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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벨>이란 멤피스(테네시 주)의 미인이란 뜻입니다. B-17 폭격기 기장이었던 로버트 모건 대위의 동료들이 모건의 멤피스에 사는 애인인 마가렛 폴커를 빗대어 자기들이 타고 있는 폭격기에 이 애칭을 붙였다고 합니다.
[ 영화, 멤피스 벨(Memphis Belle)]
2차 세계대전중 유럽의 하늘에서 사라져간 젊은 조종사 및 승무원이 무려 20만(연합군,독일측 합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요?
영화 <멤피스벨>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자막, ‘이 영화는 1943년 여름, 유럽에서 있었던 치열한 공중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적지 후방 깊숙히 출격하는 공군 장병들은 매일 수백명씩 죽음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돌아오는 자는 자꾸만 줄어들었다.’라고 영화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화 <멤피스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 항공전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 조종사와 승무원들을 생각하며 이 영화를 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전격전으로 유럽대륙을 장악하고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하고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한 후 유럽을 완전히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영국 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독일 공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독일의 영국 공격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미국의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항공전 전세는 역전되어 독일 본토가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로 뒤덮혀 버렸습니다. <멤피스벨>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영국에 주둔하던 미 제8공군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인만큼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부지기수이고, 그 중에서도 군용기가 등장하는 전쟁 영화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멤피스 벨>만큼 항공기 메커니즘에 있어서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영화도 드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지금까지 항공기 매니아들 사이에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멤피스 벨>은 헐리우드 영화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헐리우드 영화와는 약간 다른 방식의 전쟁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까닭은 이 영화의 공동제작자인 데이비드 퍼트냄이 헐리우드로부터는 사실상 축출되다시피 한 영국 영화 르네상스의 대부이기 때문이죠.
* 기장 모건 대위
<멤피스 벨>은 전쟁을 소재로 하기는 했지만 인간적 두려움을 가진 주인공들이 이를 극복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일찌기 롤랑 조페 감독을 통해 <킬링필드>, <미션> 등을 제작했던 데이비드 퍼트냄 답게 이 영화를 하나의 휴먼 드라마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공동제작자 캐더린 와일러의 부친인 거장 윌리엄 와일러(‘벤허’,‘로마의 휴일’ 등 감독)는 실제로 멤피스벨을 타고 5회나 독일 공습에 참여하며 전쟁기록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촬영한 전시기록필름들은 영화 중간 중간에 사용되며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B-17 폭격기 승무원들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거나 대학 재학 중에 전쟁터에 온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들답게 여자와 술, 즐거운 놀이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영국 동부의 컨세트 막사에 동이 트면 승무원들은 기상 나팔을 들으면서 잠에서 깹니다. 이들은 기상하자마자 세면장에 가서 말끔히 면도를 합니다. 그것은 절대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염이 덥수룩하면 산소 마스크가 얼굴에 밀착되지 않고입김 때문에 금세 입 주위가 얼어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료들의 귀환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저 멀리서 B-17 폭격기 엔진소리가 들려옵니다. 관제탑에서는 관제사들이 망원경을 통해 기지로 귀환하는 폭격기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출격한 폭격기들의 3분의 2 정도가 귀환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좀 더 많은 폭격기와 동료들이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폭격임무를 마친 폭격기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하나, 둘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합니다. 그날 따라 평소보다 많은 폭격기들이 무사히 귀환했지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귀환기가 없자 부대원들은 모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갑니다.
그때 날아오는 한 대의 B-17 폭격기, 기지 활주로를 향해 서서히 하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나와야하는 랜딩기어가 한쪽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동체착륙을 시도하는 폭격기, 그러나 신은 그들을 외면했는지 동체착륙과 함께 폭발하여 승무원과 기체는 불타오릅니다. 이것이 <멤피스벨>의 첫 장면입니다.
<멤피스 벨>의 승무원들은 이제 단 한 번의 출격을 마치면 25회의 출격수를 모두 채우고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24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 마지막 한 번의 출격만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미 제8공군이 영국에 주둔한 이래 처음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보도하여 후방의 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시홍보팀도 출동해 있는 상태였으나 주둔 사령관은 이런 홍보팀장의 호들갑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개인의 이기심이나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나가 되어 팀을 위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싸우는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멤피스벨의 마지막 폭격 목표는 그냥 유럽이 아니라 독일 본토인 브레멘의 정유공장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은 바로 얼마 전 연합군 폭격기들이 이미 한 차례 폭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잔뜩 독이 오른 독일군들이 다시 오게 될 연합군 폭격기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출격 전날 미 제8공군의 창설 기념 파티가 열리는 자리에서 홍보팀장은 이들의 징크스를 깨는 말을 하며 분위기를 흐려놓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해진 파티장. 이런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모두들 멤피스벨의 후미 사수 클레이(해리 코닉 주니어)에게 노래를 청합니다. 이때 클레이가 부르는 노래가 <오, 대니 보이>인데 해리 벨라폰테의 노래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새로 편대에 합류한 ‘Mother Country’ 등과 함께 <멤피스벨>도 적지를 향해 이륙합니다. 드디어 적지 상공에 이를 무렵 지금까지 폭격기를 호위하고 있던 전투기들은 연료가 떨어져 기지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폭격기 편대만이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어디선가 독일 전투기들이 새카맣게 나타나 선도기를 노리며 요격해 들어오고 선도기는 추락하고 맙니다.
결국 선도기의 중책까지 맡게 되는 <멤피스벨>과 하나둘 추락하는 폭격기들. 부기장을 맡고 있던 루크(테이트 도노반)는 공명심에서 적기를 한 대라도 격추해보고 싶은 욕심에 후미 사수 클레이에게 잠시 자리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루크의 사격으로 격추되는 적기, 그러나 적기는 추락하며 신참내기인 ‘Mother Country’호의 동체 중간을 동강내고 맙니다. 추락하는 ‘Mother Country’ 의 동체에서 승무원들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천신만고 끝에 독일 영공에 접어들었으나 브레멘 상공에 많은 구름이 있어 폭격이 어려워집니다.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대공포화, 폭격기 기장과 부기장이 나란히 앉아 있는 조종석 바로 밖에서 대공포가 터집니다.
조종석 안은 갑작스런 폭발의 충격으로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버립니다. 기장과 부기장의 얼굴과 군복이 온통 붉게 물들어서 서로 비명을 지릅니다. 피격 당한 줄 알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보다는 먼저 상대방이 파편에 맞아 엄청난 출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기장이 가져온 토마토 주스가 대공포 폭발의 충격으로 터진 것이었습니다.
짙은 구름에 가려서 지상의 위치를 분간할 수 없자 기장 데니스(매튜 모딘)는 한 차례의 선회를 결정합니다. 폭격기는 전투기와 달리 선회하려면 많은 선회반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좀더 오랫동안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승무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선회합니다. 이들에게 집중되는 독일군의 대공포화. 모두들 아무 데라도 빨리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선회를 해서 폭격지점에 도착했으나 여전히 짙은 구름에 가리워진 폭격지점. 기장과 폭격수 빌(빌리 제인)는 다시 한번 선회를 하려 하지만 모두들 아무데나 빨리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가자고 아우성입니다. 기장은 승무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 곳에나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가면, 다음에 누군가가 또다시 여길 와야 해..."
승무원들은 모두 그의 말에 무언의 지지를 보냅니다. 자신들의 두려움을 억누른 채,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죠. 다시 선회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 정말 기적처럼 짙은 구름 사이 폭격 조준창 아래로 목표 지점이 드러나고 그들은 일제히 폭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탄 폭격기는 적기의 내습과 대공포화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귀환하는 멤피스 벨은 공격을 당해 승무원 1명 중상, 엔진 2기 대파라는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2기의 엔진으로 공군기지를 향해 비행하는 B-17! 기지에서는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간신히 도착한 그들의 B-17은 랜딩기어 한쪽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연료도 없고 추력도 부족하여 이제 다시 상승 할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 가까스로 착륙에 성공합니다. 결국 25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친 멤피스벨 대원들! 모두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1943년 5월 17일 멤피스 벨은 마지막 25차 출격을 끝냈다. 서유럽에서의 제공권을 잡기 위해서 25만여 대의 항공기가 싸웠고, 목숨을 잃은 승무원은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이 영화는 역사상 가장 큰 항공전에서 싸운 용감한 젊은이들에게 바친다. 그들의 국적에 상관없이."
* 마지막 장면
[ 최초로 25회의 임무비행을 마친 ‘멤피스 벨’ ]
* 실제 멤피스벨 승무원들
<멤피스 벨>은 B-17F 기종으로 유럽전선에서 1942년 11월 7일에서 1943년 5월 17일간 25회의 임무비행을 최초로 끝낸 폭격기였습니다. 운이 좋았던 기체로 승무원의 손실없이 임무를 마쳤고 또 이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무원 중 전사한 사람이 없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B-17F는 대략 3400대정도가 만들어졌었고 멤피스 벨도 그중 한 대였습니다. (B-17 기종 중 가장 많이 만들어진 폭격기는 B-17G로 8685대로 생산이 최고조에 이른 때는 하루에 10대꼴로 만들어졌었다 합니다)
B-17은 등장 당시만 해도 유례없는 물건으로 그만한 고도에서 그만한 성능을 보여준 폭격기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대를 노획해서 시험해본 독일측 평가로는 격추시키기 힘들고 잘 방어됐으며 고공성능, 직관적인 계기배치와 구성, 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 25회 임무수행을 마치고...
미군이 전쟁 중 투하한 폭탄중 40%가량을 B-17이 투하했고 자체 무장으로 수많은 상대방 전투기를 격추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튼튼한 장갑과 생존성능으로 엔진 2개가 꺼지고 주익 끝이 3/4정도 날아가도 귀환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생긴 재미있는 기록 중에는 1000천회 출격중 1회 정도는 독일군 전투기와 충돌한 채로 돌아왔다는 것도 있습니다.
전쟁초기, 미군은 이 중무장한 폭격기가 벌건 대낮에 적의 방공망 속으로 무엇이건 뚫고 들어가 노던 조준기로 정확하게 폭격하고 돌아올 것이라 철저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전에서 수많은 B-17들이 격추됐고 손상을 입은 채 간신히 귀환했으며 특히 1943년 중반,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 1차 폭격과 슈바인푸르트 2차 폭격에서 무려 120대의 B-17이 격추되는 일도 발생했었습니다.
* 대기실
결과적으로 미육군항공대의 인명피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폭격기 승무원들이었습니다. 25회의 임무비행(1945년에는 30회)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 중폭격기들이 독일의 전투의지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1943년 중반의 대 희생은 전투기의 호위를 받지 못한 주간 폭격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폭격기에게 호위 전투기가 어떤 일을 해주는지 알려주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폭격기와 같은 거리를 비행하며 독일 전투기들을 청소할 호위 전투기가 필요했고 새로운 장거리 호위 전투기는 1943년 11월에 영국에 도착하여 작전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롤스 로이스 멀린 엔진을 탑재하며 최고의 항속거리와 최상의 성능은 가지게 된 무스탕(P51)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멤피스 벨>은 기록상 25회의 임무비행 중 8대의 적기를 격추했고 10대 이상에 손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작전 중 심각한 손상을 입어서 엔진 5개를 교체하고 한번은 꼬리부분이 완파된 적도 있으나 승무원 중 누구도 죽지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살아서 고국에 돌아왔고 멤피스 벨 역시 무사히 귀국했습니다. 전후 멤피스 시는 멤피스 벨을 350달러에 사들여 전시했습니다 최근에 기금을 조성해 새로운 전시관에 보존 처리되어 전시중이라고 합니다.모건 대위는 유럽에서의 임무비행 후 B29 전환훈련을 거쳐 일본에서 폭격기를 다시 몰았고 모건의 B29에서도 역시 누구도 죽지않았다고 합니다.
모건 대위는 월남전까지 공군에 복무하며 중령으로 제대했고 아직 생존중이고 비행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건 당시 멤피스 벨에 탔던 사람 중 대부분이 2000년까지 생존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일단 영화가 사실과 틀린 부분은 실제 멤피스 벨의 마지막 폭격은 프랑스였는데 영화에선 독일이었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재미있게 하느라고 영화에서는 부상자가 발생하고 가까스로 귀환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말짱하게 귀환했습니다.
* 오른편이 기장 모건 대위
* 팁
1. 아침 식사로 나온 달걀
영화에선 스크램블 에그였던 듯 싶습니다. 기상 후 세면과 마스크가 잘 달라붙게 깨끗하게 면도한 다음 식당으로 향했고 그날 작전이 있는 승무원들에겐 분말달걀 대신 생달걀이 나왔고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건지 주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최후의 만찬이었죠.
식사 후 질척대는 길을 따라 승무원들이 출격준비와 군목에게서 기도를 받거나 행운의 마스코트를 만지작대는 동안 조종사와 부조종사, 폭격수, 항법사는 브리핑룸으로 향하게 됩니다.
2. 브리핑룸
커튼을 벗기면 유럽을 그린 커다란 지도가 있고 그 지도에는 목표와 경로, 목표 주변의 날씨, 폭격기가 만나야할 방어망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승무원들을 괴롭게 만든 건 바로 방어망을 그린 붉은색 원이었습니다.그날 목표가 발표되고 목표로 가는 길에 붉은색 원과 화살표가 많을수록 정보참모의 방어망에 대한 조언이 많을수록 그만큼 한숨소리도 커졌다고 합니다.
기상장교로 부터 기상상황을 받고나면 브리핑은 일단 끝났다고 합니다.
3. 출격직전과 복장
출격직전, 승무원들은 엄청난 두께의 옷을 껴입었다고 합니다. 속옷, 내복(고공은 매우 추우니), 비행복 상하, 전쟁중반 이후로는 전열복(기내의 플러그에 연결하여 전기를 공급받았다고 합니다),
가죽과 양모 등으로 만든 두터운 방한복, 방한장갑(맨손으로 뭔가 만지면 동상), 방한화, 구명조끼, 낙하산, 비상주머니(지도, 나이프와 줄톱, 나침반, 비상식량, 작전지역의 화폐 등등이 들어간)를 착용했고 1943년부터는 파편으로부터 몸을 지켜줄 방탄복(FLAK vest라 불린)도 추가로 입어야 했다고 합니다.
각자 마스크를 휴대하고 흔히 얼어붙어서 탈이 날 경우를 대비해 마스크 1개를 더 휴대했습니다. 마이크도 얼어붙을 것을 대비해 콘돔으로 덮어씌웠다고 합니다.
* 멤피스에 전시되어 있는 멤피스벨 폭격기
[ 미8공군 폭격기대의 최초의 출격 ]
* 하늘의 요새라고 불리우던 B-17 폭격기, 10명의 승무원과 50mm 기관포가 10~13 정이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미국 제 8공군 최초의 출격은 1942년 8월 17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12대의 B17이 동부 잉글랜드
의 영국군기지 <그랩턴 언더우드>를 이륙하여 파리 북서쪽의 루앙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4대의 영국공군 스피트파이어 전투기가 호위하는 이 양키 폭격대의 선두에는 에이커 준장 자신이 직접
탑승한 <양키두들>호가 나섰고, 320km의 이 장정에서 미군 폭격기들은 철도 조차장과 기관차의 수리
공장을 성공적으로 폭격했습니다.
엄청난 물량을 동원하여 초토화 작전을 계속하고 있는 영국공군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루앙폭격은 어린
애 장난같은 수준이라고 할만 했지만, 그만하면 데뷔전으로써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했
습니다.
이 출격에서 돌아온 에이커는 “양키 두들, 루앙으로의 성공적인 비행을 축하한다”는 해리스 장군의 축
전을 받았고, 그 며칠 뒤에는 그 축전보다 더 훌륭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정찰기가 촬영해 온 사진을 분
석한 결과, 루앙공습과 그 이틀 뒤에 결행된 에브빌 공습에서 미군들이 투하한 폭탄이 실로 놀랄만큼 정
확하게 목표물을 박살내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에 고무된 미군들은 자신들의 주간폭격이 영국군의 무차별 야간폭격에 비해 10배 이상의 파괴
효과가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해리스 역시 찰즈 포털 공군 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
고서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자신들이 거둔 작은 성공에 좀 우쭐해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
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간 폭격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사료됩
니다.”
이래서 마침내 ‘밤에 나는 토미와 ’낮에 나는 양키‘라는 공식이 만들어졌고, 그 반면 독일은 그야말로 밤
낮없이 연합군 폭격기에 시달리는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 본격적인 출격 ]
영국군이 지적한대로 확실히 미군은 ‘카우보이’와 같은 기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
쟁을 흡사 개인적인 영웅담이나 서부 개척시대의 건맨과 같은 신화를 만들어내는 무대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B17이나 B24의 방어용 기관총 사수들이 자신들의 사격솜씨를 뽐내는데
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어느 기관총 사수는 “적의 전투기가 50야드까지 접근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단 5발 이내의 초
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미국제 폭격기들이 사방
으로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튀어나온 기관총을 이용하여 독일 전투기에 맞서는 모습은 서부개척시대에
인디언과 싸우는 포장마차의 원형 방어진과 흡사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과를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버릇도 있었습니다.
10월 9일, 북프랑스의 리일 제강소를 공습하고 돌아온 B24 리버레이터 승무원들의 전과보고를 종합하
면 그날 하루에 무려 56대의 독일 전투기가 격추되었다는 계산이 나왔는데, 이날 투입된 독일 전투기는
모두 24대뿐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물론 양키 특유의 과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몇가지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미군 폭격기의
대열사이로 뛰어든 전투기를 향해 모든 사수들이 한꺼번에 기관총을 쏴대었던 데다가, 이 무렵부터 독
일군이 맹랑한 기만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집중사격을 받은 독일 전투기는 곧장 기체를 뒤집은 채로 지면을 향해 하강하거나, 꼬리에 매달이 둔 연
막통을 점화시켜 일부러 불이 붙은 것처럼 위장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독일군쪽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그들이 입은 손실은 단지 2대에 불과하여 미군 승무원들의 과장과 현실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적나라하
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미 제8공군이 폭격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8월이지만, 이들에 의한 최초의 독일 본토
공습은 그 이듬해인 1943년 1월에 들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야간에 출격하는 영국군 폭격기와는 달리, 밝은 대낮에 엄중한 대공 방위망이 둘러쳐진 독일 국경
을 넘는 일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영국군은 그동안 이 신참 우군들에게 비교
적 수월한 네델란드나 프랑스같은 독일 점령지에 대한 폭격만을 맡겨왔던 것입니다.
1943년 1월 27일, 북극해 연안의 독일도시 <빌헬름스하펜>의 폭격을 명령받은 대원들은 미군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독일본토를 공습한 부대라는 영예의 댓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빌헬름스하펜은 독일해군의 U보트 잠수함이 건조되는 해안 공업 도시로서 네델란드 국경에서 불과 64k
m밖에 떨어져있지 않았지만, 이날 아침 출격했던 91대의 B17과 B24 폭격기 중에서 목표상공에 도달한
것은 53대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도시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무려 100대 이상의 독일 전투기가
그들을 덮쳐왔던 것입니다.
미군 폭격기들이 7대의 독일 전투기를 격추한데 비해 3대의 폭격기를 상실하는 것으로 그쳤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 도시 상공을 뒤덮고 있던 두터운 구름층이 그들의 모습을
가리워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반면 이 구름은 폭격기들의 정밀조준 폭격을 방해하기도 했으므로
결국 이날의 출격은 별다른 소득도 없이 무위로 끝나버린 셈이었습니다.
다만 독일군의 요격전투기 부대로 하여금 이제 양키들이 겁도 없이 대낮에도 독일국경을 넘어오기 시작
했다는 사실과 미국제 중폭격기 B17 ‘요새’의 위세를 과시해 보였다는 정도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습니
다. 아닌게 아니라 이날 처음으로 B17과 맞서 싸웠던 Bf110전투기의 조종사 에리히 한트케 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컸다. 양키들의 비행기는 그동안 안 보아오던 영국군의 핼리팩스나 랭카스터보다도 훨씬 커서, 기
관총 몇 발로 저것이 과연 떨어져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한달 뒤인 2월 26일에 이 도시에 대한 공습이 다시 한번 시도되었지만 이번에도 7대의 폭격기가 격
추되었고, 흡사 야구 경기를 즐기는 것처럼 유쾌하고 낙천적으로 보이던 미군 폭격기 부대원들의 태도
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들도 자신들이 내던져진 이 하늘의 혈투 속으로 몰입해 들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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