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
2013년, 서울로 이사와서 10년 동안 했던 보험업을 그만두고, 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가로 일을 하게 되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중증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 자립에 필요한 권익옹호와 정보제공, 자립생활기술훈련 프로그램, 활동보조서비스, 동료상담, 주택개조, 보조기기 제공 및 수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자신의 삶과 생활을 관리하며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다.
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은 장애인자립생활 운동과 홍보였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정책은 90년대 말까지만해도 주로 혼자 활동할 수 있는 경증장애인위주였고, 혼자 활동할 수 없는 중증의 장애인들은 방 안에서 누워 살거나 아니면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 누워 살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2000년대가 되고,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이념이 알려지게 되었다.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은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스스로의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의 역량을 강화하여 당당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 "주도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그래서 방 안에서 누워만 살았던 중증의 장애인들이 사회로 나와 자신들에게 필요한 이동권, 편의시설, 차별급지,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전국에 하나 둘씩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센터가 생기기 시작했고, 현제는 각 지역마다 자립생활센터가 만들어져 지역에 있는 재가 중증장애인들에게 자립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립생활센터가 기존의 장애인을 위한 수용시설, 복지관과 다른 점은 사회복지사, 종교인, 의사, 복지 전문가 등 비장애인 위주의 복지전달이 아닌 중증의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자립생활 운동을 하고, 자립생활센터를 운영하여 자신과 같은 중증의 장애인들에게 직접 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부의 지원도, 홍보도 부족하다보니 비장애인들에게는 자립생활센터가 왜? 필요한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잘 몰랐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센터가 지역에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려면 정부와 지자체에 자립생활을 지원하라는 운동도 해야 했고, 지역에 살고 있는 비장애인들의 공감과 연대도 필요했다.
국정원대선개입 촛불시위, 장애인계 시국선언, 중증장애인 고용지원 기자회견, 세월호참사 추모 문화제, 태평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화제
우리나라의 등록 장애인 수는 대략 252만 명이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장애인”하면 대부분 나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인의 96%는 건강하게 태어나 살면서 질병이나 각종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된 경우다. 그래서 장애라는 것은 단지 장애가 있는 장애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홍보 역할을 맡으며 자립생활센터를 지역사회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지 고민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립생활센터가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 홍보용 팜플렛을 만들어 구로구에 있는 동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비치함에 꽃아 두어 홍보를 했고, 전철역 앞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비장애인들에게 팜플렛을 나누어 주면서 홍보를 하기도 했다.
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 리플렛(앞, 뒤)
낮은 자를 외면하는 기독교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기위해 구로구에서 제일 큰 교회 10곳을 찾아 목사님께 자립생활센터가 어떤 단체인지 그리고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한군데씩 찾아 다녔다. 그런데 교회를 찾아가기 전에 전화를 하면 목사님이 부재중이시라 연결이 어렵다는 말만하고, 직접 찾아가서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을 하면 교회 담당자는 “목사님은 지금 바빠서 만나기 힘드니 다음에 오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제가 목사님께 드리는 편지와 명함을 놓고 가겠습니다. 목사님이 오시면 전해주세요.”라고 말하고 뒤돌아 왔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단 한군데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교회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제가 드린 편지를 목사님께 잘 전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목사님께 전해드리기는 했는데 목사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우리 교회는 장애인들에게 후원 안하니까 다른데 알아보세요.”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고, 또 다른 교회는 다시 찾아가 사무국에서 일하는 담당자에게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는데 그 담당자는 부목사님께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부목사님은 “두고 간 편지는 잘 봤는데 담임목사님은 워낙 바쁘셔서 만날 시간이 없고, 우리 교회는 다른 장애인시설에 자원봉사도 하고 있고, 후원도 하고 있다.”며 만나는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단지 지역에서 사는 중증의 장애인들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동등하게 사는 것이 왜? 중요하고, 그래서 자립생활센터가 중증의 장애인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목사님께 전하고, 교회 내에 팜플렛을 비치해 교인들이 볼 수 있도록 홍보를 하거나, 아니면 교회에서 행사를 할 경우 교인들에게 팜플렛을 나눠주며 자립생활센터를 홍보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교회는, 목사님은 나를 구걸하는 장애인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교회를 다니러 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기 귀찮은 존재로 봤는지, 찾아 간 10곳의 교회 중에 단 한곳의 목사님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겉만 봐도 으리으리한 대형 교회들, 그 안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은 없는 듯해 씁쓸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돈이 많은 기업의 사장이라면 어떠했을까?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지 15년
구로조은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립생활 운동과 홍보 일을 한지 1년쯤 지난 2013년 가을, 갑자기 컨디션이 떨어지면서 방광 쪽에 통증도 심해지고, 기립성저혈압도 심해졌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왼쪽 발밑에도 욕창이 생겨서 휠체어를 타는 것도 어렵다보니 계속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활동하느라 몸 관리를 안 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몸의 근육을 전혀 쓰지 못하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는 듯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가까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전립선 쪽에 염증이 생겨서 물이 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열흘정도 치료를 받고 퇴원 했다. 그러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아 이 상태로 일을 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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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신마비장애인의 세상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