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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주련과 시】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주련과 시】
창덕궁 진선문
송림 간 신정전과, 희정당 일원
인정문 숙장문
인정전
낙선재 안내
낙선재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주련(柱聯) 二十一 句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라고 씌어 있고,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이라고 새겨져있네.
山隨水曲趣無盡(산수수곡취무진)산이 물을 따라 굽이치니 흥취가 다함이 없고,
竹與蘭期坐有情(죽여난기좌유정)대와 난과 기약하니 자리에 정이 넘치네.
經學精硏無嗜異(경학정연무기리)경학에 정밀 연구하여 특이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藝林博綜乃逢原(예림박종내봉원)문예를 널리 종합하여 이에 근원을 만났도다.
滿襟龢氣春如海(만금화기춘여해)가슴 가득 화기(和氣)이니 봄은 바다와 같고,
萬頃文瀾月在天(만경문란월재천)만 이랑에 물결 이는데 달이 하늘에 있도다.
可釣可畊盤谷序(가조가경반곡도)낚시질하고 밭갈이할 만하니 반곡서(盤谷序)이고,
堪詩堪圖輞川圖(감시감도망천도)시 짓고 그림 그릴 만하니 망천도(輞川圖) 라네.
四壁圖書供嘯敖(사벽도서공소오)사방에 가득한 도서는 득의만만한 노래하게 해,
半窓風月任吟啄(반창풍월임음탁)창 한의 풍월(風月)은 마음껏 읊조리게 하네.
閒眠東閣修花史(한면동각수화사)한가로이 동각에 잠자며 화사(花史)를 수정하고,
偶坐南池注水經(우좌남지주수경)우연히 남지에 앉아 수경(水經)에 주석을 하네.
名紙勝於求趙璧(명지승어구조벽)좋은 종이는 조벽(趙璧)을 구하는 것보다 낫고
異書渾似借荊州(이서혼사차형주)기이한 서적은 형주(荊州)를 빌려온 듯하네.
閒將西蜀團窠錦(한장서촉단소금)한가로이 서촉(西蜀)의 단과금(團窠錦)을 가져와
因誦東坡憶雪詩(인송동파억설시)이어 동파(蘇軾)의 억설시(憶雪詩)를 읊노라.
太史文章臣瓚注(태사문장신찬주)태사의 문장은 신하 찬(瓚) 이 주석을 하였고
尙書孝友君陳篇(상서효우군진편)상서의 효도 우애는 군진편(君陳篇)에 자세하네.
擬寫山經徧大荒(의사산경편대황)산경을 쓰고자하여 대황에까지 두루 다니네.
위치와 연혁 :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방이기도 하다. 낙선재라는 이름은 영조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나 1756(영조 32)년과 1788(정조 12)년에 발생한 화재로 타버려서 『동궐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낙선재는 1847(헌종 13)년에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왕실의 사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이 이 곳을 집무소로 사용했다. 고종은 여기에서 대신들을 만나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하고, 일본과 청나라 등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1874~1926년)은 국권을 빼앗기고 나서 1912년 6월 14일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거주하였다.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년)도 낙선재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 후 이은의 부인 이방자(李芳子,1901~1989년) 여사가 여기에서 살았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한 칸을 전면으로 돌출시켜 누마루로 삼았다. 이 일대는 본래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맹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樂善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라 했다. 임금이 이곳에서 인의와 충신을 지키며 선을 즐겨 하늘의 작록(爵祿)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의 글씨이다. 현판 낙선재의 '재' 자 아래 藝林博綜乃逢原(예림박종내봉원) 주련은 추사의 스승 옹강방(翁方綱, 1733~1818)의 글씨이다. 주련 왼쪽에 그란 이름과 ‘옹방강인(翁方綱印)’이란 사각 음각도장, ‘담계(覃谿)’라는 사각 양각도장이 새겨져 있다.
낙선재 인접
낙선재 위치
창덕궁 한정당(閒靜堂) 주련(柱聯) 一十八 句
平安竹每日報信(평안죽매일보신)평안한 대나무는 매일 좋은 소식을 알려오고
無恙花四時賞春(무양화사시상춘)탈 없는 꽃은 사시에 봄을 감상케 하네.
萬年枝上花千朶(만년지상화천타)만년 묵은 가지 위에 꽃 천 송이 피었고
四海雲中月一鑑(사해운중월일감)사해의 구름 속에 달이 하나 비치네.
春留桃實三千歲(춘류도실삼천세)봄은 삼천 년의 복숭아를 남기고
秋見靈花八百年(추견영화팔백년)가을에는 팔백 년의 신령한 꽃을 보네.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라고 씌어 있고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이라고 새겼다.
未央樹色春中見(미앙수색춘중견)미앙궁(未央宮) 나무 빛깔을 봄 햇살 속에 보고
長樂鍾聲月下聞(장락종성월하문)장락궁(長樂宮)의 종소리를 달 아래 듣는다.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이요,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長樂鍾聲花外盡(장락종성화외진)장락궁(長樂宮)의 종소리는 꽃 너머로 사라지고
龍池柳色雨中深(용지유색우중심)용지(龍池)의 버들 빛은 빗속에 더욱 짙다.
一庭花影三更月(일정화영삼경월)온 정원 꽃 그림자에 삼경의 달이 뜨고
千里松陰百道泉(천리송음백도천)천리의 소나무 그늘에 백 갈래 샘물이 흐르네.
不知鳳沼霖初霽(부지봉소림초제)봉소(鳳沼)에 장마가 막 개인 줄은 모르고
但覺堯天日轉明(단각요천일전명)요천(堯天)에 해가 차츰 밝은 줄만 아네.
위치와 연혁 : 취운정 서쪽 담장의 일각문 밖에 있는 건물.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동쪽 1칸만 누마루로 구성됨. 1917년 이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정(閒靜)’은 ‘한가하고 조용하다’는 의미이니, “진실 되고 소박하며, 고요하며[閑靜] 조급하지 않다.”라는 용례가 보인다.
낙선재 원경 좌측 상량정의 우측 한정당 용마루가 보인다
한정당
창덕궁 한정당(閒靜堂) 장지문 주련(주련) 一十 句
春回禹甸山河外(춘회우전산하외)봄은 우 임금의 천하 밖까지 돌아오고
人在堯天雨露中(인재요천우로중)사람은 요 임금 시대 우로(雨露) 가운데에 있네.
凌雲樹有千尋勢(능운수유천심세)구름까지 솟은 나무는 천 길의 형세가 있고
映日花開百和香(영일화개백화향)해를 받아 꽃이 피니 온갖 향기 풍기도다.
彩毫閒試金壺墨(채호한시금호묵)채색 붓으로 한가로이 금병 속의 먹을 시험하고
靑案時看玉字書(청안시간옥자서)청옥(靑玉)책상에서 때때로 주옥같은 글을 읽네.
百尺樓臺瞻紫氣(백척누대첨자기)백 척 누대는 자색의 기운 우러르고
三春花鳥醉東風(삼춘화조취동풍)삼춘의 꽃과 새는 동풍에 취하도다.
奇石盡含千古秀(기석진함천고수)기괴한 돌은 온통 천고의 빼어남을 머금었고
異花長占四時春(이화장점사시춘)기이한 꽃은 길이 사계절의 봄을 차지하네.
부용정
창덕궁 부용정(芙蓉亭) 주련(柱聯) 一十 句
千叢艶色霞流彩(천총염색하류채)천 포기 고운 빛깔은 아름답게 흐르는 노을이요,
十里淸香麝裂臍(십리청향사열제)십리에 맑은 향은 배꼽 열린 사향일세.
閬苑列仙張翠蓋(낭원열선장취개)낭원(閬苑)의 여러 신선들이 푸른 일산을 펼친 듯,
大羅千佛擁香城(대라천불옹향성)대라(大羅)의 일천 부처가 향성(香城)을 옹위한 듯.
翠丹交暎臨明鏡(취단교영임명경)푸르디 붉은 빛 어우러져 거울같이 맑은 물에 임하고,
花葉俱香透畵簾(화엽구향투화렴)꽃과 잎 모두 향기로운 채 고운 발에 스며드네.
晴萼三千宮臉醉(청악삼천궁검취)말간 꽃잎은 삼천 궁녀의 취한 듯한 볼이요,
雨荷五百佛珠圓(우하오백불주원)연잎에 맺힌 빗방울 오백 나한 둥근 염주로다.
龜戱魚遊秋水裏(귀희어유추수리)가을 물속에서 거북이 놀고 물고기 헤엄치는데,
露繁風善早凉時(노번풍선조량시)초가을 서늘한 때 이슬 짙고 바람 좋도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가리킨다. 후한의 학자 허신(許愼, 30~124년)은 피지 않은 것을 함담이라 하고,
이미 핀 것을 부용이라 한다.” 라 하였다.
애련지와 의두합
창덕궁 애련정 주련(愛蓮亭 柱聯) 八 句
雨葉眞珠散(우엽진주산) 비 맞은 잎사귀에는 진주가 흩어지고,
晴花粉臉明(청화분검명) 말간 꽃은 화장한 뺨처럼 환하도다.
亭近如來座(정근여래좌) 정자는 석가여래의 자리와 가깝고,
池容太乙舟(지용태을주) 연못은 태을주(太乙舟)를 받아 들였네.
花愛稱君子(화애칭군자) 꽃을 사랑하여 군자라 일컫고,
龜齡獻聖人(귀령헌성인) 거북의 수명을 임금님께 바치네.
碧筒供御酒(벽통공어주) 푸른 대궁으로 어주(御酒)를 바치니,
霞綺散天香(하기산천향) 노을 빛 비단 꽃은 천향(天香)을 발산하네.
애련정은 연경당 앞 연못가의 정자이다. 『궁궐지』에 따르면 1692(숙종 18)년 연못 가운데에 섬을 쌓고 정자를 지어 ‘애련(愛蓮)’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도 연못 가운데에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애련정은 연못가에 있다. 즉 문헌대로 고증을 한다면 지금의 애련정은 나중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개의 기둥 중 두 개가 못에 잠겨 건물의 반은 못 위에, 반은 축대 위에 걸쳐져 있다. 애련정의 앞 네모난 연못은 애련지(愛蓮池)라고 한다. 연못 서쪽 옆에는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애련(愛蓮)’은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송나라 때 성리학자 염계 주돈이가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쓴 「애련설(愛蓮說)」이 유명하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고 지었다.”고 썼다. 이는 다분히 주돈이의「애련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숙종 스스로도 주렴계(周濂溪: 주돈이)와 뜻이 같음을 밝혔다.
애련정
연경당
창덕궁 연경당(演慶堂) 주련(柱聯) 四十 句
秦城樓閣烟花裏(진성누각연화리)진(秦)나라 성의 누각은 연화(烟花) 속에 있고,
漢帝山河錦繡中(한제산하금수중)한(漢)나라 황제의 산하는 금수(錦繡) 속에 있네.
臨事無疑知道力(임사무의지도력)일에 임하여 의문이 없으니 도력을 알겠고,
讀書有味覺心閒(독서유미각심한)글을 읽음에 참맛이 있으니 마음 한가로움을 깨닫네.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이요,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瑞氣逈浮靑玉案(서기형부청옥안)상서로운 기운은 아득히 청옥안에 떠 있고,
日華遙上赤霜袍(일화요상적상포)햇빛은 멀리 적상포(赤霜袍) 위로 솟아 오르네.
雲近蓬萊常五色(운근봉래상오색)구름은 봉래궁(蓬萊宮)에 가까워 늘 오색 빛이요,
雪殘鳷鵲亦多時(설잔지작역다시)눈은 지작관(鳷鵲觀)에 남아 오랫동안 쌓여 있네.
山中老宿依然在(산중노숙의연재)산 속의 노스님은 늘 그대로 앉은 채로
案上楞嚴已不看(안상능엄이불간)책상 위에 「능엄경(楞嚴經)」을 이미 보지 않고 있네.
名將存心惟地理(명장존심유지리)명장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오직 지리(地理)뿐이요,
聖門傳業只官書(성문전업지관서)성인 문하에 업을 전하는 것은 다만 관서(官書)일 뿐이네.
九天日月開新運(구천일월개신운)구천(九天)의 해와 달이 새로운 운을 열어 주니,
萬里雲霞醉太平(만리운하취태평)만리의 구름과 노을은 태평에 취해 있네.
千里春風回碧巒(천리춘풍회벽만)천리에 봄바람은 푸른 봉우리를 돌아오고,
南極祥光兆吉昌(남극상광조길창)남극성(南極星)의 상서로운 빛은 길상(吉祥)을 알려오네.
請於上古無爲世(청어상고무위세)상고 시대와 같은 무위(無爲)의 세상에서
長作天家在野臣(장작천가재야신)길이 천자의 백성이 되기를 청하네.
功崇六宇郭中令(공숭육우곽중령)공이 온 세상에 높은 이는 곽중령(郭中令)이요,
荷香風共聖之淸(하향풍공성지청)연꽃향 바람과 함께 하는 이는 성인 중에 맑은 사람일세.
兩京名詔皆高士(양경명소개고사)두 서울에 조서로 부르는 자는 모두가 고사이니,
四時和氣及蒼生(사시화기급창생)사시에 온화한 기운이 온 백성에게 미치네.
山靜日長仁者壽 (산정일장인자수)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 어진 이는 장수하고,
月明人影鏡中來 (월명인영경중래)달 밝으니 사람 그림자가 거울 속에 비춰 오도다.
半窓踈影梅花月(반창소영매화월)창 한 켠에 성긴 그림자는 달빛에 매화요,
一榻淸風栢子香(일탑청풍백자향)책상에 맑은 바람은 측백의 향기로세.
山逕繞邨松葉暗(산경요촌송엽암)산길은 마을을 두르고 솔잎은 짙은데
柴門臨水稻花香(시문임수도화향)사립문은 물에 가까워 벼꽃은 향기롭네.
於此閒得少佳趣(어차한득소가취)이 곳에서 한가히 약간의 아름다운 흥취 얻으니,
亦足以暢敍幽情(역족이창서유정)또한 그윽한 정을 펼치기에 족하도다.
淸興高於將上月(청흥고어장상월)맑은 흥은 솟아오르려는 달보다 높고,
深情溢比欲開尊(심정익비욕개존)깊은 정은 열려고 하는 술독에 비할 만큼 넘친다네.
僮約屢申松菊徑(동약루신송국경)노복과의 약속도 소나무와 국화의 길에서 자주 하였고,
水租先報芰荷洲(수조선보기하주)수조(水租)도 마름꽃과 연꽃이 핀 물가에서 먼저 받았네.
春雨杏花虞學士(춘우행화우학사)봄비에 살구꽃은 우학사(虞學士)가 노래했고,
酒旗山郭杜司勳(주기산곽두사훈)주막 깃발 산 성곽은 두사훈(杜司勳)이 읊었다네.
樂意相關禽對語(낙의상관금대어)즐거운 뜻 서로 관계하여 새들은 마주하여 지저귀고,
生香不斷樹交花(생향부단수교화)향기 풍겨 끊이지 않으니 나무는 꽃과 서로 어울렸네.
‘연경(演慶)’은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연(演)’ 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늘이다(延)’, ‘널리 펴다’는 뜻이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1827(순조 27)년 효명세자가 대조(大朝: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禮)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하였다고 한다. 연경당 위치와 연혁 : 진장각(珍藏閣)이 있던 자리에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요청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부 사료에는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거행할 곳으로 건축했으며 ‘연경’이라는 이름도 이때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경당은 속칭 궁궐 안의 99칸 집으로 유명하지만 순종대에 간행한 『궁궐지』에 따르면 실제로는 연경당(사랑채) 14칸, 내당(內堂: 안채) 10칸 반, 선향재(善香齋) 14칸, 농수정(濃繡亭) 1칸, 북행각(北行閣) 14칸 반, 서행각(西行閣) 20칸, 남행각(南行閣) 21칸, 외행각(外行閣) 25칸으로 모두 120칸이었다. 궁궐 안의 다른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화려하게 한 것에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 도리 집이다. 처음 지었던 연경당은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연경당’은 이곳의 건물군(群) 전체의 이름이면서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하다. 사랑채인 연경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인데 이 집 주인의 일상 거처이다. 대궐에서 퇴궐하면 이 방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경당
연경당 선향재
창덕궁 선향재(善香齋) 주련(柱聯) 一十五 句
道德摩勒果(도덕마륵과) 도덕은 마륵(摩勒)의 과일이요,
文章鉢曇花(문장발담화) 문장은 우담바라의 꽃이로다.
張子野詞伯(장자야사백) 장자야(張子野)는 사(詞)에 뛰어난 문인이고,
李將軍畵師(이장군화사) 이장군(李將軍)은 그림에 특출한 화가로다.
汝南尋孟博(여남심맹박) 여남(汝南) 땅으로 맹박(孟博) 1)을 찾아가고,
高密訪康成(고밀방강성) 고밀(高密) 땅으로 강성(康成)을 방문한다네.
細讀斜川集(세독사천집) 사천(斜川)의 문집을 세밀히 읽고,
新烹顧渚茶(신팽고저다) 고저(顧渚)의 차를 새로 달이네.
養竹不除當路筍(양죽부제당로순) 대 기르기 좋아해 길에 자란 죽순도 베지 않고,
愛松留得礙門枝(애송유득애문지) 솔을 사랑해 문 가린 가지도 남겨 두었네.
史編作鑑推君實(사편작감추군실) 역사 편찬은 자치통감 사마군실을 추대하고,
賦筆凌雲擬子虛(부필능운의자허) 부 짓는 솜씨 구름을 뛰넘은 기상 자허에게 비기네.
瀑布之餘雲盡水(폭포지여운진수) 폭포의 밖에서는 구름이 온통 물이 되고,
茯苓其上樹交花(복령기상수교화) 복령(茯苓)의 위에서는 나무가 꽃과 어울렸네.
却對眞山看畵圖(각대진산간화도) 문득 진짜 산을 대하니 그림을 보는 듯하도다.
연경당 동쪽에 있는 14칸짜리 건물로 책들을 보관하고 책을 읽는 서재이다.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에 설치한 차양이 다른 건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선향재(善香齋)’는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라는 뜻이다. 책을 보관하던 곳이기에 좋은 향기란 책 향기를 가리킨다.
연경당 앞 원경
창덕궁 농수정(濃繡亭) 주련(柱聯) 八 句
五色天書詞絢爛(오색천서사순란) 오색의 임금 조서(詔書)는 글이 아름답게 빛나고,
九重春殿語從容(구 중춘전어종용)구중궁궐 봄 전각(殿閣)에는 말씀 조용하시네.
春水方生華來鏡(춘수방생화래경)봄 물은 막 불어나고 꽃은 거울에 비쳐오니,
吾廬可愛酒滿床(오려가애주만상)내 오두막 사랑스럽고 술은 상에 가득하네.
如斯嘉會知難得(여사가회지난득)이 같은 좋은 모임을 얻기 어려움 알겠는데,
常駐詩人若有緣(상주시인약유연)항상 머무는 시인은 마치 인연이나 있는 듯하네.
漢魏文章多古質(한위문장다고질)한위(漢.魏)의 문장은 예스럽고 질박한 맛이 많으며,
春秋風日長精神(춘추풍일장정신)춘추(春秋)의 풍기(風氣)는 정신을 길러 주도다.
연경당의 동쪽 돌계단 위에 지은 정자이다. 겹처마 네모지붕으로 꼭대기에 절병통 15)이 꽂혀 있다. 정면 측면이 각 1 칸씩이고 완자[卍字] 무늬의 사분합(四分閤) 16) 문으로 구성하여 모두 들어 올릴 수 있게 했다.
‘농수(濃繡)’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의미이다. 연경당의 구석 깊숙이 자리하여 녹음에 둘러싸인 풍경을 표현한 이름이다.
승재정
창덕궁 승재정(勝在亭) 주련(柱聯) 四 句
龍蛇亂擭千章木(용사난획천장목)용과 뱀은 천 그루 거목을 어지러이 휘감았고,
環珮爭鳴百道泉(환패쟁명백도천)패옥(珮玉)들은 백 갈래 샘물을 울리는구나.
披香殿上留朱輦(피향전상류주련)피향전(披香殿) 위에서 임금 수레 머무니,
太液池邊送玉杯(태액지변송옥배)태액지(太液池) 연못가에 옥 술잔을 보내오네.
위치와 연혁 : 폄우사((砭愚榭) 남쪽의 가파른 언덕 위에서 관람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이다.
뜻풀이 : ‘승재(勝在)’는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이다.
‘승(勝)’은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나 고적(古跡)’을 가리킨다.
폄우사
창덕궁 폄우사(砭愚榭) 주련(柱聯) 八 句
南苑草芳眠錦雉(남원초방면금치)남쪽 동산 풀 고우니 아름다운 꿩이 졸고 있고,
夾城雲暖下霓模(협성운난하예모)협성에 구름 따뜻하니 무지개가 내려오네.
絶壁過雲開錦繡(절벽과운개금수)절벽에 구름 지나가니 수놓은 비단이 펼쳐지고,
疎松隔水奏笙簧(소송격수주생황)성긴 솔이 물 건너편에서 생황을 연주 하네
林下水聲喧笑語(임하수성훤소어)숲 속 아래 물 소리 웃음소리인 양 떠들썩하고,
畵閣條風初拂柳(화각조풍초불류)아름다운누각 한 줄기 바람은 버들을 막 스치고,
巖間樹色隱房櫳(암간수색은방롱)바위 사이 나무 빛깔은 방 창살을 숨기고 있네.
銀塘曲水半含苔(은당곡수반함태)은빛 연못 물굽이에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위치와 연혁 : 존덕정의 서남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정자다. 효명세자가 들러서 독서하던 곳이다. 건립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소한 18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뜻풀이 : ‘폄우(砭愚)’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이다.
취한정
창덕궁 취한정(翠寒亭) 주련(柱聯) 一十一 句
一庭花影春留月(일정화영춘류월)온 뜨락의 꽃 그림자에 봄은 달을 붙잡고
滿院松聲夜聽濤(만원송성야청도)집안가득 솔바람 소리는 밤에 파도 소리 듣는 듯.
九天露湛金盤重(구천로담금반중)구천(九天)의 이슬이 짙어 금반(金盤)이 무겁고
五色雲垂翠盖凝(오색운수취개응)오색의 구름이 드리워 푸른 지붕을 감싸네.
寶扇初開移玉座(보선초개이옥좌)화려한 부채 막 펼쳐 옥좌(玉座)를 옮기시니
華燈錯出暎朱塵(화등착출영주진)꽃 등불이 어지러이 붉은 장막을 비추누나.
鸞輿逈出千門柳(난여형출천문류)난여(鸞輿)가 멀리 일천대문 버들을 지나서 나와
閣道廻看上苑花(각도회간상원화)각도(閣道)에서 고개 돌려 상원 꽃을 바라보네.
種成和露桃千樹(종성화로도천수)이슬 머금은 천 그루 복숭아를 심어 놓고
借與摩宵鶴數群(차여마소학수군)하늘 높이 나는 학 여러 마리에 내어 주었네.
拂水柳花千萬點(불수유화천만점)물을 스치며 버들 꽃이 천만 송이 피었고
위치와 연혁 : 옥류천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정자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숙종 이전부터 독서와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8개의 사각 기둥에 본래 12개의 주련이 걸려 있었으나, 현재 1개가 누락되어 11개만이 걸려 있다. 왕유의 위 시 중, 경련 “雲裏帝城雙鳳闕, 雨中春樹萬人家”는 경복궁 함화당과 창덕궁 연경당, 한정당의 주련으로 씌여 있다.
뜻풀이 : ‘취한(翠寒)’은 ‘푸르고 서늘하다[翠寒]’는 의미로서 푸른 숲으로 감싸여 서늘하다는 의미이다.
옥류천 암각
창덕궁 옥류천(玉流川) 오언절구 시
飛流三百尺(비류삼백척)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遙落九天來(요락구천래)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더니,
飜成萬壑雷(번성만학뇌)갑자기 온 골짜기 우레 소리 이루었네.
‘옥류천(玉流川)’은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이다.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로서 1636(인조 14)년 가을에 바위를 뚫어 샘물을 끌어들여 바위 곁을 빙 돌아서 정자 앞에 이르러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바위에 ‘옥류천(玉流川)’이라고 새긴 세 글자는 인조가 직접 쓴 글씨이다. 그 바위 글씨 바로 위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오언 절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옥류천 위치
존덕정
창덕궁 존덕정(尊德亭) 주련(柱聯) 六 句
盛世娛遊化日長(성세오유화일장)태평성세에 즐겁게 놀며 덕화(德化)의 날은 기니,
群生咸若春風暢(군생함약춘풍창)온갖 백성 교화되어 봄바람 화창하네.
庶俗一令趨壽域(서속일령추수역)뭇 백성들 한결같이 태평성대로 나아가게 하고,
從官皆許宴蓬山(종관개허연봉산)근신(近臣)들도 모두가 봉래산 잔치에 허락 받았네.
艶日綺羅香上苑(염일기라향상원)고운 봄날 비단 치마는 상림원(上林苑)에 향그럽고,
沸天簫鼓動瑤臺(비천소고동요대)하늘까지 솟는 피리북소리 요대(瑤臺)를 뒤흔드네.
위치와 연혁 : 관람정이 있는 연못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으며 1644(인조 22)년에 세웠다. 『육모정의 가운데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희롱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정자의 격식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 준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존덕정 북쪽 창방에는 정조(1752~1800년)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가 목판에 새겨져 있다.
昌德宮 柱聯(창덕궁 주련)
柱聯(주련)이란 원래는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귀로서 기둥(주.柱)마다 시구를 연달아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고 하였다. 또는 얇은 판자에 새겨 걸었던 것이 후대에 발전하여 지금은 일정한 양식을 갖춘 주련으로 발전했다.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은 판자에 새겨 걸기도 한다. 판자 아래위로 하엽(荷葉)을 양각(陽刻)하든지 연꽃을 새기든지 당초무늬를 새기든지 하여 윤곽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어 새김질 하는데, 글씨의 윤곽만 새기는 기법을 쓰는 것이 보편적인 방식이다.
양각한 부분과 새김질한 글씨에 색을 넣어 장식한다. 판자 전체에는 보통 밀타승(密陀僧)을 발라 하얗게 만들고, 글씨에는 먹을 넣든지 군청(群靑)을 가칠하고, 양각한 무늬들은 삼채(三彩) 정도로 단청하여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사찰 경내의 주련은 판 위 아래에 연잎이나 연꽃, 혹은 당초무늬를 새겨 다듬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는데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써 넣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 한 특징이 있다. 내용은 부처님 말씀이나 선사들의 법어가 주 내용이다.
다락에서 내려다보이는 좋은 경개(景槪)를 읊은 시가 주련에 채택되고, 포교를 위함에 자연스레 읽히게 디는 고지(誥知)의 생각으로 본다.
일반 민가에서도 안마당을 향한 기둥에 주련을 거는데, 생기복덕(生氣福德)을 소원하는 내용이나 덕담의 글귀를 필치 좋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받아 건다. 아이들의 인격함양을 위한 좌우명이나, 수신하고 제가하는데 참고가 되는 좋은 시를 써서 건다. 한 구절씩을 적어 네 기둥에 걸면 시한수가 되는 주련이다.
주련은 경승지에 세운 누각(樓閣)이나 다락집, 길가의 패루(牌樓)나 정려 등에 주련을 걸어 주인공을 선양하는 일도 이런 데서 연유하고 있다.
참고인용 : 문화재청 간행 「궁궐 주련의 이해」
불로문(창덕궁 후원, 애련지와 의두합)
【창덕궁 규장각】
규장각 주합루 부용지
【창덕궁 규장각 팔경시】
창덕궁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 칠언율시(七言律詩) 八 首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一
봉모당(奉謨堂)의 은하수[雲漢]
森羅寶帙誕垂昆(삼라보철탄수곤) 방대한 왕가의 문헌 후손에 전하니,
盛德千秋不可諼(성덕천추불가훤) 성한 덕 천추에 잊을 수 없겠네.
聖祖神孫心法授(성조신손심법수) 성조와 신손이 심법으로 주고받아
天經地緯典刑存(천경지위전형존) 천지의 도 따른 법도가 남아있네.
休光每護昭回字(휴광매호소회자) 아름다운 은하수 빛 항시 밝게 비추고
元氣長留灝噩言(원기장유호악언) 왕성한 기 뜻 깊은 말씀 길이 머물렀네
雲際巋然高閣出(운제귀연고각출) 구름 가에 높은 집 우뚝 솟았는데
皇宬舊事大朝援(황성구사대조원) 황성 옛일은 조정에서 본받은 것이네.
註解
황성(皇宬) : 명(明) 나라의 장서각(藏書閣)인 황사성(皇史宬)을 말한다. 이 집은 명나라 궁중에 있었으며, 실록(實錄)과 비전(祕典)을 간직하였다.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二
서향각(書香閣)의 연꽃과 달
田田荷葉月蒼茫(전전하엽월창망) 동글동글 연잎에 달빛은 푸르러 아득해,
書閣微風五夜涼(서각미풍오야량) 서향각 산들바람에 깊은 밤이 서늘하네.
素影流空通御氣(소영유공통어기) 달빛 공중에 가득하니 궁중에 통하였고,
朱華冒水散天香(주화모수산천향) 연꽃은 물 위에 덮여 천향이 흩어지네
金貂班襯玲瓏艶(금초반친령농염) 금초반 속옷 영롱한 빛 곱기도 한데,
白獸尊翻瀲灩光(백수존번렴염광) 뚜껑에 백호 그린 잔에 넘치는 술 출렁이네.
不是宸心懷宴樂(불시신심회연락) 임금 마음 연락만을 생각함이 아니요,
靈臺靈沼慕周王(영대영소모주왕) 주 문왕의 영대 영소 사모함이라.
註解
금초반(金貂班) : 귀신(貴臣)과 시종(侍從)을 말한다.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처음 만들었다 한다. 북방에서는 춥기 때문에 본래 초피(貂皮)와 난액(暖額)을 관에 붙였는데, 후에 수식(首飾)이 되었다.
백수준(百獸尊) : 뚜껑에 백호(白虎)를 그린 술잔이다. 옛날에 정월 초하룻날에 이 술잔을 대궐 뜰에 놓아두고 곧은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으니, 말하는 자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하고자 한 것이라 한다.
주 문왕(周文王)의 영대 영소 : 「시경 대아 영대<詩經 大雅 靈臺>」에 “문왕이 영대를 짓는데 백성들이 일을 도와 불일성지(不日成之)했으며, 왕이 영소를 지으니 아름다운 물고기가 뛰논다.” 하였는데, 맹자(孟子)는 이를 찬양하여 “문왕이 백성의 힘을 빌어 대를 짓고 못을 팠으나, 백성들은 그의 덕화에 젖어 도리어 즐거워했다.” 라 하였다.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三
규장각(奎章閣)에서 선비를 시험하다
奎躔新閣鬱嵯峨<규전신각울차아> 새로 지은 규장각 높고 높은데,
卽看文章濟濟多<즉간문장제제다> 허다한 좋은 문장 이미 보았네.
吉士來歸思棫樸<길사래귀사역박> 길사들이 모여 드니 역복을 생각하고,
英材振作詠菁莪<영재진작영청아> 영재가 진작되니 청아를 읊네.
漢庭親發賢良策<한정친발현량책> 한 나라는 현량책을 시행하였고,
唐殿時開博學科<당전시개박학과> 당 나라는 때로 박학과를 열었네.
誰是鸞鳳珍彩備<수시난봉진채비> 난봉의 풍채 갖춘 사람 그 누구인가
熙朝近日禮爲羅<희조근일예위라> 요사이 밝은 조정에서 예로 맞아들이네.
註解
역복(棫樸) : 더부룩한 나무로서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 “더부룩한 나무가 있으면 땔감이 될 것이고, 훌륭한 선비가 있으면 문왕(文王)을 도와 나라 일을 한다.” 하였다. 현재(賢才)가 많음을 비유한 것.
청아(菁莪) : 무성한 쑥으로서 「시경(詩經) 소아(大雅)」청청자아(菁菁者莪)의 편명을 줄인 말」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읊은 것이다.
한(漢) 나라 현량책(賢良策) : 한 문제(漢文帝)가 조서(詔書)하여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문학(文學)ㆍ재력(材力)의 4과(科)를 두고, 재주 있는 선비를 들어서 차서를 따르지 않고 등용했다.「한서 문제기.漢書 文帝紀」
당(唐) 나라 박학과(博學科) : 당 나라 개원(開元) 19년에 학식이 많고 글 잘하는 사람을 시험 보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를 두었다.「당서 육지전.唐書 陸贄傳」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四
불운정(拂雲亭)에서의 활쏘기[觀德]
分曹秩秩降登時<분조질질강등시> 질서 있게 무리지어 오르내릴 때,
畫鼓聲傳颺錦旗<획고성전양금기> 소리 울려 퍼지고 비단 깃발 나부끼네.
蒼檜雲晴遙辨鵠<창회운청요변곡> 푸른 전나무에 구름 개니 표적 빛깔 뚜렷하고,
金莎塵宿正翻麋<금사진숙정번미> 금잔디 깨끗하니 과녁도 번뜩이네.
明之已審虞臣戒<명지이심우신계> 총명은 이미 순 임금 신하에 경계한 것 살폈고,
爭也須思魯聖儀<쟁야수사노성의> 다투면서 생각할 건 공자가 말씀하신 우의일세.
昭代修文非貫革<소대수문비관혁> 좋은 시대 문덕 닦아 과녁 꿰뚫는 것 숭상치 않으니,
心平體直把弓宜<심평체직파궁선> 마음 평탄하고 몸 곧음이 활 잡는 바른 자세일세.
註解
총명은 …살폈고 : 「서경 우서 익릉.書經 虞書 益稷」에 순(舜)이 말하기를 “완악하고 참소하여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과녁을 베풀고 활쏘기를 하여 밝혀낸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는 활쏘기로서 덕행(德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을 가려낸다는 말이다.” 하였다. 순의 신하인 우(禹)는 이 말을 듣고 경계하여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덕으로 온 천하를 밝히면 만방 백성들이 모두 임금의 신하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다투면서 …… 위의일세 : 「논어 팔일.論語 八佾」에 “군자(君子)가 다투는 일이 없지만, 활쏘기에서는 재주를 다툰다. 읍(揖)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리고 맞추지 못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서 벌주를 마시니, 그 다투는 것이 군자다.” 하였다.
과녁 꿰뚫는 것 숭상치 않으니 : 「논어 팔일.論語 八佾」에 “활쏘기에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옛날의 도다.” 하였는데, 그 주에 “활쏘기란 덕을 보는 것이므로 맞추는 것을 중시하고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힘이 강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五
개유와(皆有窩)의 매화와 눈
樓臺極望皓無垠<누대극망호무은> 누대에서 바라보니 끝없이 흰데,
梅是瑗瑤雪是銀<매시원요설시은> 매화는 구슬 같고 눈은 은이네.
閶闔光搖元不夜<창합광요원불야> 궐문에 빛 움직이니 불야성으로,
罘罳香護已先春<부시향호이선춘> 대궐 처마에 향기 도니 봄소식 먼저 왔는가.
黃扉早得調羹手<황선조득조갱수> 좋은 인재 얻어 재상의 일 맡겼고,
白屋方推挾纊仁<백옥방추협광인> 선비들도 따뜻한 덕화 입었네.
佇待花時新雨露<저대화시신우로> 기다리노니 꽃피는 새봄의 비와 이슬이,
恩覃物物與人人<은담물물여인인> 모든 생물 모든 사람에게 뻗어갔으면.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六
농훈각(弄薰閣)의 단풍과 국화
風物蕭晨霽景澄<풍물소신제경징> 가을 풍경 소슬한데 갠 경치 더욱 맑고,
禁園楓菊映觚稜<금원풍국영고릉> 궁중의 단풍과 국화 전각 추녀에 비추네.
乾坤霜露繁華最<건곤상로번화최> 서리 내리는 계절에 가장 빛나서,
草樹池臺點染能<초수지대점염능> 수풀이나 못가를 점점이 물들이네.
豹尾中間錢箇箇<표미중간전개개> 표미의 사이에는 국화꽃 또렷또렷,
螭頭上下錦層層<이두상하금층층> 용트림한 돌계단에 단풍잎 층층이 곱네.
詞臣不撰悲秋賦<사신불찬비추부> 글 잘하는 신하 비추부 같은 시 짓지 않아,
法酒宣來氣色增<법주선래기색증> 법주를 하사하니 기색이 돋워 지네.
註解
표미(豹尾) : 천자(天子)의 행차 뒤에 따르는 속거(屬車)를 말한다. 「한서 양웅전.漢書 揚雄傳」에 “속거의 사이나 표미의 속에 끼어 있다.” 하였다.
비추부(悲秋賦) : 전국 시대의 초(楚) 나라 사람인 송옥(宋玉)이 지은 「초사(楚辭)구변(九辨)」을 말한다. 송옥은 굴원(屈原)의 제자로서 그 선생이 쫓겨남을 민망히 여겨 이 글을 지었다.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七
희우정(喜雨亭)의 봄빛
岧嶢鳳閣霱雲籠<요초봉각상운롱> 높직한 봉각에 상서 구름 덮이니,
人在唐天舜日中<인재당천순일중> 사람들은 요순시대에 사는 듯 해.
藹蔚群生霑化澤<애울군생점화택> 번성한 군생들 조화의 덕택에 젖고,
昭蘇萬種扇仁風<소소만종선인풍> 소생하는 만물에 화창한 바람 불어주네.
星回蒼陸祥光遍<성회창육상광편> 새해가 창륙에 돌아오니 상서 빛 퍼지고,
春到靑丘淑氣融<춘도청구숙기융> 봄이 청구에 이르니 맑은 기운 어리었네.
花暖宮城膏雨洽<화난궁성고우흡> 꽃피는 궁성에 기름 같은 비 흡족하니,
萬年枝上是先紅<만년지상시선홍> 만년 가지 위에 꽃이 먼저 붉었네.
규장각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其 八
관풍각(觀豐閣)의 추사(秋事)
觀豐閣下水田寬<관풍각하수전관> 관풍각 아래 논이 넓은데,
王業先知稼穡難<왕업선지가색난> 왕업은 먼저 농사의 어려움 알아야 하리.
禹貢篇留香案讀<우공편유향안독> 우공편은 향안에 두어 읽고,
豳風圖入御屛看<빈풍도입어병간> 빈풍도로써 병풍을 만들어 보네.
初收白雨鋤謠歇<초수백우서요헐> 소나기 지나가니 농부의 노래 그치고,
遍滿黃雲銍響乾<편만황운질향건> 누른 곡식 가득하니 베는 소리 쉴 새 없네.
惻怛宸情民事軫<측항신정민사진> 인자하신 임금 마음 백성을 걱정하여,
每當玉食未甘餐<매당옥식미감찬> 언제나 옥식 대해도 맛을 모르네.
창덕궁 규장각과 팔경 시(奎章閣八景 詩)
기해년 첫가을에 臣 덕무(德懋)ㆍ臣 득공(得恭)ㆍ臣 제가(齊家)ㆍ臣 이수(理修)가 검서관(檢書官)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주상이 규장각 팔경시(奎章閣八景詩)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 덕무 등이 송구하고 감격하여 삼가 백배하고 지어 바치었다. 주상이 각신(閣臣)을 불러 주사(朱砂)로 비점(批點)을 주어 신 덕무의 시(詩)를 제일에 두고, 인하여 신 등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말씀이 정녕하고 상을 차등 있게 주었으니, 아! 성하도다. 이처럼 미천한 신하가 어떻게 이것을 얻었는가. 하늘같이 높고 땅같이 두터워서 종신토록 갚기를 도모하겠다. 신.臣 덕무는 공손히 기록하였다.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으로 시작하여 점차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정조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와 같은 서얼들을 적극 등용한 점이 주목되는 등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았으니 정약용을 비롯한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양성 되게 되어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다.
창덕궁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법을 본받아 새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 이었다.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써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기도 하였다.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각신재직대관좌의(閣臣在直戴冠坐椅)
각신은 근무 중에는 반드시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범각신재직 비공사무득하청(凡閣臣在直 非公事毋得下廳)
각신은 근무 중에 공무가 아니면 청을 내려가지 말라
수대관문형 비선생무득승당(雖大官文衡 非先生毋得升堂)
비록 고관 대신일지라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올라오지 못한다
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각신)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규장각은 각신(閣臣)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접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摛文院)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두었다.
서향각(西香閣)은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 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을 두었다.
개유와와 열고관 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하였는바,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芙蓉亭)을 두었으니, 부용정 에서는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부용정과 주합루
【창경궁 시】
창경궁 함인정 싯귀
추월양명휘<秋月揚明煇>가을 달은 밝게 빛나 오르니,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여름 구름은 봉우리마다 기이하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봄물은 사방의 못마다 가득히 차고,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겨울 묏봉의 소나무는 외롭게 빼어나네.
창경궁 춘당지(좌상단 너머 과거시험장)
창덕궁 애련지 가을
창덕궁 안내도
(글,사진 / 이재신 前 TBC 제작지원국) 지난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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