적 기반으로부터 국가적 기반으로, 이렇게 밀어내서 통일의 무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극복하게 하고 지금까지 나왔다.
이 길은 산송장의 길을 더듬어서 온 노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남은 것이 없다. 남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산송장이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국가적 기준에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기성교회가 반대하더라도 우리가 우위의 입장에 서 있다. 선생님의 전법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굴복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권과 같은 한국의 기성교회권이 굴복해 들어오고 있다면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권은 자연적으로 만나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련소를 지어 내적 교육을 하고, 나라와 손을 잡는 방식으로 양면 작전을 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교회 활동, 외적·사상적으로는 승공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승공을 목숨을 걸고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우리 작전과 결합하지 않으면 갈 길이 없는 기점(起點)에 서 있는 것이다.
복귀노정은 종의 종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생님도 감옥에서 거지와 같은 생활에서부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복귀는 거지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옥에서 복귀의 기반을 만들고 처참한 최하의 기대로부터 계속적으로 올라와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것이 국가적인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선생님은 모습을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는 국가적 탕감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적 관점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생님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승리의 사나이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횡적 기준에서 국가적 기준을 중심으로 하여 횡적 기준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횡적 기준을 일본이 시대권에 서서, 지금까지 수많은 예언자나 개척자가 희생되었다. 결국 무엇 때문에 희생되었는가. 남자(아담)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물론이지만, 결국은 해와의 나라를 찾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해와의 나라는 어떻게 감사하며, 보답해야 되는 것일까. 이러한 역사적인 배후의 관계를 가지고 현재의 일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서 혈통적 전환을 대체 누가 했다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해 왔다. 눈물겨운, 이만저만이 아닌 심정적 십자가를 지고 왔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이룩한 기준이 서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무런 공로도 없이 이를 받았다. 축복이라는 것을 통해 새로운 혈통을 받았다. 혈통 전환의 승리권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수천년의 하나님의 노고를 바탕으로 하고 실체를 중심으로 한 선생님의 노고의 생애가 덧붙여져 이루어졌다. 그 위에, 하나님과 선생님을 발판으로 해서 선 사람들이 여러분들이다. 축복받는 다는 것은 악의 혈통을 잘라 버리고 새롭게 접붙이는 것이다. 접붙임으로써 혈통이 달라지는 것이다.
자기 혈통에 대해 책임을 져라
이것은 선생님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다. 그러면 이것을 통과한 사람과 그러지 않고 영계로 간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과 우리와는 어떠한 가치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신앙의 기준에 있어서 천지의 차가 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귀중한 천적(天的)인 혜택을, 만일 그르칠 경우에는 갈 곳이 없다. 사탄도 여러분을 참소하게 된다. 사탄 자신은 장성 기준에서 사탄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완성 기준에서 타락한 사람이니까 사탄이 '나의 종이 되라'하며 심판하게 된다.
최후의 길이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 심각한 일이다. 축복을 무책임한 세파에 흘러가 버리는 것과 같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이때는 천주의 심정을 중심으로 한 귀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심신이 공히 결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의 정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완성된 남녀로서 일체가 되어야 하고, 결합되어야 하고, 사랑의 감정에 있어서도 목적관에 투철해야지 그 목적을 완성시키는 노정에서 고민한다거나 괴로와 한다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연의 세계는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심정의 세계인 것이다. 모두가 그러한 기준에 섰다면 이 지상에는 타락이라든가 고민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복귀의 길에 선 우리 부부들이 세계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심정을 항시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 그것에 충만되어 생애를 걸고 나아가는 노정에서 감사의 일념을 가지고 지내야 한다. 그것이 지금부터 축복가정이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야 할 노정인 것이다. 거기에 고생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지금까지 비밀로 쌓아 두었던 무한한 축복을 자기에게 보다 더 많이 내려 주기 위해 이러한 고생스러운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심정적인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부부는 넘쳐 흐르는 그 애정이 생활권을 타고넘고 생애를 타고넘어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되었음에 틀림없다고 하는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 다면 영원히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꿈과 같은 이야기 이지만, 전혀 뿌리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부터 그러한 가정을 향해 선생님과 약속을 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은 양손을 들고 맹세하자. 양손을 올린채로 기도하자.
기 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저희는 이제 아버님께서 사모해왔던 본연의 가정이 얼마나 엄숙한 가정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고, 그 이상만이라도 남는 가정의 경지를 향해 지금부터 손을 합하고 발을 맞추고 몸을 함께 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지금부터 깨끗한 생애를 남기고, 순수한 혈통을 남기고, 아버님의 영원한 사랑의 품 속에 힘차게 안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심정복귀의 노정을, 그것을 거듭하고, 그것을 연장시키고, 그것을 계속하는 사이에 아버님께서 어떠한 수고를 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무엇한마디도 드릴 수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모쪼록 온 일신을 당신에게 바치기로 결의하였으니, 양손을 들고 맹세하는 이 가엾은 자녀들을 깨끗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지키시고 이끌어 주신 아버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이러한 모든 천적(天的) 비밀을 가르쳐 주신 아버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옵니다. 지상의 만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서서, 저희가 생활에서 체휼할 수 있도록 내려 주신 이 은혜에 대해 보답할 것은 저희의 생애, 저희의 실체의 모든 것을 제물로서 당신의 제단 앞에 바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이러한 혜택권을 이룩해 주신 지상에 있는 참부모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몇천만 번 절하고, 입으로 외우고, 찬양하더라도 끝이 있을 수 없는 감사의 마음으로서 따르리라는 결의를 한 번 더 하는 이 순간이 되게 해주시기를 비옵니다.
올린 양손을 직접 잡으시고 금후의 격렬하고 혹은 험악한, 그리고 죄 많은 사회에 처하여, 이 길을 더듬어 가는 그 노정에 있어서 부디 서로 지켜 주고, 서로 도와주게 하옵소서. 그 상대자가 없으면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마다 서로 지키며, 시간마다 서로 염려하면서 더불어 돕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없는 친한 벗이 되고, 친한 어버이가 되고, 친한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이 큰 영광의 본거지인 사랑의 세계에 이르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자녀가 되도록 아버지께서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혈통 전환이라는 무서운 말을 지금 들었습니다. 이다지도 복귀의 노정이 어려웠사온데, 저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몸으로서 따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이룩했다고 하는 모든 영광은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었나를 알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알수록 자기 일신을 둘 곳이 없어지며, 모든 것이 하늘의 것이며, 모든 것이 부모의 것임을 생각할 뿐이옵니다.
그 이 외에는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평생을 그 신념에 싸여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 서로 돕는 부부가 되어 함께 아버지 앞에 남아질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사랑 속에서 영원한 자녀를 낳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버이로서 자녀와 하나되어 아버님께 더한층 사위기대의 사랑의 심정을 되돌려 드리는 참된 남자와 여자, 참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 상대자의 얼굴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미묘한 그 모습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님에게 정착할 내심의 심정의 약이 얼마만큼 입체적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그것이 문제인 것을 생각하고, 더불어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지팡이가 되고, 격려의 약이 되는 동시에 구원의 주가 되어 저희가 이 사탄의 세계, 미친 파도와 같은 이 악의 세계를 통과할 수 있게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재삼 바라옵니다.
지금 맹세하고 있는 이 양손을, 이 몸을, 이 부부를 깨끗게 해 주시고, 새로운 하늘 세계에 입적하는 그 약속자로서 깨끗게 해 주시옵소서. 이들이 가는 길에 어떠한 노고가 있더라도 아버님이 함께 고생하신다는 것, 아버님께서 눈물겨운 장면 장면에서 저희 이상의 쓰라림으로 체험하신다는 것을 알고, 천지가 열리지 않아도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하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당신께서 격려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오늘 이 장 시간에 걸쳐서 한 모든 말씀을 골수에 간직해서 백번 죽어도 그것을 명기하고 남기고 가는, 그리고 그것을 이룩할 수 없다면 자손만대에 유언으로 남겨서 그것을 이룩하도록 하는 진정한 조상이 되게 아버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금후에 심정적인 일체의 것은 아버님 없이 생각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오니, 새로운 가정을 창조하고 심정 세계를 개척하는 선구자로서 부끄럽지 않는 거동과 몸가짐을 갖출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바라나이다.
226쌍의 그 결말에 비극이 남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쁨만이 남는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아버님께서 세계만민 앞에 세워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참된 가족, 참된 부부가 되도록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후의 모든 것을 맡기겠사오니, 아버지시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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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