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탕과 조림, 찜은 늘 먹어 왔던 우리네 음식이었다. 찌개는 커서야 알게된 음식 조리법으로 물 양을 국과 탕의 중간쯤 붓고 되직하게 끓여 오붓하게 먹던 변형된 국의 하나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하는 시점에 발달한 시대의 산물이다.
음식의 양이 질보다 중요했던 시절, 가락으로 쭉 뽑혀 나오는 국수 종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터국수, 잔치국수, 콩물국수는 이른바 육수(肉水)라 하는 국물이 적지 않게 들어 있었다. 하기야 춘천 막국수도 한국 전쟁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던 때 '막 만들어 먹었던 국수'였으니 음식이 생활의 반영이었다는 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60년대 초반 최초 생산된 요상한 모양의 라면의 성장에 한몫 단단히 거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국물 문화에 익숙한 탓이었다. 면발만 건져 먹던 기존의 국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식은 밥까지 몇 술 말아 먹으면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게다가 준비된 부재료를 아무렇게나 뜯어 넣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간단한 음식인가?
▲ 튀겨서 틀에 넣고 압축한 꼬불꼬불한 라면발
보기에 따라선 기괴한 형상을 한 딱딱한 라면은 끓는 물을 만나면 확 풀어지는 마술을 부린다. 그리고 한 젓가락 떠서 면발이 혀에 닳으면 야들야들 혀끝을 조롱하는 신선한 맛으로 다가왔다. 누군들 그 맛과 생김새에 빠지지 않곤 배기지 못하였을 획기적인 이 라면이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복조리 마을이 있고 빨치산 전남도당사령부가 있던 궁벽한 산골) 언저리에도 찾아 들었다.
마을 구판장에 가 봐야 '뽀빠이' 몇 봉지와 아이들 이름표 또는 필기구 몇 자루, 저급한 빵 몇 개 있던 곳에 '세발자동차'에 실려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삼양라면'이었다. 겉봉에는 대파가 숭숭 썰려 있고 한우 한 마리도 그려져 있었다. 그 뿐이던가. 노란 생 달걀 하나가 떡 하니 있다.
뽀글뽀글 면발과 라면 국물. 그리고 위에 얹어 있던 쇠고기, 달걀, 대파는 어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군침이 돌았다.
'워메 맛있것는 거. 언제 쩌거 한번 묵어 본다냐?'
구판장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던 나는 문 닫을 때까지 그 앞을 몇 번이나 서성였는지 모른다. 벌써 다른 집들은 한번씩 끓여 먹었을 텐데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버지 덕에 말 한번 꺼내 보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고 있었던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먼저 면만 넣고 끓이는 게 일반적이죠. 김치넣으면 김치라면, 쏘시지 넣고 햄 넣고 마늘 넣고 양파 넣고 떡 넣고 해물 넣으면...
아버지는 미역국도 잘 드시지 않았다. 미끈미끈한 느낌이 싫으신 까닭이다. 여름에도 식은 밥은 절대 손에 대지 않으신 분이다. 무덥던 한여름에도 밥 바구니에 보관된 식은 밥을 가마솥에 다시 깔고 물을 조금 치고 데워 놓지 않으면 진지를 안 드시니 어머니와 누나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보급된 지 얼마 안된 화학 조미료 '미원(味元)'도 거부하셨다. 미원으로 대표되는 조미료가 들어가도 '늑늑하다(맛이 담백하거나 깔끔하지 않고 텁텁하며 밋밋함)'며 물리치셨다. 더군다나 국수도 콩물국수 외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집안 내력에 라면 한번 먹어 보려면 어떻게든 어머니를 조르는 수밖에 없다. 이도 아니면 아버지 출타 중이실 때 몰래 끓여 먹고 라면 봉지를 소각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 이런 나무가 있어야 장작감으로 좋습니다.
"엄마, 성호랑 병주가 근디 라면 허벌나게 맛있데…."
"……."
"엄마 우리도 라면 한번 묵자 응?"
"그려."
"글면 언제?"
"언제 놉(인부) 얻을 때 한번 끓여주마."
"알았어라우. 역시 우리 엄마랑께."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으려고 고샅길 담벼락에 부딪힐 뻔하면서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벌써 산간 마을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후였다. 동네 입구에 있던 구판장 앞에서 라면이 잘 있는가를 확인하고 껑충껑충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던 날은 왜 그리 길던지. 웬만한 일은 식구들끼리 해치우던 때였으니 인부를 불러 일하기로 한 날은 더디 왔다.
"엄마 언제 놉 얻어?"
"모레 나무 내린단다."
▲ 소나무 줄기와 잎이 붙은 채 쌓아 놓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때면 연기 하나도 안 나고 방이 따뜻합니다.
요즘 국세청 세무 조사보다 악랄했던 상감(上監)이 암행 감찰 나오면 시골 깊은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도 허가 받은 간벌(間伐)은 크게 신경 쓸 일이 못되었다. 미리 베어둔 소나무를 솔잎은 가지에 붙여 다발로 묶고 수간(樹幹)은 지게에 지고 내려올 크기로 토막내 신작로 인근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했다.
이런 큰 일에는 위에서 나무를 끌어내리는 것을 돕는 우리 형제들과 동네의 실한 청년 또는 힘이 장사인 몇 몇 아저씨들을 포함하면 일꾼은 열 명이 넘는다. 물기 탱탱 스민 생나무를 끌어내리고 지고 내려오는 건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뱃심으로 일하던 시절 날 잡으면 고두밥을 해서 신주단지 모시듯 막걸리 담가 놓고 장까지 봐 왔으니 먹는 양도 농사철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신새벽에 서둘러 바지게에 음식을 지고 나른다.
▲ 작년 MT 가서 먹던 쟁반 라면
아침을 한번 먹고는 또 일이 시작되었다.
"거식아, 구판장에 좀 갔다 오니라."
"왜라우?"
"가서 라면 열 봉만 달라고 해라. 돈은 엄마가 준다고…."
"알았어라우."
산을 뒤에 두고 뛰었다. 구판장에 가서 당당히 말했다.
"거시기 엄마! 거시기 엄마!"
"시방 뭔 일 났냐?"
"헉헉"
"왜 그려?"
"울 엄니가 라면 열 봉 달라그요."
외상으로 산 라면을 들고 산일 하는 데까지 가는데 사러올 때보다 빨랐다. 파란 연기를 내며 백철솥에 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 앞으론 저 같은 사람 나오지 않게 "여기엔 달걀이나 계란은 들어있지 않습니다."라고 꼭 표기하시기 바랍니다.
"엄마? 이상허네."
"뭣이?"
"허, 참. 이상허구만요. 왜 쇠고기랑, 대파도 안 보이고…."
"엄니는 모르 겄는디."
"거기다 달걀은 왜 또 없는 거지라우? 봉지에는 다 들어 있다고 사진이 있는디. 썩을 놈들 우리 것만 다 빼 놓았는갑소."
"이따가 한번 물어보거라."
환장할 노릇이었다. 속았다는 마음에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면을 먼저 넣었다. 처음 끓여 보는 거라 찬찬히 봉지를 보니 5분 정도 더 끓이라고 쓰여 있다. 스프를 그릇에 한데 모아 넣고 쏘시개를 더 가져다가 불을 더 세게 때주자 김이 넘치려 한다.
"아제…. 얼렁 오싯쇼. 국시(국수. 그땐 라면을 국수라고도 했다.) 퍼지요."
국자로 면을 먼저 퍼 담고 국물은 나중에 두 국자 씩 넣는다. 볼그족족한 국물과 면발의 환상적인 결합을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나도 드디어 큰 대접에 한 그릇을 할당받았다.
▲ 얼마 전 노란 양은 냄비를 사서 끓여 먹고 있습니다. 열 전도가 빨라 면발이 퍼지지 않고 쫄깃합니다. 라면 끓이기 전에 꼭 마늘을 넣어 보세요.
젓가락질이 아직 서툴던 여덟 살 소년은 라면을 휘휘 감았다. 입에 갖다대고 한입 후루룩 빨아대니 길게 늘어 뜨려진 가락까지도 땅에 닿지 않고 입 속으로 미끄러져 빨려 들어간다.
"후루룩 훕."
"후루룩 훕."
"훕!"
"쭙!"
씹을 일도 없다. 다른 사람 어찌 먹는지 살필 겨를도 없다. 김치 몇 가닥 주워 먹는 것조차 잊었다. 마지막으로 식은 밥 세 숟가락을 말아서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찔레 열매는 무척 붉었다.
아버지께서는 막걸리 두 잔으로 때우시고 라면을 고깃국보다 맛나게 먹고 있는 막내 아들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고 계셨다. 그 뒤로 우린 합법적으로 노란 양은 냄비에 맛있는 라면을 집에서도 끓여 먹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