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성탄감사예배
구유에 누이신 구주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1,12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까지 낮아져 오신 성탄 소식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구주 나심의 큰 기쁨과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쓰면서 먼저 시대적 배경을 말합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당시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줄리우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로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원로원에 의해 제국의 초대 황제로 추대됐습니다. 오랜 정복전쟁을 종식시키고 ‘팍스 로마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내치에 주력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마의 번영을 이끌어 원로원에서는 그에게 ‘신이 보낸 구원자, 존엄자’라는 의미의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로마는 북으로는 영국, 남으로는 아프리카, 서로는 지중해, 동으로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참 평화롭고 부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인들만의 평화였고 부강이었습니다. 누군가 부와 평화를 누린다면, 그 반면에는 착취당하는 부와 평화를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로마인들이 부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했을까요? 돈이 필요했습니다. 로마 대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70개 군단이나 되는 군대를 두었는데, 이 같은 군대와 권력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는 세금을 걷기 위해 로마 전 제국에 호적명령을 내립니다. 3절. 그의 권세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호적명령이 떨어지자, 제국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생업을 다 제쳐두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식민지 유대 땅 산골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던 요셉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가이사 같은 권력자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의 눈은 가이사를 지나쳐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요셉이 호적하러 어디로 갔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요셉은 유대 전통과 관습을 따라 다윗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갔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해 머무르고 있을 때에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가까워 산통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은 예수님 당시 약 300명 정도 거주하던 곳으로 관광지가 아니었기에 여관이 없었습니다. 여기, 여관은 일반 가정집의 손님 접대용 방입니다. 이때 당시 유대 전통과 관습을 따라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많이 몰려왔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 방이 없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다락방도 여기 여관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손님들에게 내어 줄 손님 접대용 다락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어 성경도 보면, 여관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 접대용 다락방에 딸린, 가축을 돌봐주고 먹여주던 곳의 구유에 자리를 펴고 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뉘였습니다. 여기, ‘구유’는 당시 이스라엘에 말이 드물었기 때문에 주로 사용하던 나귀의 먹이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귀는 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이용하셨고, 나귀는 메시아의 겸손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나귀의 먹이통 위에 누여진 것은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겸손히 낮은 곳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포함한 세상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목자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겸손하신 예수님가 함께 할 수 있고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기록된 성경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BC 7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미가서 5장 2절은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미 700년 전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고 이것을 당시 성경 선생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라는 권력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가 우연히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이를 볼 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보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뜻을 믿을 때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유에 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에 예언된 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드디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소식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8,9).” 그 지역 모든 베들레헴 고을은 다들 잠들어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도 채택되지 않을 만큼 비천한 신분의 천대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주 탄생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바로 이런 목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잘 나고 똑똑한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 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사가 먼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낮은 곳에 임하신 것처럼, 비천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볼품없는 구유라는 장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을 통해 거대한 통치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도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들은 주의 천사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전해준 소식이 무엇입니까?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주의 천사는 목자들을 무섭게 해놓고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러면 구주의 나심이 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하나님의 슬픈 메시지를 듣게 됐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단절된 결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난 삶을 죄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 심판을 포함한 이 모든 고통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 이후, 우리 인간들은 서로 간에 관계 파괴를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장이든, 사회든, 어디서든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 이후, 인간 상호 간에도 관계로 인해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같은 파괴된 관계를 우리 노력으로는 회복시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공로를 쌓고 착한 일을 많이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인간 상호 간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는데, 중재를 담당하는 제사장과 희생제물과 성전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과 짐승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땅의 성전도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벽한 제사장과 희생제물과 성전을 보내주셨는데, 바로 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이야말로 대제사장이시고 온전한 희생제물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완벽하게 중재하시고 화해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찢겨진 것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 희생,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죄와 죽음, 심판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분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까지 오신 아기 구주 예수님의 나심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면 그 아기가 구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여기, 표적은 ‘sign’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자기희생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sign입니다. 세상의 구주라고 자처하던 로마 황제는 백마를 타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한국 대통령은 용산. 이런 것들이 세상 왕들의 sign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구주라는 sign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얼마든지 좋은 곳에서 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영광스런 가이사 황제의 보좌를 택해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특권과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황금 요람이 아닌 냄새나고 누추한 구유에 나셨습니다. 그 크고 높으신 분이, 그토록 영광스러운 분이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이는 실로 엄청난 자기 비움, 자기 비하, 겸손의 극치입니다. 하늘에서 이 땅까지의 낮아짐의 낙차 폭은 우리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죄로 죽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그 역사는 바로 이 구유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구유에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부담 없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병든 사람도, 죄수도, 심지어는 매국노 세리 레위 같은 사람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니고데모같이 당대 최고의 지성인도, 잘난 사람도 물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잘났든 못났든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구유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만 낮아지신 것이 아닙니다. 일생 병자들과 죄인들,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상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아름답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가셨습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에게서 이 겸손과 사랑, 은혜와 희생이 잘 드러납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에게서 이 표적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지만 솔직히 우리 마음은 낮아지기를 싫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좋아하고 원합니다. 많은 물질을 벌어 다른 사람들 위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입니다. 또 좋은 직장을 잡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광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낮아져 섬기려고는 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이사처럼 광이 나는 자리, 군림하는 자리를 좋아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낮은 데로 간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이 듭니다.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자리는 무익한 손해로만 생각합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무시받으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역사는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처럼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구유의 자리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를 뒤치다꺼리하기 위해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낮아져 봐야 인간입니다. 인간에서 바퀴벌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일 구유에 태어나는 것이 자존심 상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비천한 구유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유까지 낮아져 오신 구주 예수님의 탄생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메시아 탄생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앉아서 듣기만 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처럼 주님을 각자가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할 때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구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구원을 누리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가 눈에 띄었지만 쉽게 선택할 수가 없어 교통순경에게 좋은 교회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통순경은 망설임 없이 한 교회를 가리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저 교회 성도들이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다면 저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큰 표적이 되고 좋은 영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쳐놓고 세상에서 얻는 보상이나 열매로 기쁨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늘 어두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주 예수님이 내 인생의 기쁨의 근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놓치고 슬프고 어둡고 절망하는 분들이 있으면 다시금 구주 예수님을 모셔드리므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쁨을 우리의 생각에서, 말에서, 삶에서, 적극적으로 누릴 때 우리를 통해 구주 예수님이 세상 만방에 전파될 줄 믿습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난 후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서 구주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매 세상의 구주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수천 년간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영광이 됐습니다.
또 구주 탄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됐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후 세상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전쟁으로 한시도 평화로울 때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없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구주께서 오셔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주 탄생의 소식은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간 후, 목자들은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찾아 빨리 베들레헴 마을로 갔습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구유를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경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15-20).
여러분! 여러분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성탄절은 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이 땅 구유에 낮아져 오신 평화와 겸손의 예수님을 심령 깊이 모셔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고 감사하고 기뻐 찬양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