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일관되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힌다. 이는 일관성과 성실함을 강조하며, 신념이나 목표를 끝까지 유지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始 : 비로소 시(女/5)
終 : 마칠 종(糹/5)
一 : 한 일(一/0)
貫 : 꿸 관(貝/4)
(유의어)
수미일관(首尾一貫)
시종(始終)
시종여일(始終如一)
종시여일(終始如一)
종시일관(終始一貫)
(상대어)
용두사미(龍頭蛇尾)
시종(始終)은 ‘처음과 끝’을 말하며, 일관(一貫)은 ‘하나의 자세로 꿰뚫어 본다’ 또는 ‘변함 없음’의 뜻이다. 그러므로 시종일관(始終一貫)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태도로 나아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는, 처음엔 누구나 잘 하지만, 끝까지 잘 하는 예는 드물다는 뜻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시경(詩經)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누구나 새 일을 시작 할 때는 처음이라 긴장하고 열정을 쏟는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 가면 마음이 저절로 느슨해지고 조금은 나태해진다. 대개는 이럴 때 실수나 변수가 뒤따른다. 이때 바로 깨닫고 처음처럼 마음을 다잡아서 최선을 다하면 새롭게 질서를 잡아 나가지만 아예 포기하고 방심해 버리면 영 벼랑길이다.
최초의 긴장감 그 초심으로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쏟으면 그 결과는 당연지사이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그 차이는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느냐 일것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중국은 어지러웠다. 이상국가였던 주(周)나라가 쇠락해져서 동쪽의 뤄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때로부터 춘추시대가 시작되는데 오(吳), 월(越), 정(鄭), 연(燕), 초(楚), 진(晉), 노(魯), 진(秦) 등의 큰 나라부터 작은 읍락(邑落) 정도의 이름없는 나라까지 무려 100여 나라가 천하를 놓고 다투었다.
노(魯)나라의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과 고사성어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그러다 기원전 453년, 진(晉)나라의 유력한 귀족들인 한(韓), 위(魏), 조(趙) 3씨가 나라를 세우고 위세를 떨치면서 천하가 크게 7개 나라로 통합 재편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진(秦)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이 시기의 역사서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천하통일 대업을 눈앞에 둔 진(秦)나라 왕이 자만심을 보이자 신하가 간언을 한 기록이 있다. 위(魏)나라와 조(趙)나라를 차지하고서 자만에 빠진 왕에게 “제(齊)나라를 잃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한 대목이다.
그 의미를 새겨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시경에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누구든 무슨 일을 도모하려고 할 때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모하는 일을 마지막까지 좋게 마치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선대 왕이 그 시작과 끝을 하나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엄하게 여겨서 크게 이루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처음엔 잘하다가 뒤에 실패하거나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천하통일을 도모하는 난세에는 어땠겠는가. 몇 나라를 차지했다고 만족하고 태평하게 있다가는 곧 다른 나라에 정복당하고 만다. 진(秦)나라의 충신은 시경의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이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마무리를 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충언을 받아들인 왕이 다시 분발하여 마침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로, 서방에도 이때의 진나라가 알려져 중국이 CHINA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최초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말연시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결심을 한다. 그러나 결심을 끝까지 지켜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꾸준히 노력하려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꾸준한 노력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결과를 너무 초조하게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결과를 멀리 두고 한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이라는 말이 있다. 行(행)은 원래 ‘네거리’라는 뜻이다. 네거리는 반듯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열을 지은 길이다. 네거리에는 또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므로 行은 ‘가다, 돌아다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행백리자(行百里者)는 ‘백 리를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半(반)은 원래 ‘절반’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절반으로 여기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九十의 뜻은 ‘구십’이지만 앞에 ‘백 리’라는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구십 리’가 된다. 그러므로 반구십(半九十)은 ‘구십 리를 절반으로 여기다’라는 의미가 된다. 의미를 모으면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은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 리를 가고 나서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가 된다.
다시 말해, 100리 길을 감에는 처음 90리와 나머지 10리가 서로 맞먹는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나 처음은 쉽고 끝맺기가 어려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은 진(秦)나라 무왕(武王)의 자만심을 걱정한 신하가 시경을 인용해 충고한 데서 나온 말로, 무슨 일이든 마무리 단계가 중요하니 완성단계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다.
논어(論語)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들을 다 알고 계십니까?” 공자왈,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모두 기억하는 줄로 아느냐?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한 가지로 꿰고 있는 도(道)을 알려고 할 뿐이다.” 이른바 일관지도(一貫之道)를 대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한 가지 큰 깨달음으로 통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공자(孔子)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많이 쓰이는 시종일관(始終一貫)이나 초지일관(初志一貫) 또는 일관(一貫)되다는 말은 모두 이 일관지도(一貫之道)와 맥이 닿아 있다.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미 그전에 대단한 인연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만남이란 명제(命題)에 우연이란 만남은 결코 없다. 그 때문에 단 한번의 만남이라도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 못지 않게 소중한 것은 만남의 끝 매듭을 어떻게 짓느냐는 것이다.
처음 만날때는 신선하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지나치리만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평생 다시는 보지 안을 것처럼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경솔한 짓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시나리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처받고 소외되는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그 뜻이 시종일관한 사람을 소신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반대로 정해진 뜻이 없이 백왕흑귀(白往黑歸)한 사람을 소신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소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의 차이는 매우 크다. 소신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도 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왕후장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결국, 소신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지도자로서의 제일가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버린 채, 우왕좌왕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철새 정치인은 자신의 이해당락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쉽게 포기하거나 당적을 옮기기도 하고, 부패한 기업인은 기업의 발전보다는 부정한 축재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이렇듯 자신의 명리(名利)와 출세만을 위해 동료나 지지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도자들을 수없이 목격 하였기에,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사람이 소신과 신념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 소신과 신념이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종일관(始終一貫)
사람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사하여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사람이 있다. 이익에 따라 목숨마저 바칠 듯 충성을 맹세 했다가도 하루아침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는 경우를 더러 본다.
나이가 많아 은퇴할 때가 된 한 목수가 어느 날 고용주에게 이제 일을 그만 두고 남은 여생을 가족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고용주가 말렸지만 목수는 그만 두겠다고 했다. 고용주는 훌륭한 일꾼을 잃게 되어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집을 한 채만 더 지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목수는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일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형편없는 일꾼들을 모으고 조잡한 자재를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었을 때, 고용주가 목수에게 현관 열쇠를 쥐어주면서 “이것은 당신의 집이요. 오랫동안 당신이 저를 위해 일해 준 보답입니다” 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일이다. 만일 목수가 자기의 집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지었을 것이다.
노자는 “끝 조절을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속담에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맘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과 끝이 똑 같아야 복이 오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끝은 전부’이다.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좋고 내일은 올 것이기 때문에 좋고 오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나는 어제를 아쉬워하거나 내일을 염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오늘을 사랑하고 기뻐한다. 참 좋은 말이다.
모든 일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후회와 걱정으로 하루를 사는 것 보다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낸다면 분명 좋은 날이 곧 올 것이다.
장자가 어느 날, 군데군데 꿰맨 베옷을 입고 띠를 두르며 헤진 짚신을 신은 차림으로 위나라의 혜왕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혜왕이 물었다. “선생은 어떻게 그처럼 피폐한 모습입니까?” 이에 장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가난한 것이지 피폐한 것이 아닙니다. 선비로서 도덕을 지니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피폐한 것이지만, 옷이 헤지고 신발이 뚫어진 것은 가난한 것이지 결코 피폐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가난한 장자의 여유로움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부와 사치, 허영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의 할 일을 소리 없이 이루어 나가는 참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시종일관(始終一貫)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의 과정. 무엇이 더 중요할까. 모두 다 중요하다. 시작, 중간의 과정, 끝, 모두 잘하면 좋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시종일관(始終一貫)이라는 말이 있다.
주역의 중천건괘(重天乾卦)와 같다. 여섯 효가 모두 양(陽)이다. 강건하고 강건하다. 지극히 굳건하다. 시종일관 강건하기만 해서 좋을까. 인간은 그렇게 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반드시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얼마 전에 끝난 프랑스오픈 결승전이 생각난다. 알카라스와 즈베레프가 맞붙었다. 즈베레프가 첫세트를 이겼다. 즈베레프는 시종일관 강하게 쳤다. 변화없이 강하게만 치면 쉽게 지친다. 알카라스는 변화를 많이 줬다. 강하게 쳤다가 약하게 쳤다가 짧게 쳤다가 길게 쳤다가 빠르게 쳤다가 느리게 쳤다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어 즈베레프의 일관성을 흔들었다. 알카라스가 즈베레프와 같이 강하게만 쳤다면 졌을지 모른다. 시종일관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 부드럽고 약하기도 한 변화를 주는 것은 중요하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작과 끝은 미흡하나 중간 과정은 튼실한 경우가 있다.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와 흡사하다. 대과(大過)는 ‘크게 지나침’이다. 대과괘 시작과 끝이 음효(陰爻)이고 중간의 효가 모두 양(陽)이다. 괘사가 ‘동요(棟橈) 利有攸往(이유유왕) 亨(형)’이다. ‘동요(棟橈)’는 마룻대(대들보)가 휘다는 뜻이다. 양쪽에 걸리는 부분은 약한데 중간이 무거운 괘상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상황이라도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고 형통하다고 말한다. 중간 과정을 성실하게 하면 시작과 끝이 약하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다.
뇌산소과괘(雷山小過卦)도 중간의 1/3만 양효이고 처음의 둘과 끝의 둘이 음효이다. 처음과 끝은 부드럽고 약한 음(陰)이지만 중간의 양효(陽爻)가 둘 뿐이라 대과괘에 비해서는 가볍다. 소과(小過)는 ‘작은 지나침’이다. 소과괘의 괘사는 ‘亨利貞(형리정) 可小事不可大事(가소사불가대사) 飛鳥遺之音(비조유지음) 不宜上宜下(불의상의하) 대길(大吉)’이다. 형통하고 바르게 하면 이롭다. 작은 일은 괜찮고 큰일은 하면 안 된다. 나는 새가 울음 소리를 남길 때는 위로 가면 마땅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와야 마땅하고 크게 길하다.
소과괘 괘사 또한 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점이 흥미롭다. 소과괘(小過卦)는 중간에 강건한 두 개의 양효가 있고, 양쪽에 유순한 두 개의 음효가 있어 마치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이다. 하괘는 그침의 기운이고 상괘는 움직임의 기운이다. 일의 처음, 중간, 끝이 있을 때 중간만 튼실하다면, 욕심을 덜어내고 줄여야 길하다.
산뢰이괘(山雷頤卦)의 괘상은 처음과 끝은 강건하나 중간이 유약한 모습이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괘사가 ‘정길(貞吉) 觀頤(관이) 自求口實(자구구실)’이다. 바르게 하면 길하다. 아래턱과 위턱을 보며 입으로 먹을 음식을 스스로 구한다. 이괘(頤卦) 역시 괘이름과 괘사에서 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턱과 턱 사이 즉 입의 모양이고, 그 입모양을 보면서 그 사이로 씹어 먹을 음식을 스스로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괘는 양생(養生)과 수양(修養)을 의미한다. 중간이 약한데 끝이 좋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끝이 제대로 좋으려면 약한 중간 과정을 마지막에라도 보완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풍택중부괘(風澤中孚卦)의 괘상은 가운데 유순한 두 개의 음효가 있고, 바깥 양쪽에 각각 강건한 두 개의 양효가 있다. 내면은 부드럽고 외면은 굳센 모습이다. 중간 과정은 약하지만 시작과 끝이 튼튼한 모양이다. 큰 내를 건너서 이로울 수 있는 국면이다.
주역에는 끝을 강조한 말들이 많이 나온다. 지산겸괘(地山謙卦)의 괘사는 군자유종(君子有終)이다. 군자는 끝까지 겸손할 수 있고, 겸손해야 끝마침이 있다는 말이다. 중천건괘의 문언전에 지종종지(知終終之)라는 말이 나온다. 끝을 알고 끝낸다는 말이다.
이밖에도 마침내 길하다는 ‘종길(終吉)’이란 말은 많이 나온다. 유종지미(有終之美)라는 말이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다. 왜 유독 시작이나 중간 과정보다 끝을 더 강조할까. 끝은 결과와 성과이기 때문이리라. 마무리를 잘 해야 시작이나 중간 과정의 일들이 허사가 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좋은 끝을 맺는다는 것은 목표한 대로 끝까지 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제일 어렵기 때문이리라.
▶️ 始(비로소 시)는 ❶형성문자로 乨(시)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와 여자(女)의 뱃속에 아기가 생기는 일이 시초라는 데서 '비로소', '처음'을 뜻한다. 始(시)는 어머니 뱃속에 아이가 생기는 일, 또 한 집안의 시초, 시조(始祖), 나중에 '사물의 시작'이란 뜻으로도 쓴다. ❷회의문자로 始자는 '비로서'나 '일찍이', '옛날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始자는 女(여자 여)자와 台(별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台자는 匕(비수 비)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것으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女자가 더해진 始자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양분을 통해 삶을 시작하게 된다. 始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始(시)는 ①비로소 ②바야흐로 ③먼저, 앞서서 ④일찍, 일찍부터 ⑤옛날에, 당초에 ⑥처음, 시초(始初) ⑦근본(根本), 근원(根源) ⑧시작(始作)하다 ⑨일으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근본 본(本), 비롯할 창(創), 비롯할 조(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한 족속의 맨 우두머리 조상을 시조(始祖), 시작한 처음 무렵을 시초(始初), 시작되는 처음을 시원(始原), 어떤 일을 맡아보기 시작함을 시무(始務), 일의 처음과 끝을 시말(始末), 직업 또는 학업 따위의 일을 시작함을 시업(始業),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함을 시동(始動), 일련의 동작 운동이 시작되는 점을 시점(始點), 어떤 일이 시작되는 때를 시기(始期), 맨 처음 출발 또는 발차함을 시발(始發), 처음으로 자연 그대로 사람의 손이 가해지지 않음을 원시(原始), 처음으로 시작함을 개시(開始), 천지가 비롯된 무렵이나 만물이 시작된 때를 태시(太始), 어떤 사상이나 학설 등을 처음 내세움을 창시(創始), 맨 처음을 본시(本始),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아무리 돌아도 처음 비롯한 곳이 없음을 무시(無始),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한다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 같아서 변함없다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다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한 해의 마지막 때와 새해의 첫머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연말연시(年末年始),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으로 불변의 진리나 윤회의 무한성을 이르는 말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살고 죽는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일컫는 말을 무시범부(無始凡夫),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을 일컫는 말을 금시초문(今始初聞),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貫(꿸 관, 당길 만)은 ❶형성문자로 毌(관)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조개 패(貝; 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꿰뚫는다는 뜻을 가진 毋(관)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끈으로 꿴 돈이라는 뜻이 전(轉)하여, 금전이나 무게의 단위, 또는 '꿰뚫는다'는 뜻이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貫자는 '꿰다'나 '뚫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貫자는 毌(꿰뚫을 관)자와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毌자는 물건을 고정하기 위해 긴 막대기를 꿰뚫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꿰뚫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래 '꿰다'라는 뜻은 毌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구멍에 줄을 엮어 쓰는 엽전이라는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소전에서는 毌자에 貝자를 결합한 貫자가 '꿰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貫(관)은 (1)쾌 (2)무게의 단위(單位)의 하나 (3)본관(本貫) 등의 뜻으로 ①꿰다 ②뚫다 ③이루다 ④달성(達成)하다 ⑤섬기다 ⑥통과(通過)하다 ⑦익숙하다 ⑧이름을 열기한 문서(文書) ⑨조리(條理) ⑩돈꿰미 ⑪명적(名籍: 이름 문서) 그리고 ⓐ당기다(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꿸 관(串), 통할 철(徹)이다. 용례로는 꿰뚫는다는 뜻으로 학문에 널리 통함을 관천(貫穿), 자신의 주장이나 방침을 밀고 나가 목적을 이룸을 관철(貫徹), 행동에 따른 위엄이나 무게를 관록(貫祿), 화살이 과녁 복판에 맞음을 관중(貫中), 꿰뚫어 통함을 관통(貫通), 꿰뚫어 흐름을 관류(貫流), 꿰뚫어 들어감을 관입(貫入), 말린 청어를 관목(貫目), 본적지를 이르는 말을 관적(貫籍), 시조의 고향을 관향(貫鄕), 시조의 고향을 본관(本貫), 시조가 난 곳을 향관(鄕貫), 고향이 같음을 동관(同貫), 관향을 바꿈을 개관(改貫),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의나 방법으로 계속함을 일관(一貫), 경서 따위의 책을 감독하여 익힘을 강관(講貫), 뚫어서 통함을 통관(洞貫), 활을 쏠 때에 잇달아 과녁을 맞힘을 연관(連貫), 구멍 뚫린 엽전을 꿰어 한 뭉치로 만듦을 작관(作貫), 적의 진지로 돌격하여 들어감 또는 단숨에 일을 완성 시킴을 돌관(突貫), 가로 꿰뚫거나 자름을 횡관(橫貫), 교차하여 관통함을 교관(交貫),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려고 끝까지 밀고 나감이나 처음 품은 뜻을 한결같이 꿰뚫음을 일컫는 말을 초지일관(初志一貫),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이르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이르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일을 해 나감을 이르는 말을 수미일관(首尾一貫), 조리가 일관하여 계통이 서 있음을 이르는 말을 맥락관통(脈絡貫通), 환하게 통하여 이치를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활연관통(豁然貫通)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