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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차文化踏査 國立中央博物館(7-2); 그림과 地圖 사이
그림과 地圖 사이
(01) [그림과 지도 사이] 전시장 안내판
(02) 그림과 地圖 사이
(03)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金剛山圖卷] -作家 未詳 -朝鮮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紙本 淡彩]
金剛山과 關東地域의 實景을 그린 두루마리의 일부분으로 江陵의 慕先齋와 天然亭, 大關嶺,
五臺山 月精寺와 史庫를 그렸다. 이 그림은 檀園 金弘道가 1788년 正祖의 命으로 그린
實景山水畵를 後代의 畵家가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檀園 金弘道는 西洋畵의 遠近法을
활용하여 現實的 景觀을 그렸는데 <史庫>와 같은 일부 장면은 繪畵式 地圖의 俯瞰法으로
地勢를 알기 쉽게 표현했다. <慕先齋>는 金弘道의 元本에는 없었던 장면이 追加된 것으로
地理情報를 地圖에 가깝게 그려 넣었다. (*慕: 그릴 모 *齋: 집 재 *繪: 그림 회
*俯: 구부릴 부 *瞰: 굽어볼 감)
(04) 慕先齋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
齋號慕先, 桑梓敬止(재호모선, 상재경지) (*梓: 가래나무 재)
/ 모선재, 祖上代代로의 고향에서 삼가 공경하네.
(05) 天然亭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
亭立天淵, 上鳶下魚(정립천연, 상연하어) (*鳶: 솔개 연)
/천연정이 섰으니, 위로는 솔개요 아래로는 물고기.
(06) 大關嶺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
大關嶺路 曲曲羊腸(대관령로 곡곡양장) (*腸: 창자 장)
/ 대관령 길 굽이굽이 양의 창자 같네.
(07) 五臺山 月精寺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
月精古寺, 四圍山色(월정고사, 사위산색) (*圍: 에워쌀 위)
/월정사 옛 가람, 네 둘레 모두 산빛이네.
(08) 五臺山 史庫 -金剛山과 關東의 名勝
史庫在此, 二酉舊迹(사고재차, 이유구적) (*迹: 자취 적)
/(五臺山)史庫가 여기 있으니, 두 수레 책을 품은 유적이네.
(09) 箕城 全景[箕城圖] -작가 미상 -朝鮮 後期 -종이에 색[紙本彩色]
平壤은 중국 商나라 末期의 聖人 箕子가 건너왔다는 傳說에 따라 ‘箕城’이라는 別稱으로
불렀다. 이 그림은 주요건물의 명칭과 地名을 표기하여 地圖와 비슷하나, 낮은 水平視點으로
實景의 느낌을 잘 살렸다. 안개에 가려진 듯 지붕만 보이는 건물과 옅은 色으로 그린
아스라한 遠景은 敍情的 분위기를 자아낸다. 날카로운 筆線과 부분적으로만 짙게 채색한
手法에 18세기 이전의 古式 實景山水畵의 영향이 남아있다. (*敍: 펼 서 *箕: 키 기)
(10) 錦繡山 一帶 -箕城圖(5-1)
*箕城圖의 설명내용은 資料에다 6·25戰爭前, 中學校 2학년 때까지 약 3년을 살면서 내가
보고 느낀 점의 기억을 되살려 추가하였다.
=酒岩山(화면 맨 오른쪽, 사진이 조금 잘렸음)
大同江가에 마치 주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산으로 해발 60m이다.
=모란봉[牡丹峯]; 平壤市 北東쪽 大同江 기슭에 있는 산(해발 96m)
예로부터 이름난 名勝地로 본래 ‘錦繡山’이라고 했 산의 생김새가 마치 모란꽃처럼
생겼다고 牡丹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날부터 天下第一江山으로 이름이 높아
‘平壤八景’, ‘平壤形勝’의 거의 절반이 모란봉에 집중되어 있으며, 高句麗 이래 城, 城門,
樓亭 등 고적들이 있다. (*繡: 수놓을 수)
모란봉 북쪽에는 金日成綜合大學과 조금 더 가면 高句麗 長壽王이 國內城에서 平壤으로
遷都한 安鶴宮이 있고 이 都城인 安鶴宮을 지키는 大城山城이 있다.
=箕子墓
중국 殷나라 三仁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는 箕子가 朝鮮으로 건너와 箕子朝鮮을 세웠다는
‘箕子東來說’에 따라 後代에 추정된 무덤이다. 그러나 중국의 史書인 <史記>宋世家
杜預條에 현재의 중국 河南省 梁國蒙縣에 ‘箕子塚’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箕子東來說의
虛構性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杜: 막을 두 *預: 맡길 예 )
=乙密臺
錦繡山(牡丹峯)의 제2봉 乙蜜峯에 있는 平壤城 內城의 北將臺로, 고구려 때 쌓은
높이 11m의 築臺 위에 6세기 중엽에 처음 건립한 單層 樓亭이다. 平壤城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어 사방이 트여 乙密臺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平壤八景의 하나인
‘乙密賞春(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으로 알려져 있다. 북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
牡丹峯에는 平壤城의 전체경치를 바라보는 전망이 제일 좋다는 뜻에서 붙인 最勝臺가 있다.
乙密臺에서 綾羅島가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이고 大同江 건너 東平壤 일대가 잘 보인다.
=七星門
6세기 중엽 高句麗 平壤城 內城의 北門으로 건립되어 高麗 太祖 5년(922)에 改築하고,
朝鮮 肅宗 37년(1711)에 再築했으며, 門樓는 英祖 40년(1764)에 다시 지었다.
‘七星門’이라는 이름은 北斗七星에서 유래했으며, 平壤城 內城의 북쪽 벽이 뻗어 나간
乙密臺와 萬壽臺 사이의 낮은 지점에 있다.
=浮碧樓
錦繡山 牡丹峯의 동쪽 大同江 기슭 淸流壁 위에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風光 때문에
晋州 矗石樓, 密陽 嶺南樓와 함께 朝鮮 三大樓閣의 하나로 이름이 높다. (*矗: 우거질 촉)
高麗 때 詩人 金黃元(1045~1117)은 이곳 경치를 보고 아래 詩를 지었는데
長城一面溶溶水(장성일면용용수)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 넘쳐 흐르는 물이요
大野東頭點點山(대야동두점점산)
/ 넓은 들 동쪽에는 한 점 한 점 산이로다
그러나 七言節句는 뒤에 두 句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 해도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金黃元이 해가 지고서야 붓을 놓고 痛哭하면서 자신의 詩才가 부족한 것을
恨歎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하는 逸話가 전해지는 곳이다.
=永明寺
浮碧樓 바로 서쪽에 있는 永明寺는 高句麗 廣開土王 2년(393)에 創建하고 阿道和尙이
駐錫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宣宗 등 임금들이 大同江에 龍船을 띄우고 노닐다가
이 절에서 휴식을 취하며 獻香하였다. 1911년 西道의 本山이 되고, 1920년 31本山 중의
하나가 되어 隣近 16개의 末寺를 통괄하였다. (*獻: 드릴 헌)
=綾羅島
둘레 6km, 길이 2.7km인 大同江의 沖積島로 대동강 물결 위에 능수버들이 비단을
풀어놓은 듯 아름답다고 綾羅島라고 한다. ‘箕城八景’의 하나로 市民의 慰樂地이며,
능라도에서 바라보는 錦繡山 절벽 위의 浮碧樓와 永明寺 · 乙密臺 등의 경치가 아름답다.
(*沖: 화할 충)
(11) 平壤城 內城 一帶 -箕城圖(5-2)
=普通門
6세기 중엽 高句麗가 平壤城을 築城할 때 西門으로 세웠으며, 현 건물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平壤城 西北쪽 방향으로 통하는 關門으로 國防·
交通上 중요한 위치로 高句麗時代부터 高麗·朝鮮時代까지 重要視되었다. 現存하는 韓國
城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문으로, 고구려의 建築樣式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崇仁殿
高麗 忠肅王 12년(1325) 箕子를 제사하기 위해 건조한 祠堂인 箕子祠의 本殿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平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創建 당시에는
齋戒廳, 正門, 碑閣, 행랑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本殿만 남아 있다.
世宗 12년(1430) 重建 後 箕子殿이라고 했으며, 光海君 4년(1612) 崇仁殿으로 바뀌었다.
(*齋: 재계할 재)
=武烈祠
壬辰倭亂 당시 明나라 石星이 兵部尙書에 재임하면서 朝鮮에 援兵을 파견한 恩德에 대한
報答과 功을 기리기 위해 宣祖 26년(1593)에 세운 祠宇이다.
=永崇殿
高麗의 長樂宮 터에 세우고, 조선 太祖의 御容을 奉安했었다.
=練光亭
조선시대 樓亭으로 고구려 때 平壤城을 건설하면서 처음 세웠다. 고려 睿宗 6년(1111)
현재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세우고 '山水亭'이라고 했으며, 그 뒤 보수·재건하면서
練光亭이라고 했다. 현재의 정자는 1670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大同江가에 위치한
練光亭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예로부터 關西八景의 하나로 알려졌다.
(*練: 익힐 연)
=大同門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너비 14.25m.
練光亭 옆 大同江 기슭에 있는 大同門은 6세기 중엽 高句麗의 首都였던 平壤城 內城의
東門으로 건립했다. 高麗 初(947년)와 朝鮮 初(1392년)에 復元했으며 仁祖 13년(1635)에
再建했다. 平壤 六大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성문으로 石築 위에 重層門樓를
갖추었다. 위층 門樓에는 <挹灝樓>라는 현판을 걸었다. (*挹: 뜰 읍 *灝: 넓을 호)
=淸虛館
淸虛館에 대한 자료가 없다. 西山大師 淸虛 休靜과 관련 있는 시설인가?
(12) 大同門 서쪽일대 -箕城圖(5-3)
=東灝樓 (*灝: 넓을 호)
=貳衙(이아); 조선 시대에 監營이 있는 곳의 郡衙.
=남문
(13) 平壤城 中城일대 -箕城圖(5-4)
=蒼光山(해발 47m.)
蒼光洞 서쪽에 있는 산으로 ‘푸른 하늘 높이 빛나라’는 뜻에서 ‘창광산’이라고 했다.
高麗 仁宗 13년(1135) ‘妙淸의 亂’을 鎭壓하기 위해 官軍이 平壤城을 포위하자, 妙淸軍이
멍석으로 山을 둘러쳐 마치 곡식낟가리처럼 보이게 했는데, 官軍은 妙淸이 軍糧 등
戰鬪準備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退却했다.
이때부터 이 산에 蒼光山(창고와 같이 보이게 한 산)이라고 했다. (*蒼: 푸를 창)
=仁賢書院
宣祖 9년(1576) 平安觀察使 黃岡 金繼輝 등을 중심으로 한 地方儒林이 창건하여 箕子의
影幀을 모셨으며, 宣祖 41년(1608) ‘仁賢’이라 賜額되어 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철폐되었다.
=蘆門 (*蘆: 갈대 노)
=函溝門; 平壤城에 있던 옛 城門으로 中城의 東南門이었다. (*函: 함 함)
(14) 平壤城 外城地域 -箕城圖(5-5)
=箕城古基
=羊角圖
大同江에 있는 河中島로 綾羅島 다음으로 큰 섬으로 地形이 ‘양의 뿔[羊角]’처럼 생겨
羊角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京義線 鐵道가 이 섬을 지나면서 섬 남쪽과 북쪽에 鐵道橋가
있으며, 江 북쪽은 平壤驛, 江 남쪽은 大同江驛이다.
(15) 平壤城 全景[平壤城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所藏本
平壤城과 大同江을 8幅에 그린 병풍으로 제1폭이 缺失되었다. 平壤城은 內城과 外城으로
구획되었으며, 城壁을 따라 浮碧樓와 練光亭 등 大同江 景致를 眺望할 수 있는 樓亭이
이어져 있었다. 이 병풍은 平壤城의 市街地와 주위의 광활한 공간을 地圖처럼 묘사했다. 1
9세기에는 太平聖代를 謳歌하는 大都市를 그린 大畵面 屛風이 널리 유행했다.
배에 탄 사람들을 흰색 點으로 표현하는 등 典型的 平壤城圖에 비해 省略이 두드러진다.
이는 原本을 여러 차례 베껴 형식적으로 變貌한 결과로 보고 있다. (*眺: 바라볼 조
*謳: 노래 구 *屛: 병풍 병 *貌: 모양 모)
(16) 平壤城 全景[平壤城圖) 前半 4幅
*平壤城
長壽王 15년(427) 高句麗가 國內城에서 平壤으로 遷都하면서 王宮은 大城山 기슭의
安鶴宮으로, 뒤편에 大城山城을 築城해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이같이 平地城과
山城이 한 組를 이루는 것은 高句麗 都城의 특징이나 이런 경우, 山城으로 避亂하면
平地城은 燒失되고 만다. 그 후 平原王 28년(586) 首都를 長安城으로 옮기는데, 현재
平壤市街를 둘러싸고 있는 ‘平壤城’이다. 平地城과 山城의 長點을 종합해 築城한
平壤城은 內城·外城(羅城)·北城·中城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의 길이는 약 23km이다.
平壤城은 王宮, 山城, 庶民들이 사는 곳이 모두 城안에 있는 최초의 城이었으며, 이러한
都城의 모습은 高麗時代와 朝鮮時代까지 이어졌다.
(17) 平壤城 全景[平壤城圖) 後半 4幅
*平壤城圖 屛風 -보물 제1997호- -仁川廣域市立 松巖美術館 所藏
[平壤城圖 屛風]은 조선후기 번성했던 平壤의 모습을 8폭 병풍의 壯大한 화면에 華麗하고
纖細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平壤은 조선후기 정치·사회·문화·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로써 全圖式 邑城圖 중 가장 많이 그린 素材였다. 平壤城의 전체 風景을 畵幅에 集約해
그린 그림은 宣祖 23년(1590) 文人 梧陰 尹斗壽가 편찬한 <平壤誌>의 [平壤官府圖]에
기초한 圖像이 16세기후반에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18세기후반에는 典型이 확립되고,
19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대부분의 平壤城圖가 19세기에 그린 것에 비해,
이 ‘平壤城圖 屛風’은 1804년에 燒失된 愛蓮堂과 將臺가 묘사되어 있으며, 姑息的인
畵法 등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現存하는 平壤城圖 중
가장 먼저 제작된 작품으로 판단된다. 작품의 規模와 製作時期, 藝術的 完成度 등
여러 면에서 가치가 있으며 조선후기 邑城圖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2018.08.21. 寶物 보물 제1997호로 지정되었다. (*梧: 오동나무 오)
(18) 한양 전경[漢陽 全景] -작가미상 -朝鮮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白岳山(北岳山)이 가운데에 솟은 漢陽市街地를 그린 것으로 木覓山(南山) 자락에서 眺望한
景觀이다.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제2호) 昌德宮 仁政殿(국보 제225호)의 重層建物은
단층집 사이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景福宮 터는 숲이 우거져 있어 1868년 景福宮 重建
以前의 그림으로 보인다. 오른쪽의 三角山과 道峯山 連峯은 엷은 색으로 그려 空間感을
나타냈으며, 北岳山을 중앙에 우뚝하게 그린 構圖는 繪畵式 地圖와 類似하다. 畵家는 民家가
가득 들어선 漢陽의 都市景觀을 愛情 어린 視線으로 捕捉하였다. (*覓: 찾을 멱)
(19) 동대문 밖 마장원을 그린 지도(東大門外 馬場院全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에 엷은 색.
나라의 말을 기르던 馬場과 이를 관리하는 관청인 馬場院을 묘사한 지도로
살곶이(箭串: 현재 城東區 沙斤洞) 일대에 해당하며, 울타리 바깥의 산세는
꽃잎처럼 바깥쪽으로 눕혀 그렸는데 동쪽으로는 龍馬峰과 峨嵯山, 서쪽으로는
拜峰山 자락의 丘陵이 경계가 되며, 화면 아래쪽 近景에는 樹木이 우거진
언덕에 馬場院 건물과 華陽亭이 들어서 있고 서쪽 구릉에는 말의 건강을
기원했던 馬祖壇을 그렸으며 울타리 안의 葛浦池는 말이 목을 축이던 곳이다.
(*箭: 화살 전 *串: 땅이름 곶 *峨: 높을 아 *嵯: 우뚝 솟을 차)
馬場院은 憲宗12년(1846) 翼宗의 陵인 綏陵(사적 193호)을 天藏山에서
龍馬峰으로 遷葬하면서 폐지되었는데 이 지도는 그 이전의 地圖로 볼 수 있으며,
檀園 金弘道 實景山水畵의 영향을 받은 圖畵署 畵員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건물 묘사의 斜線透視圖法과 섬세한 線描가 돋보인다. (*綏: 편안할 수 *遷: 옮길 천)
(20) 남한산성을 그린 지도[南漢山城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京畿道 廣州의 南漢山城(사적 제57호)의 全貌를 그린 繪畵式 地圖로 漢陽防禦의 주요
據點이었던 南漢山城은 宣祖 30년(1597)에 築城하기 시작하여 仁祖 4년(1626년)까지
대대적으로 修築하였다. (*: 근거 거)
이 지도는 보는 방향에 따라 山勢와 建物의 角度를 달리 하여 그렸는데 防禦施設과 道路를
상세하게 표현하고, 山은 부드러운 輪廓線과 米點으로 山水畵처럼 표현했으며
東門(左翼門) 밖 草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黔福坪酒幕"이라 표기가 있어 당시 交通路와
商業發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西門(右翼門)과 守禦將臺가 있는 서쪽 일부는
缺失되었다. (*廓: 둘레 곽 *峴: 고개 현)
*米點: 東洋畵에서, 樹木이나 山水 등을 그릴 때 가로로 찍는 작은 점.
(21) 華城 全景[華城 全圖] -작가미상 -朝鮮 19세기 -종이에 색
水原 華城(사적 제3호)은 正祖(재위 1776~1800)의 命으로 1794~1796년에 건설했으며,
軍事要塞이면서 農業·商業中心地로 계획된 도시였다. 이 그림은 제6폭의 西將臺와 行宮을
중심으로 城郭과 華城留守府 일대를 眺望하였다. <華城城役儀軌>의 [華城全圖] 圖說의
構圖를 借用하고 城外의 風光에도 넓은 화면을 割愛했다. 성밖의 水路와 넓은 田畓은
水利施設을 정비해 비옥한 農土로 거듭난 華城 일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안의 연못과
亭子는 華城이 漢城 못지않은 文化的 都市임을 闡明하는 듯하다. 우측상단부터
지지대고개[遲遲峴]를 넘어 長安門을 지나 行宮으로 향하는 國王의 行次가 이어지며,
곳곳에서 활 쏘기와 군사훈련을 비롯한 行事들이 벌어지고 있다. 行宮 위쪽에 1801년에
건립한 正祖의 祠堂인 華寧殿이 그려있어 正祖 死後에 제작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軌: 바퀴자국 궤 *闡: 밝힐 천 *遲: 더딜 지)
(22) 華城 全景[華城 全圖] (前半 7폭)
(23) 華城 全景[華城 全圖] (後半 7폭)
(24) 함경도의 명승 열 곳[關北十勝圖] -雲溪 趙重默 -조선 1890년 -비단에 색
咸鏡道의 名勝 열 곳을 그리고 詩를 더하여 열두 폭으로 만든 병풍으로 高宗 27년(1890)
咸鏡道觀察使로 부임한 眉山 韓章錫(1832~1894)이 畵家인 雲溪 趙重默에게 그림을 注文하고
詩를 지었으며, 그 시의 글씨는 文臣인 아들 韓光洙가 썼는데 肅宗 때
藥泉 南九萬(1629~1711)이 咸鏡道의 名勝을 그림과 시로 엮은 <北關十景圖記>를 남긴
이후 繪畵式 地圖形式의 咸鏡道 實景山水畵가 유행했다. (*眉: 눈썹 미)
雲溪 趙重默은 넓은 공간을 지도처럼 俯瞰하면서도 山水는 南宗文人畵風으로 그려 함경도를
신비롭고 이상적인 공간으로 표현했는데 趙重默은 憲宗, 高宗 때의 畵員으로 1888년
咸鏡道監營에 畵師軍官으로 파견되어 <咸興本宮圖>를 그리기도 했다.
(25) [關北十勝圖] 제1, 제2폭의 題詩와 跋文
天下名山三十六(천하명산삼십육), 海中金剛萬二千(해중금강만이천).
鵬背老仙頭似雪(붕배노선두사설), 手拏華盖柱北天(수라화개주북천).
藍風一吹落羽毛(남풍일취락우모), 夸我拾歸耕桑田(과아습귀경상전).
我欲弭節躡天台(아욕미절섭천태), 霧罷霜落秋渺然(무파상락추묘연).
不如高臥游仙枕(불여고와유선침), 撫琴喚起洞龍眠(무금환기동룡면).
(*盖: 덮을 개 *夸: 자랑할 과 *桑: 뽕나무 상 *霧: 안개 무 *霜: 서리 상
*渺: 아득할 묘 *撫: 어루만질 무 *琴: 거문고 금 *喚: 부를 환 *眠: 잘 면)
庚寅秋日(경인추일), 沃素病翁醉呼(옥소병옹취호), 屬長兒光洙(속장아광수),
書于十勝圖屛(서우십승도병), 時維申卯四月之吉(시유신묘사월지길),
薔薇方盛開(장미방성개). (*屬: 무리 속 *薔: 장미 장 *薇: 장미 미)
(26) 함경도의 명승 열 곳[關北十勝圖] (제1폭~제6폭)
=제2폭; 함흥 낙민루[咸興 樂民樓]
=제3폭; 함흥 귀경대[咸興 龜景臺] (*龜: 거북 귀)
=제4폭; 함흥 천불산[咸興 千佛山]
=제5폭; 함흥 일우암[咸興 一遇岩]
=제6폭; 안변 국암[安邊 國巖]
(27) 함경도의 명승 열 곳[關北十勝圖] (제7폭~제11폭)
=제7폭; 안변 석왕사[安邊 釋王寺] (*釋: 풀 석)
=제8폭; 갑산 괘궁정[甲山 掛弓亭] (*掛: 걸 괘)
=제9폭; 명천 칠보산[明川 七寶山]
=제10폭; 경성 무계호[鏡城 無溪湖]
=제11폭; 경원 두만강[慶源 豆滿江]
(28) 河回와 安東의 명승[河隈畵屛] -淸流 李義聲 作 -조선 1828년 -종이에 엷은 색.
慶尙道 安東 일대의 경치를 그린 實景山水畵에 詩와 跋文을 더한 병풍으로 제2폭부터
陶山書院, 安東府治, 石門亭, 壽洞, 輞川, 河回, 九潭, 知保 順으로 實景을 표현했으며 16세기
文人 立巖 柳仲郢(1515~1573. 西厓 柳成龍의 父親)이 고향 安東의 山水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고, 尙徳齋 鄭惟吉의 題詩와 退溪 李滉의 跋文을 첨부했으나 戰亂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隈: 굽이 외 *跋: 밟을 발 *輞: 바퀴 테 망 *郢: 땅이름 영 *厓: 언덕 애 *滉: 깊을 황)
그로부터 약 200년 후 立巖 柳仲郢의 후손 柳喆祚(1771~1842)가 江原道 高城郡守로
재임할 때 林塘 鄭惟吉의 후손인 江原道 觀察使 經山 鄭元容(1783~ 1873)을 만나 옛 일을
떠올리며 그림과 시를 합친 병풍을 꾸미기로 하고 그림은 마침 江原道 歙谷(現 通川)
縣令으로 있던 文人畵家 淸流 李義聲(1775~1833)에게 부탁했는데 淸流 李義聲은 實景
現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地圖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俯瞰法으로 내려다 본 시점과 다소 圖式的인 景物 表現은 繪畵式 地圖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祚: 복 조 *塘: 못 당 *歙: 들이쉴 흡 *俯: 구부릴 부 *瞰: 굽어볼 감)
(29) 河回와 安東의 명승[河隈畵屛] (前半 5폭)
陶山書院, 安東府治, 石門亭, 壽洞
(30) 第一曲 安東 陶山書院
(31) 河回와 安東의 명승[河隈畵屛] (後半 5폭)
輞川, 河回, 九潭, 知保. (*輞: 바퀴테 망)
(32) 第六曲 河回
(33) 통영지도[統營地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慶尙道 統營을 중심으로 주변의 巨濟, 固城, 泗川, 南海 지역을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 본
視點으로 포착한 繪畵式 地圖로 統營은 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며 慶尙, 全羅, 忠淸의
水軍을 지휘한 統制使의 管轄이었던 곳으로, 지형은 實景山水에 가깝게 표현하고 城郭과
施設物도 꼼꼼하게 묘사했으며, 李舜臣 將軍을 모신 忠烈祠와 浦口에 정박한 거북선은
이 지역의 歷史情報를 전달하고 있다.
統營城 南門인 淸南樓 밖에 物貨廛, 米廛 등의 점포가 늘어서 있고 浦口에 배가 들이 찬
광경은 朝鮮後期 商業과 도시의 발달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며, 조선시대에는
地方軍營에 그림과 지도를 담당하는 畵師軍官을 두었는데 이 병풍은 軍事, 行政用 地圖이면서
山水畵의 역할을 겸한 작품으로 統營에 배속되었던 畵師軍官이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廛: 가게 전)
(34) 통영지도[統營地圖] (前半 4폭)
(35) 통영지도[統營地圖] (後半 4폭)
(36) 서울지도[都城圖] -작가미상 -조선,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색
朝鮮의 首都 漢城府 일대를 그린 繪畵式 地圖로 서울 漢陽都城(사적 제10호)은 북쪽으로
白岳山(北岳山), 仁王山, 駱山을 휘감고 있고 남쪽으로 木覓山(南山)을 두르고 있는 성곽이며,
지도에는 전체적으로 북쪽으로는 北漢山과 道峯山, 박석(薄石)고개까지 등장하고,
漢江 이남은 표현하지 않았는데 빈 터로 남은 景福宮과 宗廟와 이어진 昌德宮 領域이
잘 묘사했으며, 英祖 52년(1776)에 건립한 思悼世子의 사당인 景慕宮은 보이나
正祖 9년(1785)에 설치된 壯勇衛가 기재되지 않아 正祖 在位 初盤의 모습으로 보인다.
山水表現에는 謙齋 鄭敾 實景山水畵의 영향이 엿보이며 三角山에서 北岳山으로 이어지는
山勢가 잘 드러나 있는 그림으로 行政區域을 표시한 實用地圖인 동시에 王朝가 昌盛할
明堂이라는 漢陽의 象徵을 담은 작품이다. (*駱: 낙타 낙 *覓: 찾을 멱 *薄: 엷을 박
*悼: 슬퍼할 도 *敾: 기울 선)
(37) 칠보산도[七寶山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咸鏡道 明川郡에 있는 七寶山을 그린 그림으로 七寶山은 奇奇妙妙한 바위와 깎아 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름 높았는데, 이 그림의 山水 形象은 雪灘 韓時覺(1621~?) 이 그린
<北關酬唱錄>의 ‘七寶山全圖’와 유사하여 朝鮮後期에 七寶山을 그리는 일정한 法式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灘: 여울 탄 *酬: 갚을 수)
畵家가 實景에 想像을 더한 결과 千佛峯은 石佛을 닮은 수많은 바위가 쌓여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地名을 別紙에 써서 붙이고 景物을 나열한 형식은 繪畵式 地圖와 서로 통하며
畵面에 남은 틀의 흔적으로 보아 원래 여덟 폭 병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8) 칠보산도[七寶山圖] -前半部
(39) 칠보산도[七寶山圖] –後半部
(40) 일본 사절단을 접견하는 동래부사[東來府使 接倭使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東萊에서 草梁倭館에 이르는 旅程을 지도처럼 표현하고 東萊府使와 日本使節團의
接見行事를 그린 記錄畵이다. 壬辰倭亂 이전에는 日本幕府의 使節團이 漢陽으로 上京하여
國王을 拜謁했으나 己酉條約(1609년) 이후에는 草梁客舍에 모신 國王의 殿牌에 절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으며 오늘날 釜山廣域市 東萊區에서 中區에 이르는 넓은 공간을
지도와 같이 俯瞰하면서도 謙齋 鄭敾의 實景山水畵風을 반영한 부드러운 山水表現이
돋보인다. (*萊: 명아주 래 *謁: 뵐 알)
*永嘉臺: 釜山 凡一洞에 있는 조선후기 通信使가 海神祭를 지내던 樓閣.
(41) 일본 사절단을 접견하는 동래부사[東來府使 接倭使圖] (前半 5폭)
제1폭에는 輪山 아래 東萊城을, 제2폭에는 金湧山과 花池山을 배경으로 釜山鎭城과 永嘉臺를,
제3폭에는 豆毛鎭, 開雲鎭과 釜山浦 船艙을 그렸다. (*嘉: 아름다울 가 *艙: 부두 창)
(42) 일본 사절단을 접견하는 동래부사[東來府使 接倭使圖] (後半 5폭)
제7폭에는 草梁倭館 設門을, 제8폭에는 草梁客舍에서 朝鮮 國王의 殿牌에 절을 올리는
日本使臣을 묘사했으며 제10폭에는 使節團의 宴會場面을 그렸다. (*牌: 패 패 *宴: 잔치 연)
-제85차文化踏査 國立中央博物館(7-3); 우리 江山을 그리다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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