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355호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라 (눅15:11~24)
2007년 키르기스스탄 집회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훼방하는 세력 중에서 우리가 불법 의료행위를 했다는 구실로 저와 슬라바 목사를 당국에 고발했습니다. 집회 광고지에 ‘병을 고친다’고 적힌 문구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저와 슬라바 목사는 결국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판사는 저에게 의료면허를 가지고 치유행위를 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슬라바 목사가 언성을 높이며 따지려 드는 겁니다. 저는 급히 슬라바 목사를 제지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슬라바야, 너 누구 죽일 일 있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큰 소리야? 여긴 법정이야.
재판장이 ‘유죄! 땅땅땅!’하고 판사봉을 휘두르는 날이면 우린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조용히 하고 나에게 맡겨라!” 여판사였는데, 저는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읍소하듯 말했습니다. “판사님, 제가 이 나라 법을 몰라 그랬습니다. 선처해주십시오.”라고 말했더니 벌금형을 받고 추방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그 자리에서 자존심을 내세웠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여러분, 일단 살아야 미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줍니까? 물에 빠졌는데 무슨 품위와 품격이랍니까? 일단 물에서 나오고 볼 일이죠.
사실 저는 일찌감치 자존심을 기도원에 있는 저의 가묘에 다 묻었습니다. 목회하는데 자존심이 거치적거렸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교회의 어느 목사가 사고를 쳤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괜한 가십거리가 될 것 같아 저는 바로 상대를 만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얼음장처럼 냉기가 흐르는 상대 마음을 보니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를 봐서 용서해주길 바래요.”라고 했더니, 상대가 당황하며 “어서 일어나세요. 목사님을 봐서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자존심이요? 당연히 바닥을 쳤지요. 그러나 자존심 좀 깎이면 어떻습니까? 교단을 살렸는데요.
자존심이란, 스스로 자(自), 높을 존(尊), 마음 심(心)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높이 가지는 마음이며,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 자존심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자들은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믿음의 선친들도 그랬고요.
성경에서 가장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일 겁니다. 그녀는 배울 만큼 배우고, 웬만큼 사는 여인인지라 자존심도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가 딸을 고쳐줍사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경멸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를 개 취급하신 것입니다(막7:27). 그러나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7:28)라고 응수했습니다. ‘자식이 낫기만 한다면 자존심이 짓밟힌들 어떠랴?’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보시고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 아시죠? 그녀에게는 억울한 사연이 있었는데, 하필 그것을 해결해줄 사람이 안하무인인 재판관뿐이었습니다. 그런 재판관이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과부를 사람 취급이나 했겠습니까? 완전 무시했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그녀라고 왜 자존심이 없었겠습니까만, 그래도 과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그런 재판관도 과부에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원한을 풀어줬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했다고 칭송을 받은 다윗도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버린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쫓겨 다니다가 가드왕 아기스 앞에 가게 되는데, 이때 신분이 노출되자 두려운 나머지 다윗은 미친 척합니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치광이 노릇을 했습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살고 보자는 것이었지요(삼상21:12~14).
나아만 장군이 끝까지 알량한 자존심을 세웠다면 어찌 되었을까요(왕하5)? 모처럼 친구가 집에 찾아왔는데 대접할 보리떡이 없던 자가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친구를 무엇으로 대접했을까요(눅11)?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이 아말렉 군대를 치고 전리품을 취해 돌아옵니다. 모든 소유를 가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추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변명만 늘어놓습니다(삼상15:15). 사무엘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사울은 자존심 챙기기에 바쁩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15:30). 하나님이 버렸다는데, 폐위한다는데 이 상황에 자존심을 챙기고 있으니…. 그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는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가 모두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다 탕진하여 가진 것도 없고, 심지어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나올 때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자존심이 있지, 어찌 돌아가?’ 갈등했지만, 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놨습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가 종이라도 되리라 결심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래야 합니다. 탕자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나가야 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울어대야 합니다. ‘이래 봬도 내가 박산데’, ‘내가 국회의원인데’ 하십니까? 아직 덜 급하신 겁니다. 아버지 앞에 무슨 자존심입니까? 아픈데, 먹을 것이 없는데, 고통 중에 있는데, 내 앞에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무슨 자존심입니까?
구하면 다 주신다는데, 애통하면 위로 하신다는데 왜 못합니까? 요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구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 스승을 부인했지만 베드로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삽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처럼 자존심 챙기다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일단 살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야 후일이 있으니까요. 인격적으로 피투성이가 되어도, 자존심이 짓밟혀도 일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라 이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 6대 군사 강국으로, 10대 경제 대국으로 선 것은, 우리 선친들이 자존심 싹 다 버리고 선진국에 나가 원조를 받아오고, 차관을 들여오고, 눈칫밥 먹으며 기술을 배워왔기에 가능했습니다. 지지리 가난한 나라를 누가 반겼겠습니까? 먹다 남은 떡 주듯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기술과 자본을 받아와 오늘의 기초를 다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인류 구원, 곧 저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다 버리시고 중죄인이나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자존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잠시 접어두세요. 자존심이 첨병(尖兵)이 되면 망합니다. 목적한 바를 이루면 자존심은 저절로 세워집니다. 할렐루야!
자존심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라
자존심은 순간이나 꿈은 영원하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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