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이 詩句를 처음 배운 것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문서당에서였다.
꽃은 웃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새는 울지만 눈물을 볼 수 없네
왜 좋은지 분석 능력은 없었지만, 한시(漢詩)를 처음 배우던 때라, 어린 내 마음엔 어쩐지 좋았다. 딱 들어맞는 對句가 좋았던지, 그 표현기교가 좋았던지는 모르되, 어떻든 이 詩句는 나의 머리에 박혔고, 그로 인해 꽃이 좋아졌다. 그래서 '올래' 모퉁이에 채송화니 봉선화니 몇 그루 심어 꽃 피기를 기다렸던 때가 어제 같다.
그런데, 그 후 학교에 들어와 이과(理科)시간 공부를 하고 자연에 대한 견식이 조금 넓어지다 보니, 꽃은 소리 없이 웃는 것이 아님을 차차 알게 되었다. 꽃에는 수술 암술이 있고, 벌이나 나비가 와서 꿀을 따 가는 사이에 자연히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는 생식기관이다. 그 보드라운 꽃잎을 가지런히 벌려 빛깔을 자랑하고 향기를 내뿜는 것은 벌이나 나비를 유인하여 스스로 생식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또 벌이나 나비가 암술과 수술을 교배시켜 주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먹어 살기 위해 자기의 식량을 찾아 채취작업을 하는 것에 불과 하다. 그게 자연의 교묘한 솜씨에 의해 꽃의 생식을 매개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꽃은 사람을 위해 소리 없이 웃는 것이 아니요, 또 애초부터 사람의 구경거리를 위해 피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멋대로 해석하여 꽃이 웃는다고 노래도 하고, 또 꽃을 여인에다, 벌이나 나비를 남자에다 비유하여 '탐화봉접(探花蜂蝶)'이니 운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짓이냐.
가령, 가장 고결하다는 국화를 놓고 보라. 이미 서릿발이 차가운데 오돌오돌 떨며 꽃을 피운다. 찾아올 나비라도 있으면 몰라도 이미 그런 계절이 지났는데 생식기관을 내벌려 아무리 향기를 내뿜으며 뽐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식물학적 지식으로는 국화의 수술 암술이 어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놈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불임증의 병신 꽃임에 틀림없다. 이 병신 꽃을 놓고 '오상고절(傲霜孤節)' 운운하여 절개를 숭상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하는 것이다. 병신 꽃은 국화꽃만이 아니다. 요새 비닐 재배니, 온실 재배니 하여 곱다는 꽃은 다 재배해 내 놓는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을 가을에 피우고, 여름에 피어야 할 꽃을 겨울에 피워 꽃가게에 내어 판다. 이 꽃들은 계절감각을 잊어버려 어정쩡하다. 온실 안에 있을 때는 여름인가 해서 꽃을 피웠는데, 바깥에 나오고 보면 벌도 나비도 없는 한겨울, 그래서 정신이상이 되어 버린 꽃이 된다. 이런 꽃을 꽂아 놓고 좋다고들 하는 인간이 얼마나 제멋대로이냐.
거듭 말하지만, 꽃의 본질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생식기관이요, 꽃이 곱다, 향기롭다 하는 것은 벌이나 나비를 유인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이를 놓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 '웃는다'니 뭐니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그리고 또 자연의 섭리를 조작하여 제철이 아닌 꽃을 온실에서 재배하는 따위 가혹한 짓은 할 짓이 못된다. 이게 바로 근래까지의 꽃에 대한 나의 지식이요, 견해였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조물주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꽃에 대한 심미감(審美感)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꽃을 놓고 아름답다느니, 웃는다느니, 여자 같다느니 하는 것을 못 느끼지만, 인간은 그것을 느낄 줄 안다. 그런 정서를 조물주는 인간에게만 배려해 주었다. 꽃이 종족을 번식시키는 생식기관이라는 자연의 섭리는 자연의 세계로서 엄연히 존재시키면서 인간에게는 이 자연의 세계를 별도로 정서로써 받아들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 것이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꽃 한 송이가 헤어지는 우정을 다시 맺어주고, 병상에 누운 연인에게 삶의 의지를 준다. 축복하는 한 아름의 마음을 전해 주기도 하고, 죽음에의 명복을 빌어 영혼의 한을 달래기도 한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꽃 한 송이로 생명력을 되찾은 일도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것이 모두 꽃을 보고 '웃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감성 때문이다. 이 감성의 특별한 부여, 이 또한 자연의 섭리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역시 어린 때의 생각대로 좋은 시라는 것을 새삼스러이 느끼며, 역시 꽃을 가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현용준)의 수필집 <황혼의 언저리>에서
첫댓글 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