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여보세요?]
“세진 양?”
이 여사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미소를 지었다.
호연이 그렇게 나가버린 후 한동안 멍하니 있던 이 여사가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호연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러나 호연은 핸드폰을 받지 않았고
사무실에서도 없다는 말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호연이 그녀의 연락을 미리 차단했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이 여사였다.
결국 발만 동동 구르던 이 여사가 차선으로 택한 것이 세진이었다.
호연이 약혼식을 파투 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이 여사를 재촉한 것이다.
[헉, 헉.........네. 어머님.]
“아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이 여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호연이 미리 선수를 쳤고
그래서 세진이 아픈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생전 남의 걱정 따위는 할 줄 모르는 이 여사가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그만큼 이 혼사는 중요했다.
이미 세간에 다 알려진 혼사가 어그러진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뿐더러 세진이 정도면 놓치기 아까운 자리였다.
더군다나 하찮은 계집 하나에 밀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에 타격을 입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끄응. 아니에요. 아프긴요. 하아.......운동 중이었어요.
헉헉.........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그나저나 이틀 뒤가 약혼식인데
정말 아프거나 한 건 아니지?”
말은 세진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 했으나
실상 이 여사의 속셈은 그저 떠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그럼요.]
“혹시 호연이가 연락 같은 것 안 했어?”
[네, 호연 씨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요.
바쁘잖아요. 그런데 왜요? ]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내일 모레 약혼식 장에서 봐.”
이 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호연은 아무런 모션도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제깟 놈이라고 별 수 있겠어.
이 여사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세진과의 결혼만 성사된다면 여전히
호연을 손에 두고 휘두를 수 있다고 여겼다.
지금이야 호연이 멋모르고 여자에 홀려 정신을 못 차리지만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들을 놓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내게 고마워 할 테지........
이 여사는 그렇게 아직도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호연에 대해 타인보다 더 아는 것이 없는 이 여사는
그가 잠시 화가 나서 투정을 부린 것이라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한편 전화를 끊은 세진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내리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일말의 불안이
벌건 대낮부터 남자를 찾게 만들었다.
아직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스위트 룸 안에서
벌써 한 차례 질펀한 정사를 벌렸지만
상민은 그녀를 애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울렸다.
“당신, 정말 죽고 싶어?”
세진이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춥춥 소리를 내며
그녀의 여성을 할짝대고 있던 상민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를 약 올렸다.
“그래서 싫었어? 그만 둘까?”
“이, 이.........”
세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한껏 흥분한 세진과 다르게 상민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상민의 테크닉은 어떤 남자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그녀를 황홀하게 만든다는 것을.........
더군다나 이 여사와 통화를 할 때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비밀스런 쾌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것은 마치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니........
“뭐, 공주님이 원하신다면 그만 둬야지.”
“악........그만 두면 정말 죽일 거야.”
상민은 정말 그만둘 생각인지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고
결국 다급해진 그녀는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여성을 간질이듯 훑으며 지나쳤다.
“하아........”
세진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쉽사리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애원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틀 뒤엔 다른 사람의 약혼녀가 될 그녀에게
이 정도 벌은 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그녀의 애를 태워가며 고문 아닌 고문을 하도록 만들었다.
“음........제발.........어서..........”
“뭘 원하는데?”
“하아.........몰라서 물어?”
“말해. 네 입으로 듣고 싶은데?”
“악.......당신........당신을 원해........”
결국 그가 이겼다.
그녀의 성감대만 찾아다니며 그녀를 벼랑 끝으로 유도하던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애무에 무너지는 그녀를 보는 것이 그에겐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준비를 마친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상민은
자신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세진이란 여자가 자신의 소유임이 명백했다.
어느새 룸 안에는 맨살이 찰박이는 퇴폐적인 소리와 관능적인 숨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
[어머니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그래서 서로가 증오하는 사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왜 가희란 말인가..........
하필이면 왜 그 아이란 말인가........
상처받은 가희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나는 그 아이에게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이다.........
가희야.........
가희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가희를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내가 가희를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죽음보다 못한 현실 앞에
그녀를 홀로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텐데........
아름답게 피어나야 할 꽃 봉우리를 채 피지도 못하도록
잔인하게 꺾어 버린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는 것을 깨달아
죽도록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추악한 오해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는 처절한 희생양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진실을 알았더라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려버린 나는........
나는 그녀에게 무엇으로도 갚을 길 없는 죄를 지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용서하지 말아주소서............
착한 그녀가 나를 용서한다 하더라도
죄 많은 이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마소서..............
무참히 찢기고 상처받아 아파하는 그녀를 대신해,
진실을 외면한 채 못나게 돌아서버린
이 사람을 벌 하여 주소서.............]
선우가 나간 뒤 호연은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호진의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왜 갑자기 일기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전에 호연은 그 일기를 끝까지 읽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 며칠 갑자기 쏟아지는 일들을 겪으며
형이 과연 진실을 알고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형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기 직전 양도된 주식과 가희가 납치된 장소 근처에서
사고가 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래서 무언가가 더 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또다시 펼쳤던 일기장을 넘기는 호연의 손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진작 이것을 끝까지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이렇게 모든 진실이 들어 있었는데........
형의 집착으로 망가지고 두려움에 떨었을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치졸한 오해로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채
혼자 떨었을 그녀에 대해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희는........
그가 상처 입힌 그의 여자는..........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여자였다.
화가 날 정도로 미련퉁이 같은 여자였다.
하다못해 지렁이마저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이 여자는 그토록 무참히 짓밟히면서도
단 한 마디의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여자였다.
찢기고 핍박받은 상처를 그 여린 가슴으로
그저 끌어안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런 여자였다.
그래서 상처 입힌 그가 더 아프게 만들었던 여자였다.
[사랑하는 동생 호연아...........
나는 지금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떠난다.
그전에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이렇게 너에게 몇 자 남긴다.
만약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이것은 너에게 전해지지 않겠지........
너에게 이것이 전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자신이 없구나.........
호연아........내 동생.........
너는 누가 뭐라 해도 내 동생이야........
알고 있는 거지?
훗,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에 떠오르는 사람이
너라서 참 다행이구나.
호연아........이 형의 마지막 부탁 하나 들어주겠니?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가희.........
그 불쌍한 아이를 부탁하마........
나 때문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 아이에게
난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죄를 지었어.
그런 그 아이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게 나를 대신해 지켜주렴........
내 욕심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이.........
상처는 지울 수 없겠지만..........
앞으로는 행복할 수 있도록.........
그래줄 수 있니?
너 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구나.........
부탁하마.........
호연아..........
예전의 나는 모든 것을 증오하며 저주했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 너도 힘들어 하지 마라.........
자책도 하지 말고........
난 너도........가희도........행복했으면 좋겠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내가........이런 욕심을 부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너와 가희,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제는 가 봐야 할 시간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아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테니까.........
호연아........
네가 있기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갈 수 있는 거다.........
고맙고 미안하구나...........]
형.......미안해..........
가희야..........미안하다.........
결코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미안해.........
하지만 가희야.........날 용서하지 마라..........
절대 나 같은 놈 용서하지는 마라.........
일기장의 맨 마지막 장에 적혀 있는 편지를 읽으며 호연은
참았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호진이 죽은 것은 결국 호연의 탓이었다.
만약 호연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호진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자신 때문에 죽은 호진의 복수를 가희에게 한 것이다.
결국 가장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호연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껴야 했다.
“가희야.........”
호연은 가희의 사진을 집어 들며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사진 속의 가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랑한다고 말 할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
내가 오해한 거라고 한 마디만 해 주지 그랬니.........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진실을 알려주지 그랬니........
힘들다고 투정이라도 부리지..........
“왜!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니? 왜!”
호연은 눈앞에 가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가희라면........
그녀라면 호연의 이런 어이없는 투정조차 받아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답을 한 건 그가 그토록 원하는 가희가 아니라 하성이었다.
잔뜩 힐난하는 음성에 사진에 박고 있던 고개를 치켜 든 호연의 눈에
언제 왔는지 하성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가희가 너에게 변명을 했다면..........넌 그 말을 믿었을 거 같아?”
맞는 말이었기에 호연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가희가 변명을 했더라면..........
오히려 더 몰아붙이고 괴롭혔을 그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더욱 경멸을 했을 그 자신을........
호연은 비참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그 자신과 그의 집안은..........
행복했어야 했을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고 망가뜨린 것이다.
그제 서야 그는 형 호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으로라도 사죄를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얼음왕자 강 호연이 언제 이렇게 울보가 됐냐?”
하성의 말에 호연은 하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언뜻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어디에도 비웃음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하성의 눈에 담긴 것은 이해였고 포근한 위로였다.
그것이 호연은 너무나 고마웠다.
“병원엔 언제 갈 거냐?”
“내가 병원에 가도 되는 걸까.........”
선우에게서 연락을 받은 하성은 기가 막혔다.
지수가 왔던 일이며,
호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선우의 사견까지
이미 모든 정황을 전해 들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와 보게 된 호연의 모습에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빤히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던져본 말에 대한 호연의 반응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병신자식! 가희를 깨울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란 걸 모르는 거냐?
내가 너라면........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가희 앞에서 용서를 빌 거다.”
“정말 가도 되는 걸까........
나 때문에 그렇게 된 여자...........”
사랑에 빠진 남자는 소심해 진다고 했던가..........
그러나 하성이 보는 호연은 결코 소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랑에 서툰 것뿐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여자가 호연으로 인해 상처받은 것을 견딜 수 없기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하성은 답답했다.
어쩌면 최대의 피해자는 호연일 텐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알지 못하는 호연을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저대로 자책만 하다 망가지게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호연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대로 놔두면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은 분명했다.
지켜주고 싶었다.
호연과 가희를.........
그들의 사랑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성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호연을 다그쳤다.
더 이상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걸 말이라고 해?
너 혹시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미안해서 헤어지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너 바보야?”
“하지만 형.........”
“사랑하잖아. 아냐? 내가 보는 넌 가희 사랑해. 맞지?”
호연은 정곡을 찌르는 하성의 말에 움찔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희를 누구보다........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가희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 때문에 상처받고 아픈 그녀를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또다시 힘들게 만들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정말 사랑한다면........보내야 한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할 수 있도록.........
그것만이 내가 그녀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아니,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데........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는데.........
함께 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녀를 보내놓고 견딜 수 있겠어?
절대 아니다.
사랑하니까 잡아야 해.
그녀는 이미 내 여자다.
내 사랑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갈등........
치열한 갈등이었다.
호연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악마와 천사가 동시에 부르짖고 있었다.
팽팽하게 맞서는 두 마음속에서
그 무엇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호연을 바라보던 하성은
인생 선배로서 충고를 했다.
기껏해야 4년을 더 산 것 뿐이지만 적어도 사랑에 관해서는 선배였기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준다는 건 다 개소리야.
그건 미친놈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사랑하면 잡아! 미안하면 살면서 갚아!
그럼 되는 거야.
가희가 널 싫다고 하는 게 아니면 가희 옆에서 죄 값 치러.
그게 맞는 거야.”
어쩌면 그건 하성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어이없이 보내야 했던 자신의 사랑에 대한 참회일 수도 있는 말을
하성은 호연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서툰 초보 호연이 깨닫기를 뿐이었다.
그런 하성의 마음이 호연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호연은 이토록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들어버린 스스로를 저주했다.
가희에게 향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의 미련함을 탓했다.
“형,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어..........
귀가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차라리.......차라리 숨이 멎어버렸으면 좋겠어.
할 수만 있다면 쓸모없는 내 심장을 떼어내 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이렇게 아프지 않겠지? 응? 말해봐, 형.”
가희를 제대로 보려하지 않았던 쓸모없는 눈이..........
진실을 알려하지 않은 귀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쓸모없는 심장 따위..........
모두 망가졌으면 좋겠어.........
그랬으면 좋겠어.........
하성은 안타까웠다.
호연의 고통과 절규와 처절한 몸부림을 그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경우는 다르지만 그도 이미 오래전에 겪었던 일인 것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성은 호연과 가희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성은 자신의 진심을 모두 담아 호연에게 충고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나를 버려야 한다는 거다..........
내 마음 모두 주고 그 빈자리에 대신 그 사람을 채워 넣는 거야.
괴변이라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마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날이 있을 거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뒷감당은 모두 내가 해줄 테니........”
하성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뒷감당을 대신 하겠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할 호연이 아니었다.
하성은 지금 호연에게 더 이상의 후회를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자신이 막아줄 테니
더 이상 망설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호연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눈빛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뒷감당을 해주겠다는 하성의 말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 쯤이야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또 다른 후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가희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세상에는 지금 당장 죽더라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있어.
가희........
내게 있어서 그런 의미는 가희뿐이다.........
단 한 번도 정직하게 귀 기울여 보지 못했던 마음의 소리..........
애써 무시하기만 했던 그 소리가 호연을 채근하고 있었다.
호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악.........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때 하성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직감적으로 치고 빠져야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있는 하성은 이쯤에서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실로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너 인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모든 결정권은 네가 아니라 가희에게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네가 가희를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거야 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찾는 경우 아냐?
받아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가희에게 달린 건데
너 혼자 결론 내고 이러는 거 너무 이기적인 거잖아?
정말 가희를 위하는 게 뭔지 아직 몰라?
여기서 죽을 상 할 게 아니라 가희 앞에서 용서를 빌고 처분을 기다리란 말이다.”
순간 호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호연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는데.........
가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고민들은 또 다른 이기심이었던 것이다.
가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당연한 권리마저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아아, 끝까지 오만했음이던가...........
호연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호연은 자신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성의 말처럼 가희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희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리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리라.........
그녀가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더라도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떠나게 하리라.........
오만하고 어리석은 한 사내가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그것만이라도 전하리라.........
가희야,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한때나마 날 사랑했던 너의 마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알게 해 주고 싶다.........
너 혼자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 해주고 싶다........
가희가 받아준다면........
가희 옆에서 평생 그녀에게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파에서 그녀를 지키며 그녀 하나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비로소 호연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비록 그녀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가희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토록 처절했던 마음의 갈등을 접은 호연은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형.”
“자식! 고마우면 그만큼 가희한테 잘해, 인마.”
호연의 얼굴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하성도 호연을 따라 웃었다.
이제는 가희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다만 지수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몰라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쯤은 여러 사람 속 썩인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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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량이 조금 많았네요.......
제가 작업하는 분량으로 치면 이틀 분인데요.......
사실은 어디서 끊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다 올려 버렸어요.....
드디어 호연이가 맘을 바꿨네요....
이제 가희만 깨어나면 되겠네요......
사실은 좀 더 괴롭히고 싶었지만.....차마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
호연이가 마음을 바꿔서 기쁘세요???
같이 기뻐해 주셨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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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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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뻐요 ^^ 자폭이 아니라 참 다행이라는 ㅎ
그렇죠? 헤헤~기쁘시다니 저두 좋네요......^^*
호연이 정신을 차려서 제가다 좋습니다...ㅋㅋㅋㅋㅋ
진작 이렇게 못해서 죄송해요.......^^*
ㅠㅠ 넘잼나염. 호연이 ..랑 가희랑 잘돼어야할텐데... ㅜㅜ 아무도 방해말고..ㅠㅠ
음....그렇긴 한데.....악인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둘이나 되는 이유로......음.......
짱잼잇어여~
재미있으시다니 다행이네요....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