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 일반 2.hwp
掛佛의 개념
괘불은 야외의식에 사용한 불화이다.(圖1) 괘불이란 용어의 掛는 ‘끈 같은 것으로 매달아’ 또는 ‘∼에 매달아 놓은 것’이라는 의미로 괘불은 어디에 매달아 놓은 부처라는 뜻이 된다. 幀은 ‘펼친 그림’, ‘비단 그림을 규격에 넣은 것’, ‘그림을 세는 단위’ 등의 의미가 있어서 掛佛楨은 부처그림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야외의식에 내걸어 사용한 부처그림을 괘불탱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밖에 매달아놓고 의식을 할 때 쓰는 불화를 괘불이라고 흔히 불러왔는데, 이것은 괘불탱을 줄여서 일상적으로 불러온 명칭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괘불들은 조선후기에 靈山大會를 設行하면서 내걸었던 거대한 크기의 불화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괘불이 야외의식에 사용하는 불화이기 때문에 야외의식이 있었던 조선전기 이전에도 괘불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어떤 불교의식을 야외에서 했었는지, 괘불이 야외에서 사용될 때는 후불탱화보다 클 것이라는 추정으로 후불탱화로 보기에는 큰 불화는 없는지, 또 후불탱화를 야외의식에 내걸고 썼을 가능성 등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다.
전 세계 불교국가 중 현재 괘불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와 티베트․몽고이다. 티 베트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5일과 석가탄신일, 성도일, 열반일에 큰 축제를 열고 대형 탕카(Thangka)를 내어 모신다. 티베트와 몽고는 고려시대 후반에 우리나라와 밀접한 영향관계에 있었던 원나라의 영역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탑, 불상, 사리구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티베트 불교미술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화에서의 영향관계는 직접 논의된 바 없지만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여 볼 때 우리나라 괘불 제작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괘불은 야외에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후불탱화보다는 클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불화작품들 중 크기가 법당에 봉안하기에는 큰 크기일 때 괘불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최대의 불화인 일본 佐賀縣立博物館의 鏡神社 ‘수월관음보살도’는 고려불화의 장대한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높이 419.5cm, 폭 254.2cm의 크기로 보아 불전 내부에 모셨다기보다는 어떤 의식에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전기 괘불의 존재여부와 관련지어 가장 관심이 가는 것 중의 하나는 야외의식들이다. 불교를 억압하였던 조선 초기에도 야외에서 의식을 행한 기록을 <朝鮮王朝實錄>에서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승려들이 도성 안에까지 들어와 거리에서 幢幡을 세우고 징과 북을 치면서 음식상을 차려놓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百種施食이라 한다……”
“효령대군 보가 한강에서 7일 동안 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세 개의 단을 쌓았으며 승려 일천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 모두에게 보시하였으며, 심지어는 길 가는 행인들에게까지 음식을 대접하였다. 날마다 쌀 몇 섬씩을 강물에 던져 물고기에게 마저 먹을 것을 베풀었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강을 뒤덮었으며 종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으니 서울 안의 남자와 부녀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양반집 부녀자들도 더러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그들을 대접하였는데, 승려들과 속인이 한데 어울려 구분이 없었다.”
“길거리의 무식한 무리들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른다고 핑계를 대면서 어떤 때는 도성 안의 길거리에서, 어떤 때는 시냇가에서 幢과 幡을 늘어세우고 떡과 과일을 차려놓고…
이처럼 百種施カ食, 水陸齋, 遷度齋 등의 불교행사가 야외에서 거행되었고, 이에 따라 예배대상의 불화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추정된 것이다. 또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인 행사로 설행되었던 기우제와 수륙재도 괘불의 사용과 관련지어 관심이 가는 의식이다. 수없이 많은 기우제가 설행되었던 조선시대에는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지낸 전통이 조선 후기까지 전해 내려와 기우제에 괘불이 사용된 예가 많다. 옥외에 그림을 걸고 의식을 집행하는 기우제는 조선 초기 세종대에 畵龍祈雨祭에 관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불교 야외법회의 경우에도 괘불과 같은 예배대상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조선전기 기우제에 쓴 불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주목된다. 勸相老의 <韓國佛敎資料秒> 四溟大師의 기록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본국으로 데리고 돌아올 때 조선에서 가져간 기우제에 영험이 있는 불화도 돌려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임란 이전에 이미 기우제 의식에 거는 불화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형식과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야외법회에 불화가 쓰였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다. 수륙재의 경우는 중국에서 元․明代에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는데 중국에서는 수륙재에 사용하는 수륙화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전기에 성행한 수륙재에 불화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처럼 많은 가능성이 있는데도 괘불에 관련된 확실한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조선 전기 의식에 사용한 불화들이 불전에 봉안하였던 것을 내걸고 사용하거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아 후불탱화와의 구분이 불명확한 데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야외의식에 불전 내부에 모셔진 탱화를 내걸고 사용한 후, 의식이 끝난 다음 다시 불전에 모시기도 하였다. 1721년에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集)> ‘다비문(多毘門)’에서는 전각에 모셔져 있던 원불탱(願佛幀)과 影子, 즉 眞影을 가지고 나와 의식을 진행하는데 野壇에 마련한 미타단에는 원불탱을 걸며 그 하단으로 진영을 걸도록 규정하였다. 다 비식이 끝난 후에는 원불탱과 조사탱을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걸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의식에 법당 내의 불탱을 옮겨와 사용한 것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괘불로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1622년 ‘죽림사 괘불’(圖2)의 경우 후불탱화와의 크기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괘불과 후불탱화가 별구분 없이 제작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찰에서 치루는 의식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의 식 또한 영산대회가 중심이 되면서 영산회 괘불들이 대규모로 제작되게 되었다. 괘불이 거대해지면서 후불탱화와 확연하게 구분되어져 이 불화들을 괘불, 괘불탱이라고 일컬으면서 괘불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야외의식에는 괘불 이외에도 불상이나 보살상이 그려진 幡佛畵(圖3)들이 사용되고 있다 위의 <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 여러 의식 기록에도 幢과 幡은 야외의식에서 중요한 의식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외 불교의식에 사용한 당과 번은 대부분 名號가 쓰여진 깃발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남아있는 번의 상당 수도 名號가 쓰여져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야외의식에 내건 번 중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이 그려진 번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교의 장엄구로 사용된 幡은 인도․중국의 문헌이나 실물 및 그림들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幡들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데, 탑 위나 天蓋에 매달아 불탑이나 佛殿 혹은 기타 신성한 건조물을 장엄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엄용 번, 사찰의 입구 당간에 세워 성역을 표시하고 아울러 벽사의 의미를 내포하며 사찰의 행사를알리는 표식용 번, 일반대중에게 어려운 교리를 쉽게 전달해주고자 불전도를 그린 교화용 번, 예배대상을 그린 공양용 번, 인로왕보살이 들고 있는 인도용 번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예배대상인 불보살상을 그린 번은 9세기 말 돈황에서 출토된 보살상의 번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圖4) 실제 이 幡이 의식에서 공양예배용으로 쓰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번 중에 불보살상이 그려진 것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식을 행할 때 結戒하면서 도량에 줄을 치고 다는 幡불화들이 남아있다. 통도사, 직지사, 남장사, 백양사 등 여러 사찰에 남아있는 五如來와 四方佛, 八金剛, 十二支를 그린 幡불화는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길이 1m 내외, 폭 50cm 내외로 도량을 장엄하는데 쓰였다.(圖5) 지금도 야외의식이 있을 때 도량을 장엄하는 번불화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법회에 참석한 청법대중과 외호신중들의 이름을 쓴 명호 대신 그림을 그려 만든 것이다. 번도 야외의식에 사용하는 불화라는 점에 있어서는 괘불과 같지만 야외의식의 주재자로서 예배대상이 아니라 장엄용 불화이므로, 대형 괘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李英淑, ‘朝鮮後期 掛佛幀 硏究’, 2003.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pp. 7~12)
[참고도판]

(圖1)미황사에서 괘불을 사용한 의식

(도2) 죽림사 괘불, 1622년, 520×280cm, 麻本彩色, 전남 나주 죽림사

(圖3) 봉원사 영산재에 사용된 번

(도4) ‘幡’, 돈황 출토, 9세기 말, 172.5×18cm, 대영박물관

(圖5) 大乘寺 七如來 幡, 조선후기, 견본채색, 직지사성보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