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폼페이에 가면 화산폭발유적지가 있습니다. 화산폭발로 이 도시가 매몰파괴된 역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를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베스비오 화산이 주후 79년 8월 24일 폭발하면서 화산재와 용암으로 인해 이 도시는 완전히 매몰되었습니다. 폭발 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약 2만명으로 1세기때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중의 하나였습니다. 일명 메트로폴리스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 화산폭발로 인해 그 자리에서 도시 인구의 10%인 약 2000명이 죽었습니다. 일곱 시간동안 지속된 화산폭발의 재앙은 폼페이를 완전히 뒤덮고 흔적조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주후 1592년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지 약 1500년간 폼페이라는 도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곳이 되었습니다. 1592년부터 차근차근 유적발굴을 하면서 4미터 높이의 화산 분화물더미속에 파묻힌 폼페이 사람들의 모습이 인간화석이 되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주후 1세기 화산폭발 당시 참상이 얼마나 처참했는 지 짐작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폼페이 인간화석은 고대 미술사 연구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세계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이를 끌어안은 채 죽은 어머니, 화산연기에 입을 틀어막은 채 길거리에 움츠려서 죽어간 소년, 죽음의 순간 서로 껴안고 죽어간 연인 등 다양한 인간의 모습은 전 세계에 큰 인상을 남겼고 미술, 소설작품 등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폼페이 최후의 날에 관련된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은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재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베스비오 화산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폭발했기 때문에 피할 시간조차 없어 이런 참상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나 각종 작품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보면 화산 폭발 이전에 수많은 지진과 분화구에서 피어오르는 화산 연기를 통해 언제든지 이 참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화산폭발 17년전인 62년에 대지진으로 많은 집들이 무너졌음에도 화산폭발이 일어난 그 해에도 계속 다시 건물을 짓고 도시를 개발하는 중이었습니다. 수많은 지진이 발생하며 계속 화산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라는 예고를 들어도 사람들은 오히려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도시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며 낭만적인 생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폭발 당시 폼페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잘 개발되어 있었고 돈거래가 왕성해서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큰 경제공동체였습니다. 발굴된 폼페이 도시를 보니 정말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였고 집집마다 수도가 놓여 있고 도로도 잘 포장되어 있고 큰 온천도 여러 곳에 있는 것을 보니 그 당시 세계 최대의 휴양지였던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를 무시하거나 화산이 폭발해서 자신은 죽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다 결국 참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전 정부기관등에서 인터넷이나 핸드폰 문자, 방송을 통해 경보를 보냅니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재해와 재난에 대한 각종 경고신호를 무시합니다. 이런 일을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환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우리에게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신호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신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은 정말 경고의 메시지, 위험신호에 대해 잘 깨닫고 대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 첫째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3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은 사고를 하며 감각없이 살아가면서 악한 죄를 많이 짓고 살아가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아모스는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전에 마치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을 호명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호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평범한 목자 출신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말이 아닌 신적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신적 권위를 가지고 담대하고 바르고 강하게 증거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영적인 교감이 일어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의 다른 짐승들, 동물들과는 달리 육체적인 감각뿐 아니라 영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를 깨닫고 그 신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감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백성을 책망하시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아모스 3장 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같은 평신도 선지자를 들어서 쓰십니다. 유다의 드고아 목자인 아모스가 벧엘까지 와서 심각한 예언을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모스는 정식 선지학교를 들어가서 선지자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랜시간 하나님의 영적 훈련 과정을 거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직전까지 그냥 양을 치던 평범한 목자였습니다. 이미 북쪽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나 심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입증해 주는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앞으로 행하실 모든 계획이 지금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풀어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치는 사역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3장 앞 부분에서 아모스는 “이 말씀을 들으라”며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 전체적으로 아모스 선지자가 “들으라!” 말로 시작하는 예언설교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 아모스 3장 말씀은 그 세 번의 “들으라!” 설교 시리즈 중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아모스 3장 1절 상반절만 한 번 다시 볼까요?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말씀을 들으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학교에서 어느 학생에게 친구가 찾아와서 “선생님께서 너 교무실로 좀 오라는데...”라고 말을 전한 뒤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런데 엄청 화나셨더라”.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너에 대해 화가 잔뜩 나 계시니까, 죽었다 생각하고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아모스가 외치는 “들으라!” 설교의 시작을 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이런 강한 외침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너희에게 굉장히 진노하고 계시니까 까불지 말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말씀을 전할 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혹 가벼운 징계로 끝날 지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그냥 뭐 “나는 그냥 이대로 살래”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은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분위기가 냉랭합니다. 그러면 가능한 한 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가 얼른 자 버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분위기가 좋아지면 할 말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갑자기 “용돈 올려달라” “스마트폰 바꿔달라”고 말하며 떼를 쓰며 조른다면 눈치없이 까불다가 벼락맞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말씀사역자를 통해 우리에게 찔림의 권면이 찾아올 때 영적인 깨달음이 있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신호를 보내십니다. 가장 확실한 신호는 말씀사역자를 통한 신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영적인 눈과 귀가 살아있어야 우리는 징계를 벗어날 수 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말씀사역을 통해 보내시는 하나님의 신호를 발견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3장 2절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라는 것은 아람, 모압, 암몬, 에돔이나 블레셋등은 하나님께서 모르시고 이스라엘만 알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이스라엘 족속만을 선택하셨고 ‘이스라엘 족속만 특별하게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안다’ ‘모른다’라는 지식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속깊이와 내면의 삶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안다’라는 의미는 ‘선택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기대와 사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악한 죄들을 수 없이 범하고 배은망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하게 하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광야에 나오자마자 범죄했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많은 은혜를 보여주셨는데 계속적으로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신호를 무시하며 제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며 출애굽했던 기적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역사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매일매일 먹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더 좋은 것을 달라며 불평과 불만이 앞섰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적을 보여줘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땅을 주시고 그 땅에서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도 그 땅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냈고 그들의 우상을 함께 숭배하며 그들이 믿는 이방종교에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세상의 문명에 휩쓸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계속 발견하지 않습니까? 타락한 이스라엘, 세상과 동화된 이스라엘, 우상숭배와 이방종교에 휩쓸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공동체, 복된 공동체, 은혜의 공동체를 산산조각 부숴버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안다’라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치 부부의 사랑과 같습니다. 어떤 남녀가 부부가 된다면 그 남편은 ‘오직 한 여자’만 알아야지’ ‘이 여자, 저 여자 여러 여자’를 알면 안 됩니다. 지금 표현한 ‘안다’라는 표현이 바로 ‘책임지는 사랑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어떤 여자를 안다라고 할 때 ‘안다’와 아내를 안다라고 할 때 ‘안다’의 수준은 다릅니다. 평범한 의미에서는 여러 사람을 알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지는 사랑을 맺는 관계는 오직 일대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나는 너희를 책임지는 유일한 사랑을 베풀었고 너희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너희가 겪는 모든 문제는 곧 이 관계에 비추어 보아야 이해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러 민족들 중 오직 이스라엘 족속만 택해서 사랑하실까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더 사랑할 만한 어떤 행위를 했을까요? 뭔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 능력이 있는 민족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부족한 존재,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할 모습, 너무나 나약하고 힘이 없어 스스로 뭔가를 해내지 못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존재인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백성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신명기 7장 6,7절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히브리 민족은 참으로 지저분한 민족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주변 민족중에서 너무나 작은 민족, 너무나 적은 사람들의 민족으로 불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민족들은 “아, 누구든지 하나님의 택함을 받기만 하면 저런 영광스러운 백성들이 될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달리 고집이 세고,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십 번, 몇 백 번씩 용서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겠구나”하는 용기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변화시키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정결케하시는 분이신지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작시가인 성공회 목사 존 뉴턴은 원래 아주 악독한 노예상이며 노예운반선 선장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악독했던 자신을 변화시키셨는지에 대해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죤 뉴턴은 180도 인생이 달라진 이후에도 자신이 “노예선 선장 존 뉴턴”으로 불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혜로우심을 보여줄 수 있는 명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 하나님의 택함받고 변화된 은혜의 인생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추잡하고 악했던 과거가 너무나 적절하게 잘 사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죽일 놈’, ‘죽을 놈’,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놈’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을 통해 간증했습니다. 그는 설교강단에 설 때 “나는 이렇게 목회를 잘하고 설교를 잘하고 기도를 잘합니다.”라고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단에서 외치기를 “나는 너무나 악독했던 노예운반선 선장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이렇게 변화시키신 것을 보면 이 세상에서 변화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라며 평생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증거하는 사명으로 살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도 자신의 변화된 인생을 돌아보며 원래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악된 삶, 우리의 무능한 삶, 우리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변화시킨 것에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신호에 얼마나 감격하며 눈물 흘리십니까? 그 신호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앞서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 신호를 잘 느끼시는 하나님 백성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 셋째는, 사랑의 매를 들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3장 8절입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 3장 3절부터 8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답이 명확한 9가지의 질문을 주십니다. 이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동기와 당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홉 개의 질문은 어떤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발밑에 그물을 쳐 놓으셔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야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그물에 걸리면 다행입니다. 그물에 걸린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그물에 걸려서 넘어지기 전에 미리 자제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많은 재물을 주실 때, 형통하게 하실 때 멈춰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이 잘 되고 있을 때 잠시 멈춰 서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지를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 살펴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기에 곧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경고의 신호를 보낼 때 일단 멈춰 설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모스 3장 6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성읍에서 나팔 소리가 울린다는 말씀은 전쟁이 터졌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났는데 그냥 태연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아랫 층에서 불이났서 소방차가 달려오고 화재 경고벨이 울립니다. 그런 때에 ‘내가 살고 있는 층에 불이 붙은 것은 아니니 상관없다’라며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혹여나 이 일로 인해 큰 화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빨리 피신을 하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못 들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분명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나팔을 계속 울리셨습니다. 이런 환란의 때에 큰 경고를 알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경고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답답할 지경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일어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들을 분명하게 심판하시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십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3장 7절도 한 번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아모스 3장 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반드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십니다.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문제보다 훨씬 더 치료하기 힘들고 심각한 것이 곧 이스라엘의 문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모스 3장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택함받은 백성이 그 택함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 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거룩함을 회복하게 하신 백성이 그 거룩함을 잊어버리고 더 더럽고 더 악하고 세상보다 더 타락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악한 죄악보다 더 심각한 죄는 바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할 때입니다. 교인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때가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재미나, 자랑에 빠져 있다면 더 이상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전라도 광주쪽으로 여행을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경상도 부산이 좋다던데 경상도에 가면 대구쪽 어디에 맛있는 집이 있다던데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면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라도 광주로 가고 있으면 광주에서 어떤 맛집을 가고 어떤 관광지로 가서 재미있게 보낼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빨리 생각을 바꿔서 광주에서 보낼 시간만 생각하든지 아니면 경상도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빨리 기차를 갈아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할 우리가 자꾸 세상적인 욕심, 세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부귀영화만 꿈꾸고 권력에 대한 탐욕만 가지고 교만과 거짓으로 살아간다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1장 4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장 6절도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진노의 신호, 사랑의 매의 신호를 잘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못해도 “괜찮다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라며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은 듯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진노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계신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바로 선 사람, 하나님앞에서 영적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호를 깨닫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이건 아니지라며 빨리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경고신호를 잘 분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기록된 말씀도 주시고 풀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사역자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인생의 신호를 잘 깨달아서 바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기쁨과 찬양과 감사도 하지만 회개와 돌이킴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십니까? 그리고 매일 일상속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대화하며 살아가십니까? 제대로 된 눈, 제대로 된 귀, 제대로 된 영적 감각을 가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우리의 삶에 항상 파란불, 빨간불, 노랑불 신호를 주십니다. 파란불이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시고 빨간불을 주시면서 경고하시며 멈춰있으라고 하십니다. 노란불을 보여주시며 ‘주의하며 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는 유턴신호를 주시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인생에 대한 신호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하시며 그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신호를 따라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택함받은 성도로 영적 감각이 항상 깨어있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