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정세형의 무전무죄
어떤 사람이 아파트를 10억원에 팔기로 했는데, 아파트를 12억원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파트 소유주 입장에서는 첫 번째 계약을 취소하고 더 비싼 값에 팔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에 한 계약을 어긴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히 민사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임죄에 해당해 형사처벌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부동산 이중매매를 비롯하여 몇 가지 상황에 대한 배임죄 성립 여부에 대해 살펴본다.
중도금 지급 이후 부동산 처분은 배임죄
부동산 매매계약에서 계약금만 지급된 단계에서는 매수인은 계약금을 포기하고, 매도인은 그 배액을 상환하면 자유롭게 계약의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중도금이 지급된 뒤부터는 성격이 달라진다. 즉, 중도금 지급 이후의 법률관계에 관해 대법원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중도금이 지급되는 등 계약이 본격적으로 이행되는 단계에 이른 때에는 계약이 취소되거나 해제되지 않는 한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해 줄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이른 때에 매도인은 매수인에 대하여 매수인의 재산보전에 협력하여 재산적 이익을 보호·관리할 신임관계에 있게 된다. 그때부터 매도인은 배임죄에서 말하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위에 있는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계약 내용에 따라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해 주기 전에 그 부동산을 제3자에게 처분하고 제3자 앞으로 그 처분에 따른 등기를 마쳐 준 행위는 매수인의 부동산 취득 또는 보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행위이다. 이는 매수인과의 신임관계를 저버리는 행위로서 배임죄가 성립한다.”
따라서 부동산을 누군가에게 팔기로 하고 중도금까지 지급 받았다면 다른 계약 취소나 해제 사유가 없는 한 더 비싼 가격에 부동산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매도인이 부동산을 이중으로 매도하고 제2매수인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쳐준 경우 제1매수인에 대한 관계에서 배임죄가 성립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제1매수인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쳐준 경우에는 제2매수인으로부터 중도금 이상의 대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관계에서는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참고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근저당권설정과 관련한 사기죄·배임죄
채무의 담보로 근저당권설정등기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3자 명의로 근저당권설정등기를 마친 경우에도 배임죄가 성립한다. 또 만일 부동산에 근저당권을 설정해줄 의사가 없음에도 피해자를 속이고 근저당권 설정을 약정해 돈을 편취하고, 나아가 그 부동산에 관하여 제3자 명의로 근저당권설정등기를 마친 경우에는 사기죄와 별도로 배임죄도 성립한다고 본 대법원 판례도 있다.
하지만 매매 목적물이 동산인 경우는 부동산과 다르게 취급된다. 매매의 목적물이 동산일 경우,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계약에 정한 바에 따라 그 목적물인 동산을 인도함으로써 계약의 이행을 완료하게 되고 그때 매수인은 매매목적물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매도인에게 자기의 사무인 동산 인도 채무 외에 별도로 매수인의 재산 보호 내지 관리 행위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동산매매계약에서의 매도인은 매수인에 대해 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지 아니하므로 매도인이 목적물을 매수인에게 인도하지 않고 이를 처분하였다 하더라도 형법상 배임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
한편 채무담보를 위해 동산이나 주식을 채권자에게 양도하기로 약정하거나 양도담보로 제공한 채무자가 담보목적물을 처분한 경우 종전에는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최근 위와 같은 판례를 변경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되었다. 어떤 회사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서 대출금을 다 갚을 때까지 중장비를 양도담보로 제공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였음에도 해당 장비를 다른 사람에게 매각해 버린 사안에서 대법원은 기존 판례를 변경해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배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범죄의 주체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어야 한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채무자를 채권자에 대한 관계에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목적물을 이중으로 처분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신적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이냐 동산이냐에 따라 배임죄 인정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동산을 거래하는 경우에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한 사례처럼 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는 경우 동산을 채무자가 계속 점유‧사용하는 소위 ‘점유개정’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동산이 아닌 동산을 담보로 제공해야 할 정도라면 그만큼 재산 상황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부동산을 담보로 받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경우 나중에 민사적 조치를 취하더라도 실제로 돈을 회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