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일찍 성공했으나 전쟁에 휘둘리다
10세기에 이미 대공국이던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했다. 유럽 최장의 세습통치 기록(1180~1918)을 보유한 가문이었다. 중세에 바이에른은 영토 분할을 겪다가 재통일했다(알베르토 4세, 1505년). 이때 바이에른은 브란덴부르그보다 영토가 3배나 크고 강력했다. 종교개혁 시절(16세기) 바이에른 군주들은 가톨릭 반동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어 루터파를 억압했다. 군주들은 공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터전이던 신분제의회를 철저히 제압했고, 쾰른 대주교령까지 통제하는 힘을 과시했다.
비텔스바흐 군주들은 오스트리아를 모방하여 관료제를 도입하는 등 초기 근대국가의 모습을 일찍 갖췄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이에른은 30년전쟁(1618년~1648년) 때 가톨릭 동맹국들의 전쟁 경비를 70퍼센트나 부담했다. 경제가 황폐하고 인구는 격감하여 위기에 빠졌다. 바이에른은 농업사회였으나 바다에 이르는 길이 없어 곡물 수출도 하지 못했다. 도시화도 미미했다. 즉 위기 돌파구나 국가를 뒷받침할 경제 기반이 별로 없었다. 귀족은 상급 재판권, 면세 특권도 보유하지 못하고, 비귀족 출신이 귀족 영지를 취득하는 일도 막지 못했다. 귀족의 토지 재산이 저당물 신세로 전락하는 등 바이에른에서 귀족은 상대적으로 약세였다. 30년전쟁 후 바이에른은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는 등 프랑스의 힘을 빌려 독일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지배를 다지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전반적으로 바이에른의 귀족은 허약했다. 성직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왕권 강화에 제약을 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바이에른은 사치스러운 궁정에 재정을 낭비하면서 국가 채무가 증대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무력한 지역 주인으로 전락했다. 즉 바이에른이 독일 내에서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소멸된 것이다(1740년).
부유하고 앞서가던 작센
동부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지역이던 작센을 통치하는 가문은 베틴Wettin가였다. 베틴가는 참전에 대한 보답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서 공국과 선제후의 지위를 얻었다(1425년). 첫 선제후(마이센의 프리드리히) 이후 작센은 둘로 갈라진다. 수도는 각기 비텐베르그(에른스트가)와 드레스덴-라이프치히(알브레히트가)였다.
작센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상업도시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신분제의회가 안정적이고 영향력이 강했다(16세기). 도시인은 지방의회에 적극적이었다. 작센 귀족들의 영지 규모는 바이에른 귀족들의 것보다 크기 했으나, 그들의 세력이 별로 강력하지 못하여 면세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작센에는 면세 특권도 없고 평민의 귀족 영지 취득을 금하는 법적 장치도 없었다. 농민의 지위는 농노가 아니라 자유소작농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베틴가는 상급 사법권을 귀족에게 양도하지 않았으며, 광산 채굴 등의 독자적 수입 기바이 있었다. 그래서 베틴 가문은 신분제의회를 휘어잡거나 관료행정 체제를 갖추지 않고도 힘을 축적했다. 지역 여제가 번영하여 조세 저항 없이 소비세 부과도 가능했다. 1540년대에 알브레히트공국과 에른스트 선제후국(루터파의 요람)이 통합되며 거듭난 작센은 신분제의회가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작센은 독일 전역의 정치적 리더였다. 그러나 군사, 외교 면의 역할은 미미했다.
관료제를 창출하지 못한 작센
30년전쟁이 작센을 엄습했다. 베틴가는 개신교인데도 합스부르그 진영에 가담했다. 작세은 스웨덴에 점령당한 후 강제로 합스부르그 반대편에 속했다가 이탈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부유한 경제 덕에 전후 회복은 빨랐다. 전쟁세를 합법화하고 상비군을 창설하여 터키에 맞선 빈 구출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1700년까지도 작센은 동부 지역의 강국이었다.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1세가 폴란드 지배를 시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우구스투스 1세는 왕의 칭호를 얻어 아우구스투스 2세로서 결국 폴란드의 지배권도 획득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그는 퇴위당했다. 스웨덴은 베틴 군대를 격파하고(1706년) 작센에 혹독한 점령 정책을 썼다. 다행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스웨덴을 제압하여 작센은 회생했다. 아우구스투스 2세는 폴란드 왕권을 회복했다. 군대도 재건되고(1730녀) 신분제의회도 잔존했다. 그러나 베틴가가 야기한 전쟁은 작센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귀족은 왕의 대외 원정에 냉담했다. 귀족의 토지는 계속해서 도시인 손에 넘어갔다. 농민은 통제하기에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다. 작세은 이렇다 할 관료제를 갖추지 못한 채 왕실 채무는 누적되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무력해졌다.
- 양동휴·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서양 문명의 변경에서 떠오르는 경제의 심장으로」
첫댓글 독일의 귀족들은 여전히 잘산다더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우구스트의 정력적인 관심이 빚어낸 결과물ㄷㄷ
작센, 바이에른과 브란덴부르크의 중요한 차이점은 이거죠. 본령이 분할되느냐, 유지되느냐.
비텔스바하는 라인궁중백과 바이에른으로 갈아진 것에 이어 바이에른도 1392년에 넷으로 찢어진 뒤에 서로 싸우는 수준. 1503년에 재통합된 뒤로는 종교개혁이다, 황제다, 계승전쟁이다로 개판.
작센의 베틴가는 에른스트계와 알브레히트계로 갈라지고, 그 중 에른스트계는 선제후위도 빼앗긴데 더해 남은 땅도 계속 분열.
그에 비해 호엔촐레른가는 아킬레스 시절에 프랑켄쪽은 분할상속시키는 대신 브란덴부르크변경백령의 분할상속을 금지하고, 결혼으로 획득한 프로이센, 클레페-마르크도 여기에 묶어버려서 본령이 분할없이 확대.
아, 그리고 본문에 1540년대에 알브레히트공국과 에른스트 선제후국이 통합되었다는 것은 약간 잘못된 설명입니다.
1547년에 슈말칼덴전쟁의 결과로 선제후 자리와 대부분의 영토가 종가인 에른스트계에서 방계인 알브레히트계로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튀링겐지역은 에른스트계의 손에 남아서 통합되지 않았습니다.
알브레히트계의 모리츠가 비록 황제편에 서긴 했지만 역시 루터파이고, 또 카를 5세 입장에서는 못 믿을 놈이라(실제로 1552년에 황제를 공격), 작센의 통합 자체는 황제가 막아버림.
어...정확히 말해서 브란덴부르크가 가장 클 수 있었던건 프로이센 상속이 더크죠. 게다가 바이에른의 쇠퇴가 분할상속이다 보긴 애매한게 독일지역에서 가장 빨리 분할상속을 도입한게 이쪽이라;; 되려 브란덴이 클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변방인데다가 중앙권력과 먼 운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리야 전제국 프로이센의 상속은 브란덴부르크가 확장하는데 그렇게 큰 도움은 못 되었습니다. 그단스크나 엘블롱크같은 도시들은 모두 왕령 프로이센에 속하고, 공작령에는 쾨니히스베르크 정도만 남은데다가 월경지라 통행도 어렵다보니.
프로이센의 영유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왕위를 만들 때 정도인데, 프리드리히 2세는 비웃었지만 어쨌든 브란덴부르크변경백이다, 마크데부르크공작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왕 아래에 묶인 것이 국가통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죠.
사실 브란덴부르크의 성장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은 프랑스가 북독일에 좀 큰 세력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하고 베스트팔렌에서 힌터폼메른이랑 마크데부르크 먹여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