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루이즈 글릭
제 인생의 사랑이신
당신은 사라지셨고
저는 다시 젊어졌어요
몇 년이 지나자
대기(大氣)는 소녀풍의
음악으로 가득 찼고
앞뜰의 사과나무는
꽃으로 만발했지요
저는 당신을 되찾으려고
애썼어요
그게 곧 시를 쓰는 이유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영원히
가버렸어요
마치 제가 몇 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는 러시아 소설처럼
세상은 무척 풍요로웠어요
제게 속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요
사과나무 꽃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어요
더는 붉은 색이 아니지요
낡디 낡은 누르스름한 흰색이랍니다.
꽃잎들은 반짝이는 풀잎 위로
천천히 흔들리며 떠도네요
당신은 어찌하여 무력하셨나요,
그리 빨리 상징으로, 향기로
변해버리셨는지요
그러나 당신은 지혜와 고뇌의
샘으로 어느 곳에나 계신답니다.
시인이 살아온 세상은 어떠했을까? 진실이 존중되기보다 부조리와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아마도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인에게 공허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한계를 익히 내다본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도 있으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에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데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한탄하였다.
이러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요‘라는 물음을 물을 수 있고, 욥의 이유 없는 고난을 더욱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살아온 시인의 삶에서 가장 큰 극복대상은 적대적인 세상을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그런데 시인이 보기에는 이를 개입하시고 섭리하실 창조주가 침묵하시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주를 ‘도달할 수 없는 아버지’(Unreachable father)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다른 시에서 창조주는 이러한 그를 불쌍히 여겨 ‘네가 나를 그리 미워한다면, 내게 이름을 붙이는 수고할 필요가 없다. 네 말로 더 경멸할 것이 있느냐’, 또 다른 시에서 시인 자신에게 ’나의 불쌍한 영감받은 자/창조물‘이라고 하나님의 처절하신 심정을 대신 서술했다.
시인은 결국 이 시 첫 부분에서 창조주를 ’내 인생의 사랑‘으로 고백하였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과 같이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시인으로부터 멀리 가셨던 하나님은 다시 오신 것이다. 아니 이전부터 그녀 곁에 계셨지만, 그분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Parousia
by Louise Gluck
Love of my life, you
Are lost and I am
Young again.
A few years pass.
The air fills
With girlish music;
In the front yard
The apple tree is
Studded with blossoms.
I try to win you back,
That is the point
Of the writing.
But you are gone forever,
As in Russian novels, saying
A few words I don't remember-
I watch the blossoms shatter,
No longer pink,
But old, old, a yellowish white-
The petals seem
To float on the bright grass,
Fluttering slightly.
What a nothing you were,
To be changed so quickly
Into an image, an odor-
You are everywhere, source
Of wisdom and anguish.
Poem Submitted: Thursday, January 1, 2004
첫댓글 하나님을 알기에는 우리의 지적범위가 너무너무 적고 작아서 "시각장애인과 코끼리" 이야기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원해 더듬고 있습니다.
'不怨天 不尤人' 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할 수있고, 또한 사람을 탓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장로님 말씀처럼 하루 하루를 그분을 잘 알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권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시를 읽으며 세가지로 놀랐습니다. 그 하나는 이토록 쉬운 언어로 쓰인 시를 최근에 읽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 같이 신앙고백적인 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또 하나 추가한다면, 아이와 같은 순진한 고백을 담은 아름다운 시인데, 깨달음은 깊다는 점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생각나더군요. 감동있는 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물론 이 시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아니지요.
시인은 어려서부터 그리스신화에 탐닉해서인지 죽음에 관한 글을 써왔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인 "야생붓꽃(The Wild Iris)은 '욥기'와 다윗의 '시편' 중간지점이라고 합니다.
다른 시에서 시인이 창조주의 존재에 도전한 것은 자신의 엄격성과 신앙의 교리를 단순하게 수용할 수 없는 성향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에서 창조주는 시인을 불쌍히 여겨 "네가 그렇게 나를 미워한다면 내게 이름을 불러 줄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아"라고 댓구를 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던 시인은 '저녁기도'(Vespers)와 '재림'(Parousia)에서 드디어 창조주를 'Love of my life'이라고 고백합니다.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시인의 12개 시집 중 , "Faithful and Virtous Night', 'The Wild Iris', 'Averno' 시집에
가치를 높게 인정했다고 합니다.
1943년생인 시인은 지금도 예일대에서 영시를 강의하며 작품활동을 지속한다고 합니다.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