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제목이 조악해지는 것은 이 글 내용이 이수준과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거기다 반말까지 하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난 판타지가 좋다. 왜? 말그대로 판타지이니깐. 왠지 모를 어감에서 풍겨나오는 자유스러움에 반했다는 어느 낭만주의자는 아니고, 그 뜻을 대충은 알기에, 그의미를 알기에 좋다. 어설프게나마 현실을 뒤집어놓은 특이함과 그 양면성에서 보이는 야누스의 반쪽을 보는것 같아서 좋다. 결코 판타지라는 것이 자유스럽다거나, 또는 새로운 개척의 땅이라서가 아니다.(처음에는 나도 그런줄알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면 지금 우리가 밟고있는 땅위가 더 판타스틱하고 미라클 하지않나? 단순히 귀 길고 잘생긴 놈과 날라다니는 도마뱀이 없다고해서 판타스틱하지않을 리는 없다. 왜? 그것에 결코 뒤지지않는 당신이 있고, 그가 있지않는가.
(선문답같군..)
시중에 새로나온 신간 진열대에는 왠지모를 크로테스크하거나 몽환적이면서 신비스러운 표지가 보인다. 유심히 관찰하지않으면 그 표지에 속아 자그마하게 써진 판타지라는 말을 보지 못한다.(물론 그 표지보고 바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암튼 그런 책을 기대반 호기심반 들춰보고 있노라면 결국 참 현실적인 이야기가 흐르고 몇몇 대사를 통해 주인공의 지능지수와 그엘 걸맞는 파티들의 천진난만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백미는 바로 앞장 뒤에 적힌 몇마디 글줄이다. 자랑스러워했다. 작가라고 자처하는 어떤이의 사진과 더불어.
백미는 우선 미뤄두자.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책 자체이다. 어찌됐던 작가를 자처하는이는 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넣고 거기에 움직이는 몇몇의 피조물을 넣은 체 태엽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옆에서, 아니 직접 내 태엽을 감아가며 거기에 방관자로써, 또는 관망자로써 같이 숨쉬어 본다. 그리고 잠정적으로 대충 결론을 내려본다. 환상이 아니다.
판타지와 환상을 동일시 하는 것은 어쩔수없는 어휘변환의 선택이었다. 가장무난한 해석이고 별로 반기를 들 생각는 없지만, 집고 넘어갈것은 우리는 무엇을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냐이다. 원론적이면서도 구차한 질문이다. 뭐가 환상인가? 생전 보지도 못한 것들이 깽판치는 세상? 나는 견문이 넓지않아서 호랑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이야기에 호랑이라는 놈이 나온다. 그것은 환상인가? 아..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니 보지 못했어도 환상이 아니라 엄연히 현실이라고? 그럼 당신은 지금 인간이 규정해놓고 알려진 모든지식을 진리라고 믿는가?(큭, 드디어 지저분해지는군) 외계인의 실존여부를 단순이 환상과 현실속의 딜레마로 규정지을것인가? 신을 믿는가? 아니, 신을 봤는가?(종교인들에게는 죄송)
지금 위에 꼬리에 꼬리를 문 문답은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고 있단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럼 다른각도에서.
있을수 없는 것을 대충 허구라는 말로 대체하겠다. 허구는 곧 판타지인가?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위의 한 인간의 행위를 다른 사람이 가상해서 지어놓는 다는 그 본질자체가 허구 아닌가. 한 사건이 실존하지않고 단순히 텍스트의 두리뭉실함에 숨어있다면 그것도 역시 허구이고.
[중세 비스무리한 시대에 나는 말하는 검을 들고 하늘도 난다는 한 말을
탄체 그 세상의 악이라는 이름 긴놈을 무찌르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와 비슷한 레파토리를 판타지소설에서 보았다. 분명 있을수없는 기반위에 없다고 믿는 것들을 가지고 한 사건을 시작한다. 그러나 왠지 답이 뻔히보이는 것에 딴지를 건다. 이게 왜 판타지인가.
기반 자체에서(그러니깐 그 세계관, 그 설정 위에서는) 분명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건 마치 우리가 한명의 적을 잡기위해 총을들고 택시를 타는것과 별반다를것없는 행동양식이다. 거기서는 말도 하늘을 날수있고, 간혹 말하는 검도 있단다. 그런 세상에서의 환상이라는 것은 작품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있을법한 얘기가 아닌가.
이것을 읽는 사람은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해온다. 그건 작품속에서의 해석이고, 독자는 분명 지금의 현실속에서 그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니, 그것은 환상이다. 라고.
왠만한 소설들이 지향하는 한줄의 글. [어디까지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가정한 상태에서 확률론적 대답이다. 그 확률은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기에 1에서 부터 소수점까지 그누가 뭐라해도 상관이 없다.
결국 판타지다. 소설의 내용은 기반만 같은 허구이고, 기반을 달리한 허구와 결국 허구라는 면에서 일치하고, 은근슬쩍 판타지라는 말로 통합할수도 있다. 위험을 불사하고.
별로 영양가없는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판타지에 웃고, 판타지에 울고 등등 그 판타지에게서만 온갖 희노애락을 느끼는 이에게 진정한 판타지는 바로 지금 당신에게 일어날수있는 모든 양식중 아직 일어나지않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우린 지금 현실을 가장한 판타지속에, 또는 판타지를 가장한 현실속에 살고있다. 판타지는 현실을 배신할수 있지만, 부정할수는 없다.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세상의 우리들이 그 두개를 규정지어가며 말머리를 쫓아다는 것 또한 너무나 아이러니는 자처하는것은 아닐까.
(어째서 이런결론 도출이 된걸까. 심히 의심스럽지만 너무 길게썼기에 고칠여력이 없다는...)
보르헤스와 마르케스, 그리고 에셔를 떠올려 본다. 백년동안의 고독에서나 몇몇의 단편들, 그리고 판화를 보고있노라면 환상이란 현실을 은은하게 또는 과격하게 비틀어놓은 또하나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판타지는 기반자체를 변화시켜서 환상을 합리화 했다. 그것은 환상인가. 난 깍아내린듯한 귀긴 놈들과 비반 도마뱀을 보고싶은 것이 아니다. 현실을 일탈한, 변형시킨 사건을 보고싶은 것이다. 모순이겠지만 현실에서 또 현실을 보고싶다. 그 현실의 이름은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