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시즌 전국의 프로야구 구장에서 터진 끝내기안타는 총 28개. 이가운데 LG가 잠실에서 홈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7차례를 끝내기안타로 장식,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8개구단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개 이상 끝내기 안타를 친 선수는 없다. 한대화 김영직 김동수 박종호 김정민 서용빈 최훈재 등 영웅의 얼굴들이 제각각이다. 김정민만이 끝내기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시즌내내 이어진 고참과 신인들의 완벽한 조화를 들여다보게 된다. 신인 3총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게 사실이지만 한대화 김영직 김용수으로 이어지는 고참 3총사는 승부의 맥을 짚어나갔다. 주장 노찬엽을 비롯, 최훈재 박준태 등의 중견들도 드러나지 않은 활약으로 한국시리즈 직행에 디딤돌을 놓았다.
9월25일 태평양과의 정규시즌 피날레경기는 94시즌 LG야구의 환호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2년연속 15승을 거두려는 정삼흠은 이광환감독과 김명성 투수코치에게 간청, 선발로 나설 수 있었다. 당초 정삼흠은 9월18일 삼성전을 마치고 한국시리즈에 대비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삼성 양준혁에게 통한의 역전홈런을 허용, 패전투수가 되면서 15승이 무산됐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다시 한번 갖게 된 것이다.
이감독도 정삼흠의 의지를 보고 시즌내내 팀공격을 이끈 주전들을 출장시켰다. 동료들도 정삼흠에게 15승을 안겨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야수들에게는 태평양과의 최종전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미 각부문의 개인타이틀은 굳어진 상태였고 개인성적이 이 한경기로 좌우될 선수도 없었다. 오히려 타율은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신인 유지현은 1회말 태평양 선발 박은진에게 안면을 스치는 데드볼을 맞고도 끝까지 출장하는 투혼을 발휘, 정삼흠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
경기초반부터 두팀은 승패와 관계없는데도 박은진과 정삼흠의 잇단 데드볼로 몸싸움 일보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정삼흠은 아내와 두자녀, 사돈이 현장에서 게임을 지켜보는데도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했다.
점수는 LG가 먼저 뽑았다. 2사1루서 서용빈의 빗맞은 타구가 행운의 좌익선상 2루타가 돼 선취점을 얻었다. 그러자 태평양은 이때까지 호투하던 박은진을 강판시키고 신인 최상덕을 올려보냈다. 15승을 의식한 정삼흠은 변화구 위주로 태평양 타선을 요리해 나갔다.
7회말 태평양 선두타자 윤덕규가 정삼흠이 던진 포크볼 초구를 우측담장으로 넘겼다. 정삼흠이 이날 허용한 첫안타가 동점홈런이 된 것이었다. 정삼흠은 9회초에도 1사후 김인호에게 무심코 높은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좌측폴대를 맞히는 역전홈런을 얻어맞았다.
9회말 LG의 마지막 공격. 한대화와 대타 김영직이 범타로 물러나 투아웃. 정삼흠에게는 15승은 커녕 패전의 멍에만이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김동수가 행운의 중전안타로 출루, 간신히 꺼진 불씨를 되살렸다. 그러나 덕아웃에서 안경을 멋고 땀을 닦고 있는 정삼흠은 이미 패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스위치히터 박종호가 최상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가 좌전안타를 터뜨려 2사 1, 3루를 만들었다. 단타 하나면 최소한 동점은 될 수 있었다. 8번 최훈재 타석에서 박종호가 2루도루에 성공, 2, 3루를 만들었다. 태평양 포수 장광호는 더블스틸을 의식, 2루에 공을 뿌리지 못했다.
좌타자 최훈재. 94시즌 지명타자와 우익수를 오가며 활약한 최훈재는 비록 규정타석에 미달됐지만 타율 0. 322를 마크, 팀공헌도가 높은 선수였다. 볼카운트 1―2에서 휘두른 타구는 태평양 2루수 김성갑의 오른쪽으로 빠지는 역전 2타점 중전적시타가 됐다. 안타와 동시에 그라운드로 가방 먼저 뛰쳐나간 것은 정삼흠이었다. 그는 후배 최훈재를 끌어안고 승리의 고마움을 표시했다. 최훈재의 적시타 덕에 LG는 82년 삼성이후 처음으로 15승투수 3명을 동시에 배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삼성투수들의 승리에 구원승이 포함돼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의 선발 15승이상은 순도 100%를 자랑하는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신인들이 이끌면 고참들은 뒤에서 밀고 중견들은 가운데서 다리역할을 해준 게 LG의 94시즌이다. 따라서 어느 특정선수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팀이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1군에 등록된 모든 선수가 일심동체가 된 결과다.
주장 노찬엽은 탈바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배팅을 앞세우는 타격이 돋보였다. 시즌초반 당한 오른쪽 발가락 부상을 무릅쓰고 홈런(10) 타점(59)은 자신의 시즌최고기록을 경신했다. 비록 100안타(95개)에는 미달한 채 시즌을 마감했지만 2년동안의 부진을 딛고 ‘검객타법’을 재현시켜 주장 몫을 톡톡히 했다.
단체경기에서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팀공헌도가 높은 선수들이 있기 마련이다. 매스컴의 각광도 받지 못하고 연봉도 많지 않지만 그들은 없어서는 안될 선수들이다.
첫 손가락안에 꼽히는 선수가 ‘영감’ 김영직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언제나 역할에 만족한다. 경기전 오더를 봐야 자신의 선발출장 여부를 안다. 지명타자도 좋고 우익수도 좋다. 포지션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타로 나설 때 더욱 빛이 났다. 34살인 김영직의 프로입문은 동기생들에 비해 한참 늦었다. 현역으로 군대에 갔다온 후 실업에서 활동하다가 87년에야 프로유니폼을 입었다. 지난 7년동안 한차례도 규정타석을 채운 적이 없었다. 가장 좋았을 때의 성적이 지난 92년 타율 0. 256, 홈런6, 타점44개를 기록했던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연봉이 3천만원을 넘어섰다.
김영직은 자신을 안다. 솔직히 전경기를 뛸 체력도 안되고 기록에 대한 목표도 없다. 그러나 김영직이 왜 필요한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매듭을 풀어주는 역할을 척척 해내기 때문이다. 올시즌 타율(0. 293)은 프로 8년만에 최고다. 규정타석과는 상관없이 3할을 육박했다. 안타는 53개. 신인 서용빈이 두달동안 친 안타수와 맞먹는다. 그런데 타점은 무려 40개다. 승부와 직결된 알토란 같은 것들이다.
그 자리에 있으면 그의 진가를 모르지만 빈 자리가 훨씬 커보이는 선수가 바로 ‘영감’ 김영직이다.
포수 김동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방위복무와 안방을 지키는 2중고는 후반기부터 눈에 띄게 나타났다. 훈련부족과 체력저하. 군인정신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3할타율과 규정타석을 채우려고 애썼지만 중도에서 포기해야만 했다.
힘든 속에서도 김동수는 신인왕과 골든글러브출신다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타율은 0. 288, 홈런6, 타점 42개로 시즌을 마쳤다. 지난해까지 배터리코치를 담당했던 최정기소장(구리운동장과 숙소책임자)은 광명시에서 출퇴근하는 김동수를 헌신적으로 도와 95게임이나 뛸 수 있게 해주었다.
지난해 4월 돌풍을 일으켰던 박준태는 이렇다할 활약은 없었으나 발군의 수비솜씨로 팀에 기여했다. 지난해처럼 시즌초반에는 힘을 바탕으로 3할대 타율로 상대투수들을 눌렀으나 이후 체력열세가 두드러져 상대투수에 따라 선발 혹은 교체수비요원으로 출장했다.
코칭스태프는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만 당사자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자리도 있다. 이른바 전천후포지션을 맡는 선수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다용도선수(utility player)라고 부른다. 이에 해당하는 선수가 ‘단추’ 이종열이다. 올시즌 3루수―2루수―유격수 등 포지션의 공백이 생길 때마다 그 자리에 나가 대과없이 공백을 메웠다.
베테랑 한대화가 쉬엄쉬엄하면서 지명타자와 3루수를 번갈아가며 출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종열이 뒤에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2루수 박종호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으면서도 그의 공백을 크게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이종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구홍이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만큼 이종열을 전천후내야수로 활용해야겠다”고 전지훈련 때부터 벼르던 이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것. 이감독의 숨은 용병술 가운데 백미를 이루는 대목이다.
사실 이종열에게 남은 것은 없다. 팀은 그를 절실히 필요로 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원래 포지션의 선수가 받기 마련. 연봉이나 많다면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다만 이종열은 고졸출신으로 LG가 2군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라는 점에서 활용도는 클 수밖에 없다.
LG 선수층은 젊다. 따라서 앞으로의 전망도 밝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단체경기는 젊음만으론 성공하지 못한다. 큰 승부에서는 경험많은 베테랑이 진가를 발휘한다. 이런 노소의 조화가 바로 올해 LG가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원동력이다.
첫댓글 주장이던 노찬엽선수를 위해 전 늘 응원했었는데요...쓸쓸히 은퇴를하고 주루코치를 보던 모습을 수원경기장에서 보면서 좀 우울했네요...누구라할거없이 그때 엘지선수들은 신이나있었던 기억이 납니다..올시즌 그런 모습볼수있길바래요^^
감사합니다.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