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역적들 시체처리는 2가지입니다.
첫째는 능지처사 (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 능지처사는 거열형입니다. 진짜 능지처참.능지처사는 중국에서 1905년까지 공식
시행한 소위 포를 뜬다는 거 있죠? 그래서 말그대로 칼로 회뜨듯이 뜨는겁니다.
그래서 끝에는 뼈와 살만 덩그렁이 남는거죠.. 사진이 나와있고 퍼올수 있지만 일부 가슴이 약하신 분들과 여성분들을
위해 사진 안올립니다.)후에 그 시신을 팔도(8도 전국)로 돌려서 보게 합니다.
즉 팔은 강원도. 다리는 전라도 이런식으로요.
흔히 능지처사는 대역죄인이 당하는것이라 그냥 참수와 달리 소달구지나 소에 매달아 사지를 찢는데 이를 육시라고 합니다.
6등분합니다.
즉 우리 욕중에 "이럴 육시할놈 육시럴놈.." 이게 육시에서 나온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는 효수하여 죄의 무서움을 알리고. 시신은 팔도로 돌립니다.
사육신도 그러기전에 (사육신을 역적으로 보기는 뭐하나 세조 당시 집권세력입장에서) 김시습이 시신을 거두어 지금
사육신묘에 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시신의 팔이나 다리는 거지나 부랑인 왈패들이 빼았아서 그걸 가지고 돈을 요구하기도 했답니다.
시신 팔을 가지고 돈 안내놓으면 여기다 던지고 가겠다..
그리고 개나 승냥이같은 들짐승들이 시신을 파먹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공식기록상 마지막 능지처사는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맞은 김옥균의 시신을 청나라가
조선으로 돌려보내자 그의 시신을 능지처사 하고 "대역부도 옥균" 이란 팻말을 건후에..
그의 시신을 팔도로 돌립니다,.
그래서 그의 묘가 2군데 있다 합니다. 하나는 도쿄에 그의 머리카락를 묻은 묘와 또 다른 한국의 묘.
두번째는 부관참시.
압구정 한명회 아시지요? 한명회는 세조(수양대군)때 공신이죠.
성종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첫번째 왕후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병으로 시름시름 죽죠.
이 한명회의 딸이 죽고 등장한 두번째 왕후가 피바람 몰고온 폐비윤씨입니다.
폐비 윤씨의 폐비 공론에 한명회가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아서 연산군의 갑자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즉. 관을 쪼개서 그 관에서 시신을 꺼내 다시 목을 치는 .즉 묘는 파묘하고 시신에 다시 형벌을 가하는거죠.
연산군때 특히 많아서 한치형,한명회,정창손등이 부관참시 되었다 합니다.
광해군때 허균의 아버지도 부관참시되었다 합니다. 허균이 역모로 능지처사 되어서요..
서양에도 부관참시 예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유일한 공화국인 올리버 크롬웰은 아시다시피 찰스 1세 국왕을 처형하고 그 스스로 호국경 자리에 올라
영국에 유일한 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658년에 죽고 아들이 승계를 했지만 곧 왕정복고가 되고 찰스2세가 다시 돌아오자
1660년 왕정복고 후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목을 효수하여 웨스트 민스터 사원 앞에 걸고
그 시신은 버리죠..크롬웰의 목은 미이라 처리가 되어있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그목이 이곳저곳으로 팔렸다 합니다.
1960년 마지막 사람 손에 들어간 이후 그의 목이 다시는 수난을 안당하게 하기위해 은밀한 곳에 묻었다 합니다.
부관참시는 북한에도 있었습니다.
1997년 고난의 행군때 김정일은 서관히를 평양시내에서 총살합니다.
그리고 서관히를 임명한 김만금의 시신을 꺼내서 시신에 사격을 하였다합니다.
현대판 부관참시지요.
1997년은 평양시민들에게도 큰 시련의 해였다. 지방에서는 1995년부터 식량배급이 중단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하지만 평양에서는 1996년 후반부터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 1997년에 완전히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외화를 가진 일부 부유층은 사정이 달랐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먹는 것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식량난에 전기까지 끊기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냉장고」로 변했다.
물이 안 나와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오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평양시민들은 특별대우를 받으므로 식량난과는 무관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평양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장사도 금지되고 주민통제도 지방보다 엄격해 오히려 더 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밟듯 긴장된 나날의 연속이었으며 우리 가족도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겨우 버티어 나갔다. 나는 예술부문에 종사했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배급을 아예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다.
윗집에서는 쑥을 삶아 옥수수가루를 버무려 먹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이 먹는 것인가 싶었다. 베란다에서 토끼와 닭을 키우고 심지어 돼지까지 키우는 집이 생겨났다.
먹을 것이 없어 도시 전체가 뒤숭숭해지고 그야말로 난리가 따로 없었다. 허약한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는 말이 돌더니 조금 지나서는 노인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도 굶어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한다하는 유명 인사들조차 식량 구하러 배낭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게 나라인가 싶었다. 이러다가 정말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7년 8월말 쯤으로 기억된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고사하고 문도 제대로 안 열리는 궤도전차에 오르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히 들어차 사우나를 무색케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직장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공개처형이 있으니 통일거리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통일거리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으로 나오지 말고 바로 현장으로 가라고 했다. 바로 현장으로 가도 된다니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평양시내 모든 직장에는 『통일거리 버스 종점인 승리3동 넓은 공터에서 미제의 고용간첩 서관히를 공개 처형하니 모두 나와 구경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당시 서관히 는 중앙당 농업담당 비서로 그 지위가 남한에 온 황장엽씨 다음다음 서열의 고위층이었다.
크고 작은 행사에서 굵직한 목소리로 연설하던 그를 모르는 북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예전 중앙당에서 일할 때 서관히 비서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지위 높은 간부임을 느끼게 하는 풍채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처형 소식은 더욱 사람들을 자극했다.
공개처형장에 가보니 이미 사람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직장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포기한 채 맨 앞줄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틀고 앉았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분위기도 아주 음산했다.
조금 있으니 서관히 비서와 평남 숙천군의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을 했던 한 여성이 끌려나왔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한 미색 두루마기 형태에 단추대신 끈이 달린 죄수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서관히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빨이 다 뽑혀 입술이 안쪽으로 오그라 붙은 데다 얼마나 말라 비틀어졌는지 뼈에 가죽만 씌운 것 같았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지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윽고 평양시 재판소 소장이 나와 서관히와 숙천군 관리위원장의 죄행을 한 시간 동안 낭독했다.
『서관히는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30년간 암약했으며 당의 농업정책을 말아먹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책동했다. 토양에 맞지 않은 종자와 농약을 사용하게 했고 과일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데도 자르게 해 과일이 열리지 않게 했다』는 등 갖가지 죄목이 열거됐다.
그때만 해도 당에 충실했던 나는 그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으면서도 저렇게 엄청난 거물 간첩을 이제서야 잡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소장은 서관히 비서에게 『할 말은 없는가』하고 물었지만 그는 눈만 껌뻑이며 두리번거릴 뿐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말뚝에 서관히 비서와 여성 관리위원장을 묶어세웠다. 무릎과 가슴, 머리부분에 끈이 묶여 있었고 6명의 보안원들이 자동보총(AK소총)을 겨냥하더니 총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여성 관리위원장은 이마에 총알을 맞고 머리를 떨어뜨리며 즉사했다. 하지만 서관히 비서는 총알을 빗맞았는지 말뚝이 뽑혀 넘어졌고 말뚝에 묶힌 채로 버둥거렸다.
군중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아직 안 죽었다』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보안원들은 버둥거리는 그를 자루에 넣어 자동차에 싣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왜 끝까지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그의 목숨은 끊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서관히 비서가 총살된 후 비슷한 시기 그를 농업담당 비서로 추천했던 김만금(金萬金ㆍ 84.11 사망) 전 농업위원장도 같은 죄를 적용해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십수년 전에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을 파내 시체에 총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김만금은 나중에 잘못이 없음이 밝혀져 복권이 됐지만 서관히 비서는 끝내 「민족반역자」ㆍ「미제의 고용간첩」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서관히 비서의 공개처형은 평양시민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유명 여배우였던 우인희 이후 두 번째로 실시한 유명 인사 공개처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평양 시민들은 서관히 비서의 죽음을 보고 충격과 함께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의 농업정책이 그 한 사람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망가졌다는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시에는 정말로 그가 큰 죄를 짓고 죽음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량 아사에 따른 민심수습용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