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파크에 들어가보니 이런글이 있길래 한번 올려봅니다.
올리신분 말씀으로는 3년전에 저장해 둔 글이라고 하시는군요.
출처는 아마 야구114라고 생각되신다고 하네요. 꽤 재미있는 글이라 카페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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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출발
94년 1월30일 53명의 선수단을 태운 오키나와발 아시아나항공은 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나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국땅을 밟는 선수단은 한결같이 밝은 표정이었다.
93년에 이은 두번째 오키나와 전지훈련. 구단은 날씨가 따뜻한 오키나와의 구시가와 전지훈련이 3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선수단 규모는 전년도보다 늘었고 새 얼굴이 유난히 많았다. 해태서 이적한 한대화 신동수를 비롯, 무려 9명의 신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정작 선수단에 끼여 있어야 할 허슬플레이어 송구홍과 ‘오리’ 김동수는 보이지 않았다. 송구홍은 군문제가 걸려 있었고 김동수는 이미 방위복무중이었다. 93시즌 팀내 유일한 3할타자와 홈런을 가장 많이 쳐낸 장거리타자가 시즌성적을 좌우할 전지훈련에 빠졌으니 94시즌 LG의 행보는 결코 낙관할 수 없었다.
올해로 3년계약이 만료되는 이광환감독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갑갑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공수의 핵이 빠진 상황이라 이감독은 공격력 보완에 신경을 집중했다.
매스컴은 새얼굴들에게 초점을 모았다. 베테랑 한대화, 19살의 새내기 김재현 신윤호 등이 그중에서 대표적인 얼굴들이었다. 연세대 진학예정이었던 김재현은 93년 11월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한일고교야구친선대회에 참가하고 있다가 LG 유지홍 스카우트와 전격적으로 계약을 체결, 화제를 뿌린 주인공. 그의 프로계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대한야구협회를 통해 서울에 알려지자 김재현은 그날부터 당장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해프닝도 벌어졌었다.
LG구단의 ‘엔테베작전’을 방불케 하는 계약파동은 매스컴으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비난은 잠시였고 고교 최고의 스타를 붙잡은 LG는 희희낙낙이었다.
김재현을 끌어들이고 놓침으로써 생긴 전력의 차이는 당장 나타났다. LG는 구단 창단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뒀고 연세대는 힘겨운 한해를 보내야 했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는 야수 김재현보다 신윤호가 훨씬 크게 전력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보였다. 고교출신 스타급들의 전례를 살펴보면 투수는 즉시전력이 됐지만 야수출신은 나무배트와 변화구적응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쓸만한 고졸출신 야수가 프로에서 곧바로 주전자리를 차지한 예가 한번도 없어 상대적인 비교도 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김재현은 고교출신 야수로서 첫 시험대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고 신윤호는 김원형(쌍방울) 염종석(롯데) 정민철(한화)에 견주며 고졸 10승급투수로 꼽았다. 그러나 야구는 마음대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야구감독이나 구단에게 가장 좋은 때는 스프링캠프기간이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감독이 올해 중위권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면 매스컴은 그대로 기사로 옮긴다. 구단은 감독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비록 전문가들이 LG를 5위 정도로 꼽았지만 이감독은 괘념치 않았다. 매스컴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오히려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온 최정우 작전코치, 김용달 타격코치였다. 이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93년 11월에 구단이 단행한 코칭스태프 정비가 성적부진에 대한 단호한 인책성 물갈이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92년 이감독이 부임하면서 유일하게 동행한 이종도 수석코치가 재계약을 하지 못한 것을 비롯, 이광은 타격코치의 2군배치, 김명성 투수코치의 영입에 따라 유종겸 투수코치의 위치가 어정쩡해진 것 등은 이감독에 대한 일종의 불신임이나 다름없었다.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삼성에게 1점차 패배를 당해 한국시리즈에 실패한 이감독은 두차례나 병원에 입원, 혹독한 후유증을 앓은 것도 구단의 야속한 처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프런트 직원들 역시 성적에 대한 불안은 마찬가지였다. “우리팀 전력이 그정도밖에 안되냐”며 되물었다.
이감독은 93시즌과는 달리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에 2주동안 진주에서 합숙훈련을 가졌다. 93년 가을 스포츠서울이 주최한 한일친선경기를 통해 교분이 생긴 자매구단 주니치 드래건스의 다카키 모리미치감독과 전지훈련기간동안 연습경기를 갖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투수들의 훈련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감독은 93시즌부터 투수들을 위해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ITP(INTERVAL THROWING PROGRAM)라는 10단계 훈련과정. ITP는 이감독이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훈련프로그램은 아니다. 87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연수때 얻은 경험을 살리고 OB 2년, LG 첫해에 맛보았던 투수운영의 실패를 거울삼아 한국식으로 만들어낸 단계적 훈련과정이었다.
정삼흠과 베테랑 김용수, 시즌막판에 어깨부상을 당한 김기범을 제외하고는 훈련진도가 93년보다 앞당겨져 있었다. LG의 전지훈련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훈련강도가 다를 수 있었다. 감독의 취향에 다라 훈련방법도 가지각색이지만 이감독은 과다한 훈련은 능률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문별로 짧은 시간에 집중적인 훈련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감독이 94년 전지훈련에 가장 중점을 둔 훈련은 다른 것이었다. 즉 베이스러닝이었다. 이감독은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삼성에게 패한 원인은 7회 1사 1, 3루서 3루주자 김선진의 베이스러닝 미숙에 있었다며 이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기존선수들이 가장 고치지 못하는 것 또한 묘하게도 베이스러닝이었다. 타고난 센스가 없는 한 인위적인 반복훈련은 타성이 몸에 밴 기존선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애당초 센스가 둔하고 발걸음이 느린 선수를 닥달한다고 해서 미숙한 베이스러닝이 좋아질 리 없었다.
숙소인 가스카호텔에서 훈련장소인 구시가와 시영구장은 택시로 10분 걸리는 거리. 오키나와의 2월 날씨는 한국의 가을을 연상케 하지만 아침과 낮에 종종 비를 뿌리는 게 특징이었다. 그라운드의 배수시설이 잘돼 훈련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홍보부 조남웅 대리, 운영부의 야구인출신 배수희대리, 기록담당 김정준씨가 전훈에 참가, 언어소통에도 장애가 없었다.
올해는 전훈기간중에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20여년동안 몸담았던 무라타 트레이닝코치를 초빙, 합동훈련에 앞서 다양한 스트레칭과 부상방지에 대한 강의를 들어 선수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식사도 우리 입맛에 맞게 조리돼 ‘입이 짧은’ 박준태도 잘 버텼다.
현지도착 이튿날부터 훈련은 정상적으로 시작됐다. 4일훈련에 하루휴식. 훈련시간은 상오 9시30분부터 하오 3시까지. 특별타격, 특별수비훈련은 상황에 따라 아침, 오후시간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투수들은 김명성 유종겸 투수코치의 지휘아래 ITP 6단계에 들어갔고 천보성 김동재 수비코치는 새로운 얼굴의 내야수들을 지도했다. 입심좋고 상황대처에 능한 천보성코치는 유지현 박은우 서용빈 허문회등 신인들에게 아주 초보적인 것부터 묻고 대답을 듣는 식으로 가르치며 힘든 훈련일정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경북고 후배인 김동재코치도 천코치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입심으로 갑갑한 전훈일정을 재미있게 꾸미려고 노력했다.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온 최정우 작전코치는 외야수들의 펑고를 쳐주며 베이스러닝 보완에 주력했다.
최코치와 함께 1군에 오른 김용달 타격코치는 더욱 정열을 쏟았다. 이광은타격코치와 보직을 맞바꾼 게 시즌막판에 극도의 타격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책임을 물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받는 부담은 매우 컸다. 김코치로서는 잘해야 된다는 책임감에다 전임코치에 비해 프로현역시절의 지명도가 떨어진 점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광환감독과는 처음 호흡을 맞추는 것이었으므로 스타일이나 야구철학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이감독과 김코치의 지도방식은 처음부터 마찰을 빚었다. 이감독은 “신인들의 기량이라는 것은 럭비공과 같아 예측이 불가능하다. 게임을 리드하고 풀어가는 것은 결국 고참과 베테랑”이라며 신인들을 믿어보자는 김코치의 지도방법에 일단 제동을 걸었다. 이감독이 고집 강하기로는 야구계에서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지만 코칭스태프의 의견을 듣는 귀는 항상 열어놓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아래사람의 의견을 일축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주니치와의 연습경기◇
적어도 오키나와 전지훈련과 시범경기동안 신인들의 기량은 럭비공처럼 튄 게 사실이다. 2월12일 구시가와에서 버스로 50분가량 걸리는 이시가와 구장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와 연습경기가 벌어졌다. 주니치 1군선수들의 캠프지여서 그런지 시설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팀의 스프링캠프지가 거의 대부분 그렇지만 이시가와구장도 부근에서 모여든 팬들로 시골 장터같이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 최고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치가 자유계약으로 풀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탓인지 93캠프때보다는 팬들의 발길이 뜸했다.
게임은 6이닝으로 진행됐다. 주니치는 지난해 한일친선경기를 가진 뒤 한국야구를 보는 시각이 달라져 있었다. 다카키감독은 1군 주전멤버에 준하는 선수들을 출장시켰다. 선수구성으로 보아 주니치가 성의를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LG로서는 스프링캠프라는 중요한 시기에 돈주고도 체험할 수 없는 경기였다. 1차전은 0―11로 참패했다. 선발요원 김태원 정삼흠 등은 아직 정상컨디션을 갖추기 전이었으므로 페이스가 빠른 신인들이 마운드에 올랐다.
선발로는 포스콘에서 2년동안 활동하며 자칭 ‘실업야구 선동열’이라는 언더핸드스로 박철홍이 나섰다. 원아웃을 잡은뒤 수비불안과 빗맞은 안타로 위기에 몰린 박철홍은 구위를 추스릴 새가 없었다. 더구나 국내에서는 그냥 넘어갔던 견제폼이 일본 심판들에게 잇따라 보크로 지적당하면서 ‘실업야구 선동열’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1이닝동안 홈런포함 7안타를 얻어맞고 6실점, 일본 프로야구의 매서운 맛을 봤다.
“아마에 그냥 남아 있을 걸 괜히 프로에 들어와서 스타일만 구기는구나”라는 후회가 문득 떠올랐다는 게 박철홍의 후일담이다. 두번째로 나온 억대고졸신인 신윤호라고 해서 나을 게 없었다. 2회동안 난타당하며 4실점하고 내려왔다. 프로데뷔 첫등판이 일본프로팀과의 대결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 큰 부담이었다.
뭇매를 맞는 와중에서도 돋보이는 투수가 있었다. 단국대를 거친 신인 인현배였다. 3이닝을 던지면서 연속안타만을 허용하고 1실점했다. 눈에 두드러지는 호투였다. 삼진도 하나 곁들였다.
비록 0―11로 참패를 했지만 신인위주들로 나간 LG선수들은 일본 프로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의 한박자 빠른 타격, 수비, 베이스러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다음날 같은 장소, 같은 방식으로 2차전이 벌어졌다. 프로물을 먹은 투수들이 마운드에 선 덕분에 전날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선전했다. 차명석―신동수―오희주―이병석이 이어던져 0―2로 졌다. 2실점을 한 오희주는 일본 주니치 2군에서 6개월간 위탁교육을 받았던 기대주. 고질적인 컨트롤불안을 해소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전날 평범한 플라이를 ‘만세’부르며 어이없는 에러를 저지른 중견수 김재현은 이날도 보는 이들이 하품을 할 정도로 수비의 기본기가 안돼 있었다.
공격―수비―주루 3박자를 갖췄다는 19살의 고졸신인 김재현의 오키나와 전훈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고졸야수 최고계약금이라는 부담도 어린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훈련을 마치고 매일 하오 7시에 열리는 코칭스태프 미팅에도 신인들에 대한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에 초점을 모으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재현의 수비는 낙제점이었다. 특히 타구를 잡은 뒤 송구동작은 군더더기가 너무 많았다. 타구판단도 좋지 않았다.
프로지도자들이 신인들의 플레이를 볼 때마다 “기본기가 너무 안돼있다”고 하는 푸념을 늘어놓기에 꼭 좋은 본보기였다. 당초 이감독은 스카우트들이 “김재현은 3박자를 갖춘 선수”라는 평가를 듣고 중견수로 키울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니치와 연습경기 3경기를 치른뒤 ‘중견수 김재현’계획은 백지화시키고 말았다. 수비범위가 넓은 중견수를 맡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재현이 1군에 잔류할 수 있었던 배경은 타자로서의 엘리트의식과 지고서는 못견디는 승부근성이었다.
부동의 1루수 김상훈의 트레이드 공백을 메워줄 기대주로 해태서 지명권을 양도받은 신인 허문회 역시 수비에 커다란 결함을 드러냈다.
◇1루수 3파전◇
다가오는 94시즌에 김상훈의 자리를 누가 이어받을지는 구단, 코칭스태프, 팬 모두의 관심사였다. 1루를 놓고 3파전이 벌어졌다. 프로 5년생 김선진과 신인 허문회, 서용빈이 ‘미스터 LG’의 뒤를 이을 후보였다. 전훈이 보름정도가 지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각각의 약점이 드러났다.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던 김선진은 어깨가 너무 약했다. 홈, 3루로 시원하게 공을 뿌리는 적이 없었다. 허문회도 김재현과 마찬가지로 송구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송구가 천편일률적으로 오버핸드스로 형태로 나와 순간적인 대처가 필요할 때 낙제점이었다. 김재현 조필현과 함께 김명성 투수코치로부터 공던지는 법을 따로 과외지도받아야 할 정도였다.
자신의 야구인생을 180도 바꾼 무명의 서용빈은 수비가 그중 가장 탁월했다. 비록 실전타구가 아닌 펑고를 받는 반복훈련이었지만 3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비솜씨를 발휘했다. 문제는 타격. 허문회와 엇비슷한 기량을 보였다. 94년 대학신인2차지명 가운데 꼴찌에서 두번째로 꼽힌 선수였으니 별다른 기대도 받지 못했다. 코치들은 “용빈이 수비가 가장 좋긴 하지만 타격 때문에 경기후반에나 대수비요원으로나 써먹을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했다. 실력을 검증받지 못한 신인이라는 점도 커다란 약점이었다. 허문회나 서용빈은 발도 느려 플레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훈 2주일이 경과할 때까지는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허문회가 서용빈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서용빈은 전훈에 참가하는 것조차 감지덕지했다. “송구홍 김동수가 군복무에 걸려있고 전력으로서 불투명하니 신인들의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전훈에 모두 데려가는 게 좋겠다”는 이광환감독의 건의에 따라 간신히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탄 것이었다. 계약금 1천8백만원짜리 선수였으니 서용빈을 보는 시각도 시큰둥했다.
이에 비해 허문회는 ‘차세대 LG 1루수감’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김상훈을 해태로 트레이드한 것도 허문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좌타자에다 국가대표경력, 볼을 맞히는 데는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스카우트들의 보고서는 전훈초반까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러나 서용빈과 허문회의 행로가 뒤바꾼 것은 재일동포 장훈씨의 캠프방문이었다. 주니치의 타격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는 장훈씨는 휴일날 짬을 내 구시가와 시영구장을 찾았다. 타격의 대가이고 보니 이광환감독이 신인들의 타격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서용빈의 타격을 지켜본 장훈씨는 “일본에서도 저 정도 선수가 드물다. 타격자세가 아주 부드럽다. 잘 다듬으면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며 고국의 후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허문회에 대해서는 “프로선수로 대성하려면 하루에 4~5백개 이상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며 좋은 점보다는 문제점을 주로 지적, 대조를 보였다.
이후 자신감이 넘치는 서용빈의 타격은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거칠 게 없었다. 반면 이때까지 괜찮은 타격감각을 보였던 허문회는 허리가 아프고 훈련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장훈씨의 한마디는 서용빈이 LG의 주전1루수가 되는 발단이 됐고 허문회에게는 후보로 밀리는 독약이었다. 7차례 가진 일본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LG에서 유일하게 홈런을 친 선수는 서용빈이었다.
◇1군에 합격한 신인들◇
주니치와 연습경기를 거치면서 LG 선수들의 기량은 부쩍 늘었으나 1승도 건지지 못했다. 찬스에서의 결정력부족이 한국야구와 일본야구의 수준차를 보여주는 것같았다. 4차전부터는 베스트멤버가 출전, 7이닝경기를 펼쳤다. 한대화 노찬엽이 중심타자로 나갔고 이상훈 김용수등이 이닝수를 늘려나갔다. 주니치도 국내에 잘알려진 내야수 다쓰나미야 가즈요시, 다네다 히도시와 대만계 슬러거 다이호 야수키등을 포진시켜 한국팀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내에서도 정상급인 이들은 비록 1~2타석, 혹은 1~2회에 불과한 수비에 나서면서 최선을 다했다. 4, 5차전도 LG가 1―2, 7―8 1점차로 패했다.
2월21일에는 오키나와 북단에 위치한 나고 시영구장에서 93시즌 퍼시픽리그 2위를 차지한 니혼햄 파이터스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주니치가 현란한 변화구를 자랑하는 이마나카 신지와 강속구의 야마모토 마츠히로라는 18승투수들을 자랑삼는 팀이라면 니혼햄은 방망이로 승부를 내는 타격의 팀. 이광환감독은 이상훈을 선발로 세워 니혼햄의 전력을 파악하려 했다.
수비의 귀재라고 믿었던 유지현이 잇따라 실책을 저질렀고 좌익수로 나선 김재현은 우왕좌왕 타구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유지현 김재현 둘이서 어이없는 실책 5개를 쏟아냈다. 4명의 투수는 11안타를 허용, 2―14로 묵사발이 됐다. 일본과 7차례 연습경기를 갖는 동안 최대 점수차 패배였다.
니혼햄과의 연습게임을 주선한 구단관계자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년 전훈에 일본팀과의 연습경기를 어떻게 주선하겠느냐며 안절부절 못했다. 다혈질인 어윤태단장은 시종일관 얼굴을 붉히며 선수들의 플레이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감독은 연습경기가 끝난 뒤 이례적으로 선수들을 불러모아 따끔한 질책을 가했다. 구시가와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안은 패전병들의 초라한 분위기었다. 일본 프로야구 1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경기내용이 프로답지 않았다는 점이 코칭스태프와 구단관계자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이 평가한 5위 정도의 수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연습경기는 올시즌 LG 선수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다.
올해의 전지훈련은 예년과는 달리 경기중심으로 진행됐다. 대부분의 구단들도 ‘훈련을 위한 훈련’보다는 다양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임의 중요성을 인식, 자체내 청백전을 일찍부터 시작했고 삼성 롯데는 호주에서 연습경기를 갖는등 본격적인 시즌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왜 유독 LG의 연습경기가 보다 효과적이었을까.
단지 게임 파트너가 일본이라는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다. 주축을 이룬 일본의 1. 5군 선수들은 시즌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이미 몸이 돼있었다. 게다가 모든 부문이 LG 선수보다 빨랐다. 투수의 볼스피드, 타구를 처리하는 동작, 외야수들의 송구스피드 또한 조금씩 빨랐다. 주자들의 베이스러닝도 그랬다. 선수 개인을 견주면 우리보다 나을 게 없었지만 일본 프로야구라는 틀이 전체 선수들의 기량을 고르게 만들었다. LG로서는 매경기 배울게 있었다. 그러면서 LG 선수들은 빠른 속도로 적응해갔다.
LG는 오키나와 전훈을 떠나는 전날인 3월2일 주니치와 마지막 연습경기를 가졌다. 최종전이라 9회 경기였고 양팀 모두 베스트 멤버가 출장했다. 투수들만 봐도 LG는 김태원(3회) 이상훈(3회)과 차명석 강봉수 김용수가 각각 1회씩 던졌다. 주니치는 곽태원―야마모토―이마나카가 2회씩을 던지며 구위를 점검했다. 야수들도 LG는 포수 김정민을 제외하고 94시즌 포지션별 주전들이 나갔다. 주니치는 미국용병을 빼고 베스트9이 나섰다.
경기는 집중력에서 뒤져 3―6으로 역전패했다. 7전전패. 그러나 코칭스태프와 선수단분위기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수에서는 11―10으로 앞섰다. 공격과 수비가 모두 매끄러웠다. 19살의 김재현이 처음 적시타를 날렸다. 4타수2안타2타점. 베테랑 한대화는 2타수2안타를 치고 타격감각이 정상임을 확인했다. 비록 게임은 졌지만 귀국 전야가 즐거웠다. 선수단은 구리빛 얼굴이 되어 3일낮 32일동안의 힘겨운 전훈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톱타자는 누가 될까◇
선수단은 시범경기와 다른 팀의 전력을 점검하는 번외연습경기를 치르기 위해 3월6일부터 진주에서 합동훈련을 가졌다. 훈련장소인 진주연암공전은 낮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3월초순 날씨는 쌀쌀했다. 따뜻한 곳에서 1개월 가량 전훈을 받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상이 우려됐다.
젊은 김용희감독이 이끄는 롯데와 두차례 연습경기를 펼쳤다. 9일 연습경기서 김재현 서용빈이 홈런을 터뜨렸으나 6―7로 역전패. 34살의 최고참 ‘영감’ 김영직은 성의없는 플레이를 펼치다가 이감독의 불호령 속에 2군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됐다. 선수단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이감독의 경고였다. 이때까지 LG는 94년들어 9경기의 연습경기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어린 김재현은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적시타를 날린후 자신감을 얻은 모습이었다. 전훈내내 맹타를 휘두른 무명 서용빈은 타격페이스가 꾸준했다. 센스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유지현은 톱타자감으로 지목됐으나 타격이 도무지 신통치 않았다. 이감독은 지난해 톱타자 박준태와 유지현을 놓고 저울질했다.
3월13일 마산서 벌어진 롯데와 시범경기. 시범경기는 신인들과 1. 5군들의 경연장이다. 신인들로서는 팬들과 다른 팀에게 첫선을 보이는 터라 중요한 무대가 된다. 1. 5군 역시 1군 진입여부가 좌우되는 곳이기도 하다.
톱타자는 박준태가 맡았다. 유지현은 2번. 게임은 5―2로 롯데의 승리. 시범경기의 승패는 별 의미가 없지만 신인 서용빈의 위치가 잠시 흔들렸다. 오키나와 전훈에서 줄곧 맹타를 휘둘렀던 서용빈은 정작 관심이 모아지는 무대에서는 2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내용이 좋지 않았다. 첫타석에서 포볼을 고른뒤 누상에 주자가 있을 때는 병살타와 삼진으로 물러났다.
다음 경기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쌍방울을 상대로 14안타를 퍼붓는 동안 서용빈도 2타수2안타1타점을 기록, 앞경기의 부진을 만회했다. LG는 연습, 시범경기를 통해 처음 이겼다. 스코어는 9―0. 톱타자로 기용된 유지현은 포볼을 포함해 3타수1안타1타점1득점으로 1번타자의 역할을 무난히 소화했다.
신인 투수 인현배도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컨트롤이 두드러지게 좋았다. 이감독은 유지현을 톱타자로 염두에 두었다. 1루는 김선진이 선발로 기용됐고 서용빈은 경기후반에 나갔다. 국내외 연습경기서 10전전패를 한뒤 시범경기는 4승2패로 마무리했다.
마운드는 대체로 이감독이 의도한대로 움직여졌다. 다만 좌완 김기범의 회복여부가 문제였다. 93년 가을 일어난 어깨고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발 4명으로 돌아가는 로테이션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오키나와 전훈에서는 해태서 옮겨온 좌완 신동수, 중간계투요원 민원기, 그리고 전천후로 나선 차명석 등이 김기범과 함께 선발 한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그때 복병으로 나타난 주자가 신인 인현배였다.
이감독은 마운드운용은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시켰으나 중심타선을 짜는 데는 고민이 많았다. 확정된 타순은 오직 4번 한대화 뿐이었다. 톱타자도 그랬고 중심타자도 고정시키기 어려웠다. 훈련이 부족한 방위병포수 김동수도 어느 타순에 넣느냐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투수들이 느끼는 김동수의 화력은 중심타자감이지만 실제는 달랐다. 훈련량이 부족한 탓에 타구 자체가 내야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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