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시즌초반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LG는 4월26일 1위로 도약한뒤 9월10일 한국시리즈 직행을 결정지었다. 4월26일 이후 단 한차례도 수위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지난해 줄곧 2위를 지키다가 116일만에 3위로 추락하고 결국 4위로 주저앉은 것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 한해였다. 4월26일 적지 청주에서 한화를 꺾고 선두에 나설 때만 해도 초반이라 순위가 뒤바뀔 여지는 많았다.
94시즌 초반레이스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해태, 한화, 롯데, 쌍방울이 번갈아가며 꼴찌로 주고받았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해태와 강병철 감독을 새로 엽입하고 의욕에 차 있던 한화의 꼴찌 추락은 전혀 뜻밖이었다.
해태는 국보급투수 선동열이 구원에서 잇달아 실패하면서 혹독한 홍역을 치렀다. 소수정예의 엘리트야구는 매스컴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곪았던 환부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투자에 인색하다는 해태구단의 아킬레스건이 되풀이해서 지적받았다.
그러나 ‘우등생’들로 똘똘 뭉친 해태는 다시 저력을 발휘했고 그러면서 근본적인 문제는 또다시 감춰졌다.
말썽의 꼬리를 남기고 팀을 옮긴 강병철감독의 한화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90년 수석코치로 재직했던 시절의 한화 모습이 아니었다. 괴력을 발휘한 TNT타선은 실종됐고 강감독의 ‘몽당연필 타법’이 자리잡았다. 다행히 한용덕―정민철이 이끄는 선발 쌍두마차와 마무리로 전환한 좌완 구대성의 호투로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따는데 성공했다.
쌍둥이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면 태평양 돌핀스는 1급 태풍의 주인공이었다. 부상병동의 환자들이 속속 일선에 복귀, 안정된 전력을 과시했다. 올시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정명원의 재기성공이었다. 특유의 빠른 볼이 되살아나 해태 선동열이 지난해에 세운 구원부문 기록들을 모조리 경신했다. 올스타경기에서 서군 추천선수로 뽑힌 정명원은 게임은 지고도 올스타 MVP에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시즌 중반만 해도 LG의 선두질주는 이변으로 보였다. 그러나 전반기 막판부터 가속엔진을 달면서 LG의 1위 유지는 거칠 것이 없었다. LG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전적과 팀성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정규시즌 1위였다.
LG는 81승45패로 승률 0. 642를 마크했다. 90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와 마찬가지로 무승부가 한게임도 없는 것도 특이했다. 81승은 92년 한화, 93년 해태의 시즌최다승과 타이다. 팀방어율(3. 14)과 팀타율(0. 282)은 전체 1위였다.
안방이나 적지에서도 수위팀의 자존심은 돋보였다. 홈에서 45승18패 승률 0. 714를 올렸으며 원정경기에서는 36승27패 0. 571을 마크했다. 홈, 원정 모두 8개구단 최고승률이다. 월별승률도 5할밑으로 처진 적이 없었다. 가장 고전한 달이 6월로 13승12패였다.
전반기 때는 팀타율이 3할대까지 수직상승, 화끈한 몰아치기로 상대 투수들의 얼을 빼놓았다. 후반기에는 끈질긴 승부로 짜릿한 역전극을 자주 펼쳤다. 역전승이 33회. 홈구장에서 끝내기 승부만 해도 9차례나 일궈내 잠실팬들에게 야구의 진수를 만끽케 했다.
올시즌 LG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연패와 연승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3연패를 3차례 당했고 연승행진은 5승이 최고였다. 3연패를 했다고 해도 특정팀에게 3연전을 싹쓸이당한 적은 없었다. 3연전을 치르면서 삼성, OB, 롯데에게만 각각 한차례씩 1승2패의 열세를 보인 적이 있었을 뿐이다.
팀간 전적에서는 7개팀 모두에게 앞섰다. 8승10패를 거둔 롯데가 가장 근접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옥의 티’라면 해태 조계현에게 지난해 포함, 11연패의 늪에 빠져 천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다. LG에게 유독 강했던 OB 이광우까지도 꺾었기에 조계현 콤플렉스를 씻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쉬웠다.
또하나의 특징은 투타의 밸런스를 이뤄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도 이상훈의 다승 공동1위 외에는 개인타이틀이 없다는 것. 그러나 페넌트레이스 1위를 뒷받침하는 장외기록은 풍성했다.
서용빈―유지현―김재현으로 이어지는 신인3총사는 최다안타부문 2~4위를 차례로 마크했다. 신인들이 최다안타부문에서 이렇게 줄줄이 늘어선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기록경신은 서용빈이 앞장섰다. 8월14일 99경기만에 134안타를 뽑아 지난해 해태 이종범이 세운 신인 최다안타(133개)를 가볍게 넘어섰다.
이어 신인3총사들은 팀내 최고성적을 차례차례 고쳐나갔다. 서용빈이 가장 먼저 최다안타부문(92년 김상훈의 138개) 기록을 깨자 유지현 김재현이 뒤를 이었다. LG의 최고기록들은 신인들의 손을 뻗으면 더이상 존재할 수가 없었다.
최다안타에 이어 어린 김재현이 시즌최다타점기록을 경신했다. 이 부문의 종전기록도 92년 김상훈의 77개였다. 타점타이틀을 놓고 삼성 양준혁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인 김재현은 80타점을 마크했다.
유지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태 이종범에 이어 92년 한화 장종훈이 엮어낸 시즌최다득점(106)을 돌파했다. 그리고 시즌최다타석(574 종전은 92년 이순철의 566)과 팀내 시즌 최다도루(85년 김재박 50개)를 바꿔놓아 역대 최고의 톱타자로 손색이 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팀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월16일 베테랑 정삼흠이 OB를 상대로 10승고지에 합류, 팀 창단이후 최초로 10승투수 4명을 한시즌에 배출했다. 유지현과 서용빈은 전경기에 출장, 한팀에서 신인 2명이 동시에 전경기에 출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넓은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LG로서는 김재현(20) 유지현(15) 한대화 노찬엽(이상 10개)등 4명이 동시에 두자리수 홈런을 친 것도 4명의 1백안타이상 기록과 함께 의미가 있었다.
활화산처럼 터진 공격력은 상하위타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들어간 결과였다. 선발타자 전원안타 게임을 10차례나 만들어낸 진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김재현(80) 서용빈(72) 한대화(67) 노찬엽(59) 박종호(56) 유지현(51) 등 6명의 타자가 한팀에서 동시에 50타점이상을 뽑은 것도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앞으로도 이런 풍성한 팀기록은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시즌 LG의 상승세는 ‘싸움닭’ 조계현 외에는 아무도 못말렸다. 올시즌 최고의 구원투수 태평양 정명원도 시즌 말미에 무참히 깨졌고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도 잠실구장에서 격추됐다.
정명원이 먼저 쌍둥이에게 스타일을 구겼다. 8월26일. LG는 2―0으로 앞서가다가 4회 선발 김태원이 포볼과 집중3안타를 얻어맞아 2―3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태평양은 뒤이어 8, 9회 1점씩을 보태 스코어는 5―2, 승리가 굳어지는 듯했다.
정명원은 8회말 2사1루서 구원투수 나성열이 서용빈에게 좌전안타를 허용하자 발등의 불을 끄려고 나왔다. 김동수가 3루땅볼로 물러나 새삼 정명원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LG의 9회말 마지막 공격. 톱타자 유지현이 정명원을 물고 늘어진 끝에 포볼을 골랐다. 2번타자 최훈재도 정명원의 구위가 눈에 띄게 줄어든 틈을 타 포볼로 출루했다.
이 무렵 타격슬럼프에 빠져 있던 김재현은 1루수 파울플라이로 잡혀 원아웃. 비록 정명원이 전날 롯데전에서 3이닝을 던져 지친 기색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의 관록으로 볼 때 3점리드 속에서 아웃카운트 둘을 보태는 건 문제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타 박준태마저 포볼을 얻어 1사만루가 되자 장내에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LG가 역전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노찬엽이 정명원의 바깥쪽 볼을 2타점 우전안타로 연결시켰다. 4―5.
이번에는 김선진이 좌전안타를 터뜨렸다. 드디어 5―5 동점. 태평양으로서는 소방수 정명원을 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1사2, 3루서 박종호가 볼카운트 2―3에서 삼진당해 연장전에 돌입할 듯한 분위기였다. 정명원이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타석에 선 서용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명원을 끝내기 우전안타로 두들겼다. 2―5이던 스코어를 6―5로 뒤집는 순간이었다.
정명원이 끝내기안타로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면 선동열은 끝내기홈런에 울상을 지어야 했다. 9월8일 잠실구장. 정규시즌 마지막 만원사례를 써붙인 경기였다. 안타수는 해태가 12―5로 월등 앞섰으나 스코어는 그에 정비례하지 않았다.
6회말까지 해태의 3―1 리드. LG는 5회말 2사1루에서 김정민이 김정수로부터 빼앗은 팀의 첫안타가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가 되면서 간신히 1점을 만회한 것이었다. 6회들어 선발 김정수와 구원 송유석이 잇달아 컨트롤 난조를 보이며 2사만루의 핀치에 몰리자 선동열이 등판했다. 고려대 후배 노찬엽은 선동열의 직구를 냅다 두들겼다. 싹쓸이 3타점 3루타. 그것으로 스코어는 4―3으로 역전됐으나 LG도 구원 차동철과 차명석이 각각 1점씩을 내줘 전세가 다시 4―5로 뒤집혔다.
게임이 8, 9회를 남겨둔 종반이고 해태 마운드가 선동열임을 고려하면 승산은 틀림없이 해태쪽에 있었다. 선동열은 노찬엽에게 한방을 맞는 바람에 김정수에게 돌아갈 승리를 날려버리고 쑥스러운 승리를 제 몫으로 챙길 참이었다. 7회 포볼로 출루한 유지현이 눈에 거슬려 견제구를 자주 던지다 보크를 범한 선동열은 8회 들어서는 안정을 되찾아 삼자범퇴로 넘겼다. 9회 1사후 노찬엽이 이번에는 슬라이더를 노려 중월3루타로 포문을 열었다. 1사 3루서 대타 허문회가 또다시 우익선상 3루타를 날려 5―5 동점. 김이 샐대로 샌 선동열은 9번타자 김정민에게 무심코 몸쪽 직구를 꽂아넣으려다가 고개를 숙이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딱 소리가 나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했으니까.
126게임을 치르는 동안 LG팬들은 통쾌하고 후련한 야구를 만끽했다. 이광환감독의 야구에는 색깔이 없다는 일부의 지적은 설득력이 없었다. LG의 게임을 직접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첫댓글 저 경기 아직도 기억나네요..허문회선수가 3루타 쳤을때 방방뛰고 난리도 아니었었는데..조금있다가 따악~~~하는소리와 함께..넘어간 홈런에..기절한 저..ㅋㅋㅋ
저도 이글시리즈를 몇번째읽는데여..읽을때마다 그때의 감동이...ㅠ.ㅠ 06시즌에는 다시한번 그때의 감동을 느낄수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진로님은 아직 개순철 에게 바라시는게 너무 많은신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