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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피침기(산상왕, 동천왕, 고국원왕)때 현도성 등 요하동안은 빼앗겼지만 고구려사람들이 고조선이래 청옥이 나오는 유일한 장소인 요동반도 수암현의 수암옥을 캐고 봉상왕 7년 을불을 구한 <사략>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피침기에도 요동반도는 고구려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광산위치로 인해 침략기의 경계가 어디였는 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엔지니어이지만 제가 담기양 등 중국이 하는 짓, 즉 동북공정 등에 화가 나 고구려를 연구하다 티스토리(eom508.tistory.com)에 올려 놓은 글인 데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요동에서의 유일한 옥생산지 수암현과 고구려땅 기록
가. 공손도 침략시 산상왕대의 강역과 무늬옥(斑玉) 채굴기록
<사략> ①동천왕 원년(AD227) 9월후, 군신들이 대각궁(大角宮) 짓는 일을 계속하자고 청하여 허락하였다. 애초에 산상(山上王)이 명림전(鱣)후를 위하여 무늬옥(斑玉)을 캐내어서 이 궁궐을 짓다가 멎었었는 데, 이제 와서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이 왕후와 함께 친히 독려하였고 보옥(寶玉)과 향목으로 치장하고 그 사치함이 극에 달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대각궁 기록 없음.
<조선상고사 제6편> AD233년에 공손연(公孫淵 : 공손도의 손자)이 간사한 꾀로 위 · 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孫權)에게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신하라 일컫고, 함께 위(曹魏)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그러니까 손권이 크게 기뻐하고 사신 허미(許彌) 등으로 하여금 수천의 군사를 주어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이 허미로 위와 사귀는 미끼를 삼으려고, 먼저 허미의 보호 장사 진단(秦旦)등 60여 명을 잡아서 현도군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단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서 거짓말로, "오제(吳帝) 손권(孫權)이 고구려 대왕께 올리는 공물이 적지 않았고 또한 고구려와 맹약하여 공손연을 쳐 그 토지를 나누어 가지자는 도서(圖書)도 있었는데, 불행히 배가 큰 바람을 만나 바닷길의 방향을 잃고 요동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가 공손연의 관리에게 알려져서 공물과 도서는 다 빼앗기고 일행이 다 잡혀서 갇혔습니다. 다행히 틈을 얻어 범의 입을 벗어나 이렇게 왔습니다." 고 하였다.
# 동천왕 7년(AD233)에 공손연의 치소 양평에서 현도군 봉천성성(奉天省城)으로 보내진 오(吳)나라의 사신중에 진단(秦旦) 등이 탈출하여 고구려 동천왕에게 입조하였다. 즉, 공손연의 현도군 봉천성성(奉天省城)과 고구려와의 경계는 천산산맥 산록으로서 내지(內地)는 고구려땅이었다. 동천왕 16년(AD242) 10만병 투입에 따른 서안평점령에 대해 동천왕 20년(AD246) 관구검침입후 관구검이 먼저 물러났으며, 왕기 사망후 조위군도 낙랑으로 퇴각한 후에는 요동반도 서안과 점선(秥蟬) 등 요동통로 입구까지가 고구려와 조위간 경계였던 듯 하다.
<사략> ②동천왕 8년(AD234) 춘정월, 오의 사신에게 대각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사략> ③중천왕 15년(AD262) 정월, 그믐날에 명림(明臨)씨와 연(椽)씨 및 종척의 여인들을 대각궁(大角宮)에 모아놓고 옥모(玉帽)황후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나. 을불 도주사건이 말해주는 고구려 서변(西邊) 강역
1) 고대 수암옥의 가치
고대요동에 청옥(靑玉 또는 斑玉)이 생산되는 곳은 현재의 요녕성 안산시 수암현(岫岩縣)밖에 없다. BC 6천년경 흥륭와와 BC 5천~6천년경 강원도 문암리에서 나온 옥귀걸이(옥결, 玉玦) 등 요하문명에서 나오는 옥들의 70% 이상 대부분이 수암옥(岫岩玉, 붙임 6 참조)이며, 동천왕 원년(AD227) 수암옥을 캐내 그 재원 등을 이용하여 대각궁을 지을 정도로 국가가 관리하는 자원이었고, 요동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공손도에 요서 등 고구려 서부를 내어주고 쫓겨났던 산상왕때에도 요북(遼北, 현도군 등)과 요하 동안을 요동국(요서군, 중료군, 요동군, 산동반도 영주)에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요동반도 천산산맥 내지(內地)는 고구려땅이었던 것이다.
요하문명의 5대 입증자료로 제시되는 것이 1) 옥결(玉玦, 옥귀거리)의 분포, 2) 빗살무늬 토기의 분포, 3) 각종 적석총의 분포, 4) 비파형 동검의 분포, 5) 치(雉)를 갖춘 석성의 분포 등을 들 정도로(부록 6. 요하문명과 수암옥이 가지는 의미중 ’요하문명의 발견과 한중상고사 갈등<항공대 우실하 교수>‘ 참조) 옥(玉)은 문명지표를 나타내는 중요한 광물이었다. 그런데, 그 청옥(靑玉)이 고대요동에서도 요동반도 수암현(岫岩縣)에서만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울산신문 ‘11.22.23일>. 이 의미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대해서도 일부 선사시대와 시기 및 지역상으로 차이는 있겠으나 고인돌문화와 함께 고조선의 경계를 나타내는 주요지표들과 대부분 겹쳐진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수암옥의 잠재 매장량은 약 300만 톤으로 중국 전체에서 최고이며, 1983년 하이청(海城) 샤오구산(小孤山) 셴런동(仙人洞) 인류동혈(人類洞穴) 유적지에서 12,000년 전의 수암투섬석옥감작기(岫岩透閃石玉砍斫器, 찍개) 3점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인류가 최초로 제작 사용한 옥제품이다. <중국고대옥기(中國古代玉器)>에서는 "중국 최초의 옥기가 약 7500년 전 요녕(遼寧) 부신사해(阜新査海)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기에서 발견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문물감상 · 옥기권(中國文物鑒賞 · 玉器卷)>에는 수암옥의 수출과 중국내 소비 등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수천 년 동안 중국 백성들은 끊이지 않고 수암옥을 이용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요서(遼西) 지역에서 출토된 신석기 근기(近期) 홍산문화(紅山文化) 옥기 재료가 모두 수암옥이다. 상주(商周), 춘추, 전국시대부터 서한시대까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암옥 제품은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짧은 몇 마디의 구절은 수암옥의 고구려와 중국간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위상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
2) 을불도주사건과 서역경계에서 수암옥(岫岩玉)이 가지는 의미
아래 사서에서 보듯이 제 15세 미천왕이 되는 을불(乙弗)은 최체(最彘)에서 내려와 회합을 가지려다 점선(秥蟬)에서 잡혀 왕의 체포령에 따라 경도(京都)로 호송중에 있었으나 주장(酒醬)땅에서 과거 수암옥을 캐고 나르던 자들중에서 폭도가 되어버린 고구려 백성들에 의해 탈출하게 된다.
<사략> 봉상왕 7년(AD298) 9월, 을불(乙弗)이 최체(最彘, 蓋馬之部落, 通遼인근으로 비정)에서 점선(秥蟬, 盤山界, #낙랑군 점제秥蟬縣으로도 읽힘)으로 와서 대방(帶方)땅의 다섯부락들과 회맹(會盟)하려다가 10월에 그 곳 교위(校尉)에게 잡혀서 함거(檻車)에 실려 경도(京都)로 보내졌다. 그때 서리와 우박 등으로 농사가 안돼 백성들의 원성이 나라에 가득하였는 데도, 궁실공역은 매우 서두르고 있었다.
<사략> 봉상왕 7년(AD298) 반옥령(班玉岺;板玉岺?) 청옥(靑玉, 무늬 반옥斑玉 포함)을 서천(西川)으로 날랐는 데, 사람마다 옥판(玉板) 두 개씩을 짊어졌고 죽은 사람 역시 많았다. 옥판을 깨트려 죄를 받은 사람이 하루에 백여 명이나 되었더니, 민란이 일어나 군(軍)과 관(官)도 막을 수 없었다. 을불(乙弗)을 실은 함거가 주장(酒醬)땅에 이르자 민란자들이 함거를 깨고 을불을 풀어 주었다.
반옥령(盤玉岺) 청옥(靑玉)을 서천(西川)으로 날랐는 데,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백성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어서<삼국사기> 민란이 일어날 지경이었고, 함거가 주장(酒醬)땅에 이르자 거리를 메운 도둑들이 함거(檻車)를 깨고 을불을 풀어 주었다. 이에 상이 대노하며 도둑들을 잡아들이고 을불을 찾아내라 하였으나 방부(方夫)와 우풍(于豊)도 모두 관망할 뿐 애쓰지 않았다.
# 홍산문화의 대부분 옥은 동남쪽으로 450km 떨어진 수암옥이었다<울산신문 ‘11.12.23일>.
# <삼국사기> 동천왕 20년(AD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 <삼국사기> 동천왕 20년(AD246) 겨울 10월 이후에 위군이 패퇴하며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당시의 요남(遼南)땅인 점선(秥蟬, 盤山界, #낙랑군 점제秥蟬縣으로도 읽힘)과 대방(帶方) 일부는 고구려가 수복하였거나 중간접경처럼 점이지대(漸移地帶) 였던 것으로 보인다. 둔병(屯兵)을 관리하던 교위(校尉) 역시 고구려 태수(太守)급 수령아래 군사직급을 유지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사략> 산상왕 4년(AD200) 1월 개마(蓋馬)와 하양(河陽)이 환부(還附)했다.
# (현도군방향 남소 북쪽인) 개마와 하양성(조병산凋兵山市 인근으로 비정)이 고구려에 돌아와 귀속되었다.
<사략> 산상왕 9년(AD205) 4월 진서장군 주설(朱舌)에게 명하여 서안평(西安平)을 정벌하게 하였더니, 평호(平湖)에서 싸우다가 장군 10명이 죽었다. 7월 주곡(朱曲)을 진서대장군을 삼아서 서안평(西安平)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 AD204년 공손도가 죽은 뒤 단동 서안평을 빼앗았다.
위 기록으로 보아, 산상왕 4년 이후 고구려는 요북(遼北) 일부와 단동(丹東)에 있는 길목인 서안평(西安平)까지 나갈 정도로 요동반도 내지(內地)는 확실한 고구려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길 뺏어야 <사략>에서 보듯 미천왕이 낙랑국을 점할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개주(蓋州), 해성(海城), 요양(遼陽)을 뺏고 남쪽 요동통로의 점선(秥蟬), 평곽, 의현(棘城) 등 東에서 西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박창화가 필사한 [고구려 사략] 은 문헌학적으로 검증이 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누가, 언제 쓴 책인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이렇다고 주장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고구려 사략과 다른 책과 비교라던가, 전거를 밝히는 문제라던가, 정말 고구려 시대를 반영한 책인지가 먼저 검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무조건 삼국사기와 동일한 역사서로 보고, 먼저 지정 비정부터 하고, 이게 진짜 역사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동의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이 책이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아무리 이 책을 깊게 연구한다고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본에 건너가 원본이 되는 책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지금으로서는, 기존 사서에 있는 내용과 이 책을 비교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고, 부분적으로 이런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삼국사기의 엉터리기사를 기대어 연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상식과 경험적으로 고구려사략이 더 진실한 것인지는 연구해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이 열어줄 것을 기대하고 그들이 오픈할 때까지 그 책을 연구도 안해본다면 그 손실은 막대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