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살아서 그러함인 가 기억력이 흐려지고 아물거린다. 그러나 아직 아리까리할 정도는 아니다.
지난 70―80년대 인플레가 한참 극심할 때 일이다.
내자(內子)가 우리도 어디서 돈을 변통해서라도 아파트나 땅을 좀 사놓자고 한다.
그러나 내가 무슨 대단한 애국자자라도 되는 양 펄쩍 뛰면서 그래서야 쓰겠느냐고 몇 번이나
강권(强勸)하는 것을 물리치곤 했다. 지금도 그때 그 일이 못내 아쉬운지 내자는 누구는 어디에
집이 몇 채이고 아무개는 땅을 마련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뇌까리곤 한다.
그러면 우리도 좀 마련을 해둘 것 그랬지 하고 지나가는 말로 건성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다.
진정 내심으로 후회하거나 아쉬워 해본 일이 없다. 먼 산 쳐다보며 마이동풍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식주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돈이 필요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큰 일치를 일 생기고 가족 병들어 입원치료 하여야 하는데 돈 없어 쩔쩔매는 심정 그 얼마나
비참하고 답답한 일인가?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 너머로 슬며시 빠져나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본주의 틀에 사는 우리는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
돈 없고 가난해서 비참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우리사회에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2017년의 마지막 날 광주 두암동 아파트에서 엄마가 잘 못 끈 담뱃불에 화마로 숨진 4세· 2세 아들,
15개월 된 딸 3남매가 숨진 것도 그 실은 빈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 ‘할아버지, 할머니 배고파…배고파….’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배고파요’라고 응석을 부렸다. 당시 22세였던 엄마가 남편과 함께 세 남매를 키우던 집안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 집안에는 흔한 라면도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엄마는 친정집에서 용돈 받아 쌀과 간장을 조금씩 사 맨밥에 간장을 비벼 아이들을 먹였다 한다.
엄마는 자녀를 굶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부모로서 견딜 수 없었는지 '차라리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밥이라도 굶지 않는다'고
시부모와 친정부모 앞에서 하소연하며 울었다.
엄마 정씨는 콜센터에서 일했고 아버지는 공단, 술집, PC방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했다.
그러다 막내딸을 임신하고 낳으면서 정씨는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됐다. 아빠는 아르바이트하고 퇴근하다가 다리를 다쳐
더는 일을 하기도 힘들었다.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부부는 기초 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부양 능력이 있는 부부의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러던 지난 2017년 정유년 마지막 날 새벽 아빠가 PC방으로 외출한 사이, 술 취한 엄마의 담뱃불에 화재가 나 세 남매는
세상을 떠났다. 세 남매의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르며 뛰어오는 손자들의 모습이 선하다’고 오열했다. <
세월이 몇 년 흘렀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도 결국 가난에서 온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산계급인 근로자는 자본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당하고 받치게 마련이다.
본래 이 자본주의 사회제도 생리가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이 적용되고 악용되기 때문이다.
갖은자에게는 이 세상이 천국극락(天國極樂)이지만, 갖지 못한 자에게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하기
이를 대 없는 세상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돈이 있어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더 노력해서 깨끗한 부(富)를 형성(形成)하였다면,
아무리 많은 부를 축재하였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코로나 사태가 펜테믹으로 장기화 하고 있다. 경제가 망가지고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이 사태가 끝나면 더욱 빈부편차가 커질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잘 아는 내가 요즈음 부정부패, 사취, 불공정거래,
투기로 불로소득하여 치부(致富)한 자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태를 보며 나는 그 동안 진정 바르게 산 사람인가,
아니면 바보인가를 다시 되뇌이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세운 알량한 인생관, 나름대로의 가치관, 고이 지켜온 윤리,
도덕, 철학 등이 흔들이고 무너질까봐 염려스럽다. 아니 겁(怯)이 털썩 난다.
누구를 탓하며 원망하리오... 내가 자초(自招)한 일인데... 모두 자업자득인 것을...
떠가는 구름 한 점 응시(凝視)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