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원의 소 떼
한 초등학교의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목장 풍경을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한참이 지난 후 선생님은 아이들의 그림을 하나씩 보았습니다.
푸른 초원, 울타리 등 다양한 모습을
도화지 안에 그려 넣는 아이들을 향해
칭찬의 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그림은
민둥 언덕만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선생님은 아이에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린 거니?"
"풀을 뜯는 소의 그림이요."
아이의 그림에서 풀과 소를 찾을 수 없었기에
선생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풀과 소가 어디 있니?"
"선생님도 참~ 풀은 소가 다 먹었잖아요.
그리고 소는 풀을 다 먹었는데
여기 있겠어요?"
산은 뾰족한 세모, 하늘은 연한 파란색 등
우리에게는 어느새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 각자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늘을 보면
파란 하늘 곳곳에 분홍색, 회색 등 다양한 색이 섞여 있듯이
우리의 고정관념은 대부분 경험에 의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경험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으로 굳어진 좁디좁은 생각에만 의지하지 않고
다양한 생각으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옛적에 뱀에게 다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스템(국가)은
구성원들이 개성이 강하거나 똑똑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우리속담에 '모난 돌이 정(釘)맞는다.' 라는 말도 있다.
근대 의무교육의 역사는 대강 이러하다고 한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러시아는 18세기 대대적인 개혁을 선언하고,
국가 주도의 의무 교육제도를 추진한다.
프러시아 교육 시스템의 주된 목표는, 국가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군인과
군말 없이 일하는 공장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상류층 자제들은 비싼 사립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사고력을 고양할 기회가 있었지만,
공립학교에 다니는 서민들은 주로 상급자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획일화된 교육을 받았다.
대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훈육하는 이러한 프러시아 교육 시스템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배 계층에서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이 교육시스템은 19세기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친 한국도 이러한 교육의 흐름 속에 포함되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개성 없는 사람이 AI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AI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식의 획일화된 주입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고,
세상을 여러각도에서 비틀어 보는 이런 다양한 눈(시야, 능력)은
'왜? 라는 끊임없는 질문'에서 자라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
"풀과 소가 어디 있니?"
"선생님도 참~ 풀은 소가 다 먹었잖아요.
그리고 소는 풀을 다 먹었는데 여기 있겠어요?"
"모난 돌이 정(釘) 맞는다."
"하지만, 그 모난돌이 세상을 바꾼다."
Ubuntu : 나는 우리 모두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