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만 金斗萬 (1920 ~ 1984)】 "교토, 비밀결사 조선독립혈맹(朝鮮獨立血盟)에 참가"
1920년 1월 20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가례면(嘉禮面) 영암리(靈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호는 민초(民草)이고, 창씨명과 이명(異名)으로는 금산두만(金山斗萬), 천원삼파(川原三波), 봉오명(峯五明) 등이 있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4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다이와철공소(大和鐵工所)의 노무자로 일하였다. 1940년 6~7월경 같은 직장의 직공 김덕남(金德男)에게 민족 차별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던 중, 8월 무렵 다이와철공소로 전직한 유귀복(柳貴福)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유귀복은 이미 1940년 1월부터 교토의 고요우제약주식회사(伍陽製藥株式會社)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유귀복과 더불어 공장 내 동지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고 김덕남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1940년 9월 다이와철공소 내에서 유귀복, 김두만과 합세하여 「서서(誓書)」와 「불변서(不變書)」를 작성하고, 서로 피로써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맹약하였다. 서서에는 일신일가(一身一家)를 돌보지 않고 하루 속히 한국을 되찾기 위해 일본을 상대해서 싸울 것이고 그 마음이 변치 않을 것임을 천신·산신의 영룡왕(靈龍王)에게 엎드려 맹세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 사람은 함께 모여 ‘독립 단체의 근거지를 당연히 한국 본토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고, 그 장소를 백두산으로 정했다. 의류 등을 매각해 자금을 모으고, 태극기를 만들기 위한 흰 천과 약, 등산용 칼, 수첩, 지도 등을 구입해 자급자족 생활을 준비하고, 쌀·보리·콩 등의 종자도 구입하였다.
9월 중순 교토역 앞 음식점에서 결의를 다진 후 먼저 고국으로 출발하였다. 귀국 이후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에 체류하면서 유귀복·김덕남과 만나 향후 거사 계획을 도모·협의했다. 그러나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백두산 입산을 중단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각각 교토와 오사카(大阪), 고베(神戸)로 분산 취업을 감행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41년 5월 16일 오사카에서 혈맹(血盟)한 서서를 가지고 있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0월 16일 오사카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2년 10월 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3년 만기출감하였고, 바로 국내로 귀국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자유당 중앙행정자치위원(1955년~1956년)을 역임하였다. 대한광복회가 창설될 당시 대한광복회 전임위원과 민주공화당 전임고문(1967년~1970년)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