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적성면은 연천 장남면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되는데 내비가 새로 놓은 다리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다리가 아닌 임진강 물 위를 차로 건너가고 있는 것처럼 표현된다. 수륙겸용 자동차가 되었다. 적성면에서는 적성향교(향토유적 제3호)만 찾아보았다. 구읍리 476-2번지에 있는데 읍내를 남쪽으로 관통한 뒤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가니 왼쪽에 있었다.
적성향교는 조선 전기에 칠중성(七重城) 아래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으로 건립하여 선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 후 몇 차례의 전란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70년에 복원하였다. 1971년에 명륜당을 신축하고 1975년에는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홍살문이 있으며 대성전의 규모는 정면 8.4m, 측면 4.65m의 익공계 양식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방풍판이 달려 있다. 명륜당은 정면 6.5m, 측면 4.5m 규모로 연등천장에 민도리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1975년 지붕과 벽을 보수했으며 1978년 명륜당 단청을, 1996년에 대성전을 개축하여 1997년에 단청하였다.
역시 문이 잠겨 있다. 당초 칠중성을 들를까 했는데 도로 입구에 향교와 함께 표지판만 있고 남은 거리 등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향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 것 같지만 차로 가기에는 길이 좋지 않았고, 정확한 거리도 모르는데 굳이 걸어서 갈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아 돌아선다.
당초 파주까지 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정확한 동선을 수립하지 못해 파평용연(향토사적 제10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385-1)을 먼저 들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라면 우측에 있는 파산서원부터 가고, 문산 방면으로 더 가다 왼쪽에 있는 파평용연을 들러야 맞지만. 파평용연(坡平龍淵)은 파평(坡平)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 윤신달(尹莘達, 893~973)의 탄강 설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윤신달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로 이 곳 용연에서 태어나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의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다.
용연과 관련된 전설로 신라 진성왕 7년(893) 음력 8월 15일 운무(雲霧)가 가득한 용연에 옥함이 떠있어 근처에 사는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거두어 보니 안에 옥동자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오색이 찬란한 깃털에 쌓여 있고 양어깨에는 붉은 점과 좌우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으며 발바닥에는 북두칠성의 형상인 7개의 흑점이 있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용모가 장대하고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전하며 이 후 윤온 할머니의 성(姓)을 따 윤(尹)씨 성과 ‘신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전한다. 용연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자연못으로 총면적이 2,531평에 달하며 그 중 수호전은 1,530평이다. 용연에는 1920년에 세운 『파평윤씨 용연비(坡平尹氏龍淵碑)』와 1972년 3월에 세운 『파평윤씨 발상지비(坡平尹氏發祥址碑)』가 세워져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 파산서원(坡山書院 파평면 늘노리 235)은 꽤 오래 전에 한번 다녀온 일이 있다. 당시 다녀온 기억으로는 길가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리를 건넌 뒤 둑길을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있었는데 둑길의 나무를 정리하지 않아 가지들이 늘어져 차량통행이 불편했다. 서원은 여전히 별 특징 없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산서원은 조선 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成守琛 1493∼1563)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형제 절효공 성수종(成守琮 1495∼1533) 및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이이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세웠고, 효종 원년(1650)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탔고, 1966년 서원의 사당만을 복원하게 되었다. 사당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정면 가운데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석 등은 세울 당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앞면은 툇마루로 개방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파산서원이 ‘파산’이란 단어의 다른 한자[破産]를 연상시킬 정도로 쇠락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오래된 건물이 없다는 점이 우선 이곳에서 어떤 역사적 자취를 느끼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근래에 복원된 다른 서원들처럼 경제적인 능력이 크지도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사당 앞에는 枯死된 巨木이 버티고 서 있어 황량함을 더한다. 본 나무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날아온 씨가 이 나무를 양분 삼아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그래도 이 늙은 나무에 가지가 나고 잎을 틔웠다. 한 가닥 蘇生에의 希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 화석정(花石亭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 역시 전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다시 들른다. 화석정은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는데 그 앞을 지나는 37번 국도가 고속화 되면서 찾는 것이 조금 불편해졌다. 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으니 도로 아래로 내려가 37번 국도 밑을 통과한 뒤 두 번째 지점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서쪽에서 갈 경우 국도 오른쪽으로 나가 우회전한 뒤 바로 좌회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점이 조금 헛갈릴 수 있다. 나의 경우 먼저 좌회전하는 바람에 다시 37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한참 가다 되돌아와야 했다.
화석정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李明晨)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율곡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에 타 없어졌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다시 짓고 1973년 정부의 유적정화사업 때 단청을 올리고 주위를 정리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처럼 화석정은 무엇보다 율곡 이이선생과 관련하여 기억된다. 근래의 일도 아니며 조선왕조실록 영조조, 승정원일기 고종조에 이 임금들도 이곳을 찾았을 때 한결같은 태도로 율곡 이이선생을 추모했다. 또 율곡선생 학문의 적통이었던 사계 김장생선생은 물론이거니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게 만든 두 주역인 명재 윤증선생과 우암 송시열선생, 남인의 거목인 미수 허목선생 역시 화석정을 율곡선생과 관련하여 기억한다.
그렇다고 화석정이 율곡선생만의 것은 아니다. 율곡선생보다 한참 앞 시대 인물인 사가정 서거정선생은 ‘화석정’이란 시를 이렇게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화석정의 주인은 율곡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을 가리킨다.
화석정 위의 구름은 천 년의 옛 구름이요 / 花石亭上雲千秋
화석정 아래 강물은 절로 흘러만 가는데 / 花石亭下江自流
화석정의 주인은 적선의 후예이기에 / 花石主人謫仙後
풍류와 시주가 가업을 이을 만했도다 / 風流詩酒能箕裘
[사가정집/한국고전번역원/임정기 역]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앞서 언급한 사가정의 시, 정자의 이름을 지은 이숙함의 기문, 이의무의 부(賦)와 서(序) 등이 소개된다. 그 가운데 이의무의 글은 화석정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이 기쁘게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화석정에 오르니, 비스듬한 석벽이 강물을 임하였다. 앞으로는 관도(官道)가 보이고, 뒤로는 우정(郵亭)을 굽어본다. 뭇 산이 몰려드는 듯하고, 들이 넓으며 호수가 질펀하다. 이것이 실상 높이 올라 바라보기에 훌륭한 경지로서, 천지가 빚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석정은 물론 율곡선생의 체취가 압도적으로 많이 배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율곡선생이 8세 때 지었다는 花石亭詩가 돌에 새겨져 있다.
林亭秋已晩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이동석 역]
율곡 선생보다 조금 뒤에 태어났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서애 유성룡선생의 ‘화석정(花石亭)에 씀’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어딘지 씁쓸하고, 쓸쓸하다. 아마도 율곡선생이 세상에서 떠난 뒤에 쓰인 것인 것 같다. 앞 두 구(句)는 어쩌면 본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각각 서인과 동인의 대표가 되어버린 율곡선생과 서애선생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마주선 산 형세 본래 한 줄기이고 / 山形背立本同根
갈라진 강물도 한 근원이네 / 江水分流亦一源
화석 옛 정자에 사람 보이지 않으니 / 花石古亭人不見
석양에 돌아가며 거듭 넋이 사라지네 / 夕陽歸去重消魂
[서애선생 별집 제1권 /한국고전번역원 / 유풍연 역]
[인용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파주시청,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훌륭한 모습 고맙게 보았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