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갔네요 2

[구대열]

여왕이 갔네요 2

글이 길어져 또 2번으로 나누었습니다. 1편은 조금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다면 2편은 그냥 스쳐가는 잡생각들입니다.

이번 장례식에 제일 먼저 관심이 간 건 런던의 날씨였습니다. 우리가 런던에 도착한 게 1973년 9월 21일이었는데 오늘이 추석 9월 10일이니 열흘 전이네요. 난 9월 16일까지 한국일보에서 환송회 술 마시느라 바빴고 17일 서울 출발, 21일 런던에 도착했는데 너무 춥더군요. 지금 런던 날씨는 섭씨14도네요. 서울은 25-28도인데.... 겨울옷은 배편으로 보내 여름옷으로 고생했습니다. TV에서 보니 길거리 사람들의 옷소매가 길어지고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많더군요. 조금 지나면 바가 주룩주룩 오는 음산한 가을이 시작되는 데 여왕은 복을 많이 쌓아서인지 좋은 날씨에 가신 것 같습니다.

나는 여왕을 오래 ‘보아왔던 분’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몇 번이나 만났나 생각해 보니 직접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대사쯤 되면 신임장을 제정할 때 한번은 보았겠지요. 런던에서 집 애나 서울 친구들이 와서 버킹엄 궁을 구경시켜 줄 때, 왕궁에서 해군성 아치인 Admiralty를 지나 트라팔가 광장을 잇는 The Mall이라는 거리를 마차 타고 가는 여왕의 모습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 와서 안동에 갔을 때도, 심지어 이대에 왔을 때도 나는 강당에 갔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 왕실 인사들 중 누구를 보았더라? 여왕 어머니(The Queen Mother)가 런던 대학 총장이었으니 석사학위 받을 때 1대1 대면 인사를 했군요. 원래 학사는 무릎을 구부리는 커티지(courtesy) 인사를 하고, 석사학위 수여자는 악수를 하는 데 여왕 어머니가 연세가 많아 의자에 앉아 있었지요. 1900-2002년 102세까지 살았으니 여왕이 어머니를 닮아 장수하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수여식 때는 서울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졸업생 수가 많아 빅토리아 & 앨버트 홀을 빌려 1년에 4번 졸업식을 하는 데 그것도 참석하려면 몇 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총장은 런던대학은 왕실 가족들이,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은 총리를 지낸 분들이 주로 하는 데 지금 런던대학 총장은 Anne 공주입니다. 그래서 졸업장은 부총장(Vice Chancelor) 이름으로 나옵니다. 한국일보 기자로 카디프에 연수했을 때 Princess Anne을 보았네요. 직원이 공주가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말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게 기억납니다. 뭐, 서툰 영어로 먼저 말을 걸 주제가 되었나요? 그 뒤 유학 중 여왕의 동생인 Princess Margaret와 Prince Charles가 참석한 Royal Concert에서 이들을 본적은 있네요.

여왕이 서거한 Balmoral 성은 스코트랜드에 있는 여왕의 여름별장이죠. 나의 지도교수는 여왕과 같은 1926년생으로 스코트랜드 에든버러 출신인데 여기에서 북으로 쭉 올라가면 발모랄이 나오고 이 부근에서 휴가를 보낸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기력은 쇠잔했으나 정신은 말짱하답니다. 발모랄은 여왕과 늙은 사슴이 나오는 영화에 등장하는 곳으로 아주 운치 있는 곳이지요. 런던 동북 해변에 있는 Sandringham성은 여왕이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보내는 곳입니다. 샌드링험은 부근이 개방되어 중앙일보 장두성 특파원 가족과 놀고 해변에 지천으로 깔린 조개를 주어 삶아 먹기도 했는데.

추도사를 한 여러 분들이 말하길 여왕은 국내외 정세에 통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여왕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지만 거의 매주 극비문서를 포함한 국내외 주요문서들을 열람합니다. 왕실문서들을 보면 대부분 그냥 넘어 가고 ‘good!’, ‘excellent’ 혹은 ‘!’, ‘?’ 등 간단한 소감을 남기기도 하지요. 다른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건 유럽 xx왕가에도 알려라.’고 지시한 것도 보았습니다. 세계정세에 통달하지만 대내외적으로는 침묵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보통 사람은 입이 근질근질 할 건데, 참 용하다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죠. 여왕의 한 마디는 곧 매스컴을 탈 것이니까요. 그래서 여왕은 애완견인 웰시 코기에게 말한답니다. ‘오늘 xx를 만났는데 못된 인간이더라.’라고는 하겠지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동화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영국 하원(the House of Commons)을 보았습니다. 붉은색 주단으로 장식된 상원과는 달리 조금 초라한 초록색 ‘벤치’가 놓여있는 방입니다. 사전지식 없이 처음 유학 갔을 때 작은 방에 ‘벤치’만 있어 상임위가 열리는 곳인가 생각했지요. 그만큼 작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국회의 빵빵하고 근엄한 본회의장이나 미국 의회의 멋진 모습에 비해 그럴 만도 했지요. 벤치 앞에 책상이나 의원들 좌석 팻말도 없습니다. 서류를 그냥 들고 있습니다. front bench라는 앞좌석에는 총리와 각료들이, 그 맞은편 앞좌석에는 야당인 shadow cabinet 멤버들이 앉습니다. 뒷좌석은 총리에서 물러난 back bencher들이 앉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Theresa May나 Boris Johnson 등 전 총리들이 좌석 중간 열에서 일어나 추도사를 하더군요. 제일 뒷좌석에 폼 잡고 앉아있어야 할 분들인데.... 추도사를 하기 위해 중간으로 내려왔나? 지정된 좌석이 없으니 가능했겠지요.

의장이나 사회자가 있지만 개회 이후에는 사회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모임이나 회장/의장이 있고 사회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음은 전임 총리이신 xx가 추도사를 하겠습니다.’와 같은 멘트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총리가 발언하고 나면 야당 당수가 하고, 그 다음은 전임 총리들이 순서에 맞추어 추도사를 읽습니다. 하버드 대학 어느 채플 추도회도 비슷했습니다. 한 분이 추도사를 끝내면 다음 분이 그냥 나가고.... 영국 전임 총리들은 얼굴이라고 알지만 교수들 얼굴은 잘 모르니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들었습니다. 우리도 결혼식 정도는 주례가 사회를 보면서 혼자 진행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이자 아리따운 신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등등 낮 간지러운 소리를 제발 하지 말고.

여당과 야당 의석 중간에 흰 줄이 있는데 옛날에 칼을 차고 회의장에 들어온 의원들이 기분 나쁘면 칼을 뽑아 싸움질 하는 걸 막기 위해 것이랍니다. 이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표시죠. 멱살 잡고 싸운 우리 의원님들 보다 더 심했던 것 같네요. 말씨도 지금은 상당히 순화되어 ‘나의 존경하는 xx지역 출신 의원님’으로 연설을 시작하죠. 그러나 야유는 엄청 심합니다. 나는 유학 시절 TV 대신 라디오에서는 의회 중계를 들으며 살았지요. 몇 마디하면 휘파람이나 야유, 혹은 박수가 계속되고 의장이 ‘질서, 질서(order, order)하는 소리만 계속되어 듣기 힘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추도사이기 때문에 야유는 없고, 연설에 찬성한다는 표시로 ‘예에----’ 등이 계속 나오더군요.

전체 하원의원은 650명 정도인데 좌석은 500명도 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보니 복도와 뒤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던데 모두 의원들입니다. 2차 대전 후 폭격으로 부서진 의회를 수리할 때 일부러 좌석 수를 확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칠의 지시였다고 하지만, 그는 유럽에서 1945년 5월 8일 전쟁이 끝난 직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7-8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는 선거에서 압승을 예상하고 회담 초 선거 결과를 보기 위해 ‘잠간’ 런던에 다녀오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는데 다음 모임에는 애틀리 신임 총리가 영국 대표로 나타났지요. 유학 중 한번 방청한 적이 있습니다. 총리가 나오는 날(수요일)은 방청객도 많고 의원들도 많이 참석하는 데 내가 간 날은 그렇지 않아 한가했습니다. 각료들과 shadow cabinet member들끼리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언성을 높이기는커녕 준비한 서류들을 서로 읽는 것으로 끝나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추모식을 중계하는 중간 중간에 영국 국가가 나오더군요. 짧으면서도 장엄하고 또 힘차고 좋지요. 수많은 작곡가들을 배출한 독일은 하이든 등 여러 작곡가들이 만든 국가가 있고 나치시대에는 Deutschland über alles로 오욕의 기간을 갖기도 했으며 지금은 민주적 시대정신을 반영한 가사를 지닌 국가를 부르는데 영국은 작곡가나 작사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 노래가 이토록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사 중 Happy and Glorious는 국가의 주요행사, 예를 들어 여왕 등극 25주년, 50년 등 행사의 주제가 되곤 합니다. (전쟁이 있을 때는 그 앞 가사인 Send her victorious!) 놀라운 것이 이 국가가 응원가로서도 불린다는 겁니다. 지금도 그런가요? 유학 초기 나는 우리의 잠실운동장에 해당하는 웸브리(Wembley) 구장 한참 아래 동네인 스위스 커터지(Swiss Cottage)와 햄스테드(Hampstead) 사이에 살았습니다. 5월 중순 쯤 되면 국내프로 축구인 FA컵 결승전이 열리죠. 경기가 끝나면 웸블리 방향에서 합창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집 부근으로 오면서 떼창은 점점 커지죠. 그리곤 부근의 술집, 팝이 들썩이고 노래가 계속 나옵니다. 놀랍게도 God save our Queen이라는 국가입니다. 약간 돈 애들이 아닌가 싶더군요. 이긴 팀이면 그 팀의 응원가도 있을 것인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분명 이런 노래도 불렀겠죠? 그런데 우리가 운동경기에서 이겼다고 혹은 진 뒤 애국가를 부르나요?

마지막으로 왕의 배우자로 소개된 카밀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버킹엄 궁의 발표에 의하면 카밀라의 공식 타이틀은 Queen Consort입니다. King Charles III and Camilla, Queen Consort....라고 합니다. 배우자를 뜻하는 consort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독일 귀족 출신인 Prince Albert였습니다. Albert, Prince Consort of the Queen입니다. 1861년 42세로 죽으니 빅토리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지요. 지금도 하이드 공원에 멋지게 서 있는 앨버트 타워, 맞은편에 있는 빅토리아 & 앨버트 극장, 그 직선 선상 템스강에 놓인 앨버트 다리 등 많은 기념물들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카밀라라면 찰스가 일찍부터 불륜관계를 맺어 바람피운 대상으로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죠. 다이애나 때문입니다. 다이애나의 비극적 죽음과 당시 Tony Blair 총리가 People’s Princess라고 추겨 세울 정도로 다이애나 열풍에 휩쓸려 카밀라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찰스는 바람둥이였지만 사색적이며 문학, 역사, 철학을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영국왕실에서 대학, 특히 캠브리지에 다닌 유일한 인물이지요. 왕실 자녀들은 뭘 하겠다고 대학에 가겠습니까? 대부분이 집에서 공부하고 남자들은 해군사관학교에 가면 최고였지요. 찰스는 대학 시절 기숙사 방에 여자들이 들락거리는 걸 학장이 묵인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1970년 말에는 당시 웰링턴 공작의 딸인 Lady Jane 등 왕비후보들이 수없이 지면에 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O level, 우리식으로 말하면 중학교를 졸업한 정도였습니다. 가문 좋고 놀기 좋아하고 춤 잘 추어 찰스와는 완전 반대되는 성격이었습니다. 둘이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찰스가 뭘 물으면 다이애나의 답은 O, Is that so? 등 간단한 것으로 끝났다니 찰스가 얼매나 답답했겠어요? 대화가 이어지지 않겠지요. 반면 이혼 후 다이애나의 행적을 보면 에이즈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지뢰가 묻힌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다친 어린이를 안아주는 등 ‘행동’으로 감성을 자아내는 자선행위를 계속했지요. 당연히 People’s Princess로 불릴 만큼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찰스 역시 옛 애인이었으며 말이 통하는 카밀라를 다시 만났겠지요. 다이애나가 TV에서 ‘우리의 침대가 붐볐다(crowd)’고 직설적으로 말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카밀라와 찰스는 첫 결혼으로 맺어지지 못했지만 평생 서로 잊지 못한 ‘정신적 반려자(soul mate)였던 겁니다. 찰스는 그래서 첫 연설에서부터 my beloved Camilla를 반복하면서 카밀라의 기를 살려주려고 애쓰더군요. 이것이 다이애나의 한계인지, 카밀라의 복인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TV에 나오는 카밀라는 좀 측은하게 비치더군요.

여왕 서거 이후 1주일이 지난 15일 BBC를 보니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성당에서 한 미사를 중계하더군요. 우리가 잘 아는 O Danny Boy가 조용히 나오더군요. 우리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온 것이죠. (지금은 외국 노래라고 해서 없겠죠?) 아일랜드 민요로 멋진 노래이지만 장례식 미사에 사용되는 장송곡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노래를 여러 모임에서, 특히 독창으로 부르고, 때로는 결혼식 축가로도 부르더군요. 다음은 2절의 가사 일부입니다.

But when ye come, and all the flowers are dying,

If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네가 돌아을 때 쯤 모든 꽃들이 시들어지고

내가 아마도 죽었다면 나의 무덤을 찾아 나를 한번 불러봐라.

그러면 난 기쁜 마음으로 영원히 평화롭게 잠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몇 마디 적어보았습니다.(2022.9.10. 추석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