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현상 유감
춘삼월이 되자, 지난겨울이 가기 싫은 듯 춘설(春雪)이 내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창가의 산수유와 동구 밖 텃밭의 매화 무리는 붉고 희게 만개하였다. 수변공원에 늘어선 백철쭉과 조팝나무는 앙증스레 연한 잎을 내어놓고, 개천가 수양 버드나무의 휘늘어진 줄기에는 연두색 잎을 한꺼번에 뿜어낸듯하다.
봄은 자연의 시간표대로 모든 피조물을 소생시키고 회복시키고 있다. 그 낌새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 청둥오리들도 짝짓기 상대 찾기에 분주해 보인다. 오늘 오후 산책 중에, 그 치열한 종족 번식 본능의 현장을 보게 되었다. 세 쌍의 오리들이 노니는 곳에 수컷 침입자 한 마리가 나타나 한 암컷에게 다가가자, 다른 수컷이 쏜살같이 달려와 한바탕 난투극을 벌인다. 그 수컷이 암컷에 재빠르게 올라타자 다른 수컷이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다른 수컷이 올라가자 그 오리가 달려들어 쓰러뜨리는 싸움을 수차례 치른 뒤 그 침입자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른 오리무리는 그들의 소동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유유하게 일상의 몸짓에 전념하는 광경이다. 모두가 달려들어 그 침입자를 쫓아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의 세계도 우리의 도시인들과 같이 타자들의 행위에 그저 고결한 무관심을 보이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사람 눈에는, 오리 개체 간의 다름을 언뜻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모두 같게 보이는데 그들은 선호하는 짝을 쉽게 찾아내는 모양이다. 소리를 지르고, 날개를 펴기도 하며, 물속으로 갑자기 들어가는 등 수컷이 구애하는 장면은 눈물 날 지경이다. 생물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놀랍게도 암컷 오리에게는 원하지 않는 수컷을 만났을 때 수정을 저지시키는 장치를 작동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산과 들의 풀과 나무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새들도 짝짓기를 준비하는데, 집 거실 양지바른 남향 창가에 자리한 화초들은 잎만 무성할 뿐 올해는 꽃대도 전혀 내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는 이때쯤이면 향이 좋은 함수화가 먼저 바나나 향기를 내며 꽃을 피우고, 칼랑코에도 연중 때를 따라 꽃을 피웠다. 이곳에 온 후로는 왠지 모르게 그들이 달라졌다. 환경변화라고는 고층베란다에 놓여있다가 저층 거실로 옮긴 차이뿐이다. 베란다에 있을 때는 봄이면, 약간의 추위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이들 화초가 제대로 만개하였다. 아마 이곳 거실 실내온도가 그들에게 최적한 상태라서 꽃을 피워야 할 위기감을 재촉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함수화는 몇 개의 꽃망울만 터뜨린 후 지지부진하다. 칼랑코에는 여기에 온 이후 잎이 너무 무성하여져 몇 주 전 가지를 치고, 그 가지들을 다른 화분으로 옮겨심었다. 오늘은 조금 서늘한 안방 베란다로 그들을 이동시켰다. 이뿐 아니라 행운목은 이곳으로 오자 때를 만난 듯 1년 만에 거실에서 줄기와 잎들의 숲을 이루었다.
식물학자들은 봄에 꽃피는 나무들은 겨울의 추위를 거쳐야만 개화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식물체가 생육의 일정한 시기에 저온을 경과 함으로써 화성, 즉 꽃눈의 분화와 발육이 유도/촉진되는 현상(춘화)을 겪어야 하는데, 이를 춘화현상(Vernaliz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개화를 촉진 시키려면 인위적인 저온을 주어서 화성을 유도/촉진하는 춘화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스트레스가 식물에 없으면 그들은 꽃을 피워 열매 맺고 개체번식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언제나 쾌적한 조건에서 지속적 삶을 살아간다면 굳이 자기 유전자를 남길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이 개체를 긴장시키거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어 번식증진과 생존을 유지 시키는 예가 있다. 대추나무에 염소를 매달아 놓으면, 염소가 움직이며 나무를 흔들어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대추나무는 본능적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 어부들은 북해에서 잡은 성질 급한 청어를 산 채로 런던으로 수송하기 위해, 수조에 바다 메기를 몇 마리 풀어놓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청어는 바다 메기에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닌 결과 생명을 신선하게 유지한다고 한다.
이런 예를 노자는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이라는 지혜로 설명하였다. 즉 귀생이란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음을 뜻하며, 이와는 달리 자신의 생을 적당히 불편하게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섭생의 가르침을 노자는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구약의 ‘사사기 시대’와 같이,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혼재한 채, 서로 단절된 중층구조를 이루는 것 같다. 후자들은 전쟁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섭생보다 귀생을 선호한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해 이을 결혼과 출산은 필수조건이 아닌 것 같다. 그 대신 개체의 안전과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자들처럼 슬픈 이야기이다.
한편 칼랑코에와 행운목의 무성한 잎을 보며, 예수께서 잎만 무성하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생각이 났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함께 소중한 과일나무이다. 자료를 보면 그곳 기후에서 무화과나무는 일 년 가운데 거의 10달 동안 열매를 맺는다. 3월, 4월에 가지에서 새잎이 나오는데 이즈음 지난해의 가지에서 자란 대부분의 작은 ‘푸른 무화과’는 떨어지고, 이때 남은 무화과 열매는 첫 추수기인 6월에 익게 된다. 봄의 새 가지에서 자란 두 번째 수확물은 8월 추수에 익는다.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한 기적의 사건은, 우둔한 우리를 포함한, 현대의 성서비평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이성적인 행위로 보인다. 더욱이 그 시기가 유월절 기간이라 열매가 맺지 않는 시기이고, 그것도 예수께서 시장을 이유로 하신 행위는 더욱 그러하다고 보고 있다. 유월절은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봄의 첫 달에 지켜졌다. 그때는 지난해의 가지에서 자란 ‘푸른 무화과 열매’가 달려있을 시기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예수께서 찾으신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푸른 열매’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저주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그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완악한 이스라엘의 백성 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 행위를 상징하며, 저주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성서 주석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어떻든 봄은 왔으니 굳이 거실 화분 안에서 꽃향기를 맛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 읽은 채근담 구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꽃이 화분 속에 있으면 마침내 생기를 잃고 새가 조롱 속에 들면 곧 자연스러운 맛이 줄어드니, 산속의 꽃과 새가 한데 어우러져 무늬를 이루고 마음대로 날아올라 스스로 한가롭게 즐거워함만 못하다.’(조지훈 역)
붙임 :
菜根譚(後篇 55)
洪自誠
花居盆內 終乏生機
鳥入籠中 便滅天趣
不若山間花鳥 錯集成文
翶翔自若 自是悠然會心
첫댓글 중국에서 수입하는 미꾸라지 수족통에 메기를 넣어 갖고오는 것. 우리의 개나리가 호주에서는 잎만 무성한것. 들의 예가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 친구로 부터 보내온 글에 이르기를 여보게 이사람아 "부인 고마운줄 알게" 하기에 노년에 부인이 베풀에 주는 여러가지 보살핌에 고맙게 생각하라는 말로 이해 했는데 알고보니 부인의 간섭과 참견이 미꾸라지 수족통에 메기역활을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웃었지요.
장로님 친구분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아 죽지 않았다면, 악처 아래에서
오래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남자에게 부인의 역할은
어느 경우에도 선한 파트너 역할인가 봅니다.
재미있는 말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