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로다’라고 비유하였다. 하루에도 한두 차례 산책하는 여의천 변에 커다란 수양(垂楊) 버드나무가 마치 클로드 모네의 ‘수련과 버드나무’ 유화 화폭처럼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몇 그루 서 있다. 물가 쪽으로 휘어져 늘어진 가지와 버들잎은 물 수면에 닿아있다. 이는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는 낯선 남자에게 물 위에 버들잎을 띄우는 사려 깊은 여인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런 여인 중에는 고려 왕건의 신혜왕후와 정릉에 묻힌 조선 태조의 신덕왕후와 같이 행운의 주인공도 있다. 아마 물고기와 오리들에게도 천천히 물을 마시라는 버드나무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이 늘어진 나무를 볼 때마다, 대개의 나뭇가지와 잎은 햇볕을 받으려고 하늘 쪽으로 향해있는데, 왜 수양이나 능수버들의 가지와 잎은 땅으로 향해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긴 가지와 무성한 잎을 위쪽으로 뻗기에는 여력이 없었을까? 긴 것은 무거워지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려지는 중력의 법칙을 따른 것인가? 그런데 회화나무에도 그 가지가 처져 내려오는 수양 회화나무가 있다. 이때 수양(垂楊)이란 ‘드리우다, 베풀다’란 뜻으로 처져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달리 넝쿨류의 등나무나 칡 나무는 혼자 자라지 못하고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자라기 때문에, 예부터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나무가 서로 엉키어 전투하는 모습을 칡과 등의 갈등(葛藤) 관계라고 한다.
이 버드나무의 이미지는 여성적이어서, 부드러움과 연약함으로 사람들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가냘픈 여인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양 버드나무는 영어로 ‘울고 있는 버드나무’(Weeping willow)이다. 이같이 ‘울고 있는 버드나무’가 가슴 애틋한 이야기의 소도구로 쓰인 때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경창과 관기(官妓) 홍랑(洪娘)의 사랑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가 북도 평사라는 벼슬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둘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최경창은 임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관에 메인 몸이라 따라나설 수 없었던 홍랑은 그를 배웅하며 이슬비 내리는 저문 날,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이런 시 한 수를 건넨다.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임에게 드리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 내릴 때 새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버들가지 하나를 두고 신분을 초월한 연인 사이의 안타까운 이별이 절절히 배어 있으나, 이 조선의 여인은 절제된 풍류의 멋을 알았고 슬픔 중에서도 품위를 끝내 잃어버리지 않은 듯하다.
이런 버들꽃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이름은 버들꽃, 즉 유화(柳花)였다. 전설에 의하면 수신(水神)인 하백(河伯)의 장녀인 유화(柳花)는 자매들과 압록강(鴨綠江)가에서 놀다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알을 낳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주몽이 나와 유화는 주몽의 어머니로 고구려건국의 신으로 추앙받았다는 설화이다. 그녀는 왜 유화라고 불리었을까? 강(江)의 신인, 아버지 하백은 장녀가 태어나자 강가에 무성히 자라나는 버드나무가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그 당시 여자 이름에는 으레 꽃이 들어있어, 관습에 따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유화’(柳花)를 거꾸로 하면 ‘화류’(花柳)가 되어 다소 퇴폐적으로 들린다. 이를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도 한다. 길가에서 흔히 만나는 버들이나 담 밑에서 핀 꽃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빗댄 말이 되니, 이처럼 언어를 도치시키면 그 상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에 고려불화대전(高麗佛畫大展) “700년 만의 해후" 전시회에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보았다. 기억하기에는 일본에서 소장 중인 것을 일시 대여하여 전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이 전시된 중국과 일본의 작품보다 한 차원 높은 품격과 색조를 띈 몽환적인 그림이었다. 전문가는,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 꽂아 두고 있는 형식이다. 이는 버들가지가 실바람에 나부끼듯이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도 귀 기울여 듣는 보살의 자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울러서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관세음보살의 물병 속에 든 감로수를 고통받는 중생에게 뿌려주기도 한다. 버들의 뿌리는 감로수를 깨끗이 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다“는 설명으로 불교에서도 버들가지가 귀한 상징으로 쓰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시편에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를 때에도 버드나무가 등장한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에게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이같이 버드나무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이고, 이 나무의 숱한 상징과 사연(事緣)도 강과 함께 나온다.
이처럼 물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라서인지, 버드나무의 잎은 11월이 되어도 여태 여름인 양 푸르다. 간혹 떨어진 잎들이 개천 바닥에 가라앉아 언뜻 물고기로 보인다. 이러한 버드나무 종류에는 50여 가지가 있고, 대강 수양버들과 능수버들이 있다고 하는데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능수버들에는 천안삼거리 흥타령 전설의 ‘능소’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주치는 여의천 변 버드나무에서, 땅으로 한없이 가지를 늘어뜨리는, 겸손의 모습을 본다. 다른 모든 나무가 하늘로 두 손을 뻗어 온몸으로 햇볕을 서로 달라고 외칠 때에도 고개를 숙여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창조주에게 감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여린 가지는 봄철의 실바람에도 가볍게 흔들리며, 여름의 폭풍 속에서도 쉬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바람길을 따라 옮겨갔다가 되돌아오는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물이, 미세한 박테리아가 바위를 가르고 깨듯이 약한 자들에게 강함을 주시는 창조주의 섭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시냇가에 심어진 버드나무는 복된 나무임이 틀림없다. 그 복 있는 나무를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가을 하늘은 더 높고, 더 맑고, 더 푸르게 바뀔 것이다.
첫댓글 목석같은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시인의 서정과 겸손을 배워갑니다. 약한 자에게 강함 주시는 창조주의 섭리에서 희망도 깨달음도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권사님의 권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