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 평설 / 문혜원
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지용이 『백록담』을 썼을 때 사슴은 이미 여기 없었다
표지의 사슴 두 마리는 없는 사슴이었고
길진섭의 그림은 그저 상상화일 뿐이었는데
어인 일일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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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하얀 사슴 연못’에서 ‘백록담’을 연결하는 것이 그다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白鹿潭’의 한자 뜻을 풀어 쓰면 ‘하얀 사슴 연못’이 되지만, 반대로 ‘하얀 사슴 연못’을 한자와 연결시켜 ‘백록담’으로 읽어내는 것은 한자에 익숙지 않은 요즘 세대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얀 사슴 연못’이라는 말은 오히려 이질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어색한 제목을 한자로 바꾸고 나서야 제목은 우리에게 친숙해진다. 백록담(白鹿潭). 시인은 인상 깊었던 시집 『백록담』의 실제 장소인 ‘백록담’을 찾아서 제주도로 간 모양이다. 시의 곳곳에서 이 시가 지용의 『백록담』에서 시작되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지용의 『백록담』은 표지 이야기만 나올 뿐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얀 사슴’이라는,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계기로서만 작용한다. 하얀 사슴이나 그것으로 담근 술 이야기 또한 상상 속의 일일 뿐이다.
‘백록담’을 소재로 지용은 시집 『백록담』을 쓰고, 후대 시인인 황유원은 그 시집을 두고 「하얀 사슴 연못」을 쓴다. 두 시인에게 있어서 ‘백록담’은 전혀 다른 시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황유원에게 ‘백록’은 뛰어다니는 동물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퍼지는 기운’ 같은 것이다. ‘백록담’ 위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머릿속을 청량하게 하고 새로운 생각을 솟아나게 한다. 이제 ‘백록담’은 한라산 꼭대기의 연못도, 정지용의 시집도 아니고,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근원이 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이 발견한 ‘가슴 속의 물’(“살이 오른 사슴들이~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은 독창적인 새로운 시 세계의 열림을 예고한다.
이 때 시를 읽는 행위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는 ‘반향’이 아니라 내면으로 깊어지며 자신 내부의 ‘혼의 울림’을 듣는 것이다. 상상력의 힘에 바탕한 창조적인 세계, 그것은 시이기에 앞서 한 시인의 실존의 표현이자 세계의 개진이다.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 여기에는 『백록담』이 등장하지만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그것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이행 과정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지용의 『백록담』과 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나란히 그리고 동등하게 있다. 시인의 수상 소감 제목이 ‘존경과 우정을 담아’인 것은 당연하고도 적확한 것이다.
—계간 《시인시대》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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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원 / 제주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문학박사. 1989년 《문학사상》 평론 등단. 저서 『1980년대 한국 시인론』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한국 근현대 시론사』 『존재와 현상』 『1980년대 한국시인론』 『비평, 문화의 스펙트럼』 등. 아주대 교수.
첫댓글 어인 일일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황유원—『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2022
시의 곳곳에서 이 시가 지용의 『백록담』에서 시작되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지용의 『백록담』은 표지 이야기만 나올 뿐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얀 사슴’이라는,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계기로서만 작용한다. 하얀 사슴이나 그것으로 담근 술 이야기 또한 상상 속의 일일 뿐이다.(펌)
수년 전 제주도한라산 등상가서 물 하나 없는 백록담을 들여다보고 백록담시절이 있었나를 생각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