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청보리밭에서
들판은 이제 황량한 색깔로 바뀌어 긴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시야를 시원하게 할 대상이 별로 없다. 오직 한 곳, 이 동네 공원 꽃밭이 푸르다. 청보리가 한 뼘의 키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화단은 공원의 대표선수인 기함(旗艦, flagship) 역할을 한다. 봄이면 유채꽃을, 여름엔 튜립꽃을 그리고 늦가을이 되면 청보리로 철 따라 그 씨앗을 갈아 심어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야말로 전천후로 다양한 꽃과 식물을 탄생시킨다. 실로 땅의 위대한 생육의 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정원사들이 꽃과 나무를 심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토양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이다. 즉 산성 땅인지 알칼리 성의 흙인지를 확인한 다음 이에 맞는 수종을 선택한다. 한 예로 소나무가 자리한 땅은 송진이 떨어져 산성화되므로 이 토질에 강한 진달래나 참꽃류를 심는다고 한다. 유채꽃, 튜립꽃과 청보리가 어떤 성분의 흙에서 자라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땅이 이런 다양한 식물을 품어 싹을 내고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 가동동력은 어디서 나올까? 중용(中庸)에는 ‘중(中)과 화(和) 즉 모든 것을 그 상황에 지극히 맞게 하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를 편안히 지키어 만물이 잘 태어나고 자라게 된다.’라고 했고, ‘하늘이 삼라만상을 낼 적에는 반드시 그 재질을 따라 그에 맞도록 양육시킨다. 그러므로 심은 것은 북돋아 주고, 기운이 다하여 죽게 되면 엎어버린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에게도 땅처럼 적절한 상황과 조건이 주어 지면 이런 다양한 창조능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쉽게도 사물에 대한 지식, 이해, 관점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지와 인식능력은 정점에 도달하기가 더디며 그 한계를 쉽게 보인다. 생을 다하기 전까지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러할까? 흔히 젊은이는 꿈을 꾸는 자이며 늙은이는 기억하고 회상하며 성찰하는 연수(年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요엘 서에는 창조주의 영이 만물에 부어지면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는 자녀들이 미래에 전개되는 일을 볼 수 있으며, 늙은이들에게도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하며, 젊은이는 자신의 이상인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약속이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일상의 수레바퀴를 따라 살아간다. 젊은이들은 로맨틱한 환상으로 사물을 본다. 그것이 그들의 순수함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캐나다 출신의 조니 미첼(Joni Mitchell, 1943-)이 21세의 나이에 노랫말을 쓰고 작곡한, ‘Both Sides Now’란 제목의 노래가 그러했다. 그녀가 보았던 구름, 사랑, 인생이 이전에 생각했던 기대처럼 지속 가능한 것도, 동화 속의 이야기와 같이 실재는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물을 한쪽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면 모두 관찰을 했으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는 고백이다. 즉 그녀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꿈과 현실이 꿈꾸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찍이 경험한 셈이다. 그 경험이 그녀 스스로 체험한 것인지 책을 통한 간접경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솔 벨로(Saul Bellow)가 1959년에 쓴 ‘비의 왕 헨더슨’(Henderson the Rain King)이란 소설을 읽고 감동하여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노래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등 다수 가수의 버전으로 남아, 지금도 젊었을 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가끔 들어본다.
조니 미첼은 다양한 탤런트를 가졌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이며, 시를 쓰고 노래를 지어내는 작곡가이자 가수이기도 하다. 어느 라디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그림과 음악의 관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양자의 관계는 통역 불가능한 다른 언어라고 대답했다. 그러한 언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녀의 재능이 부러웠다. 이는 나면서부터 받은 선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러한 선물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좋지 않은 건강이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기타를 칠 때는 손놀림이 부자연하여 자기만의 연주 기법을 개발했으며, 늙어서는 피부에 문제를 일으키는 희귀한 모겔론스 병(Morgellons Disease, 신체화증후군)과 뇌 대동맥류 파열(Brain Aneurysm)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망팔(望八)의 그런 환경에서 지금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 그리는 그녀의 끊임없는 창작 의지에 놀라울 뿐이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노랫말에 따라, 인생의 언덕에서 지금 사물의 양쪽 모두(Both Sides Now)를 여유롭게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남기려 하는 영혼이 자유로운 예술가이다. 그녀 모습이 노을풍경으로 느껴졌다.
늦가을 소슬한 바람에도 푸릇푸릇 자라나는 청보리 무리를 보며, 만물을 생육시키는 대지(大地)의 경이로움과 그 품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꿈과 현실이 보여주는 괴리의 모습을 잠시 돌아보았다. 가야 할 길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인지, 아니면 신작로와 같이 넓은 ‘왕의 길’인지 알 수가 없어 이곳저곳으로 때로는 방황도 하며 암중모색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여정일 것이다. 그 길이 다행히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되면 마침내 그 길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을 질 무렵 길고 힘든 순례를 마치게 될 때 그 길 끝에 서서 우리를 마중하는 분을 그리워하면 그는 영혼이 자유로운 자일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