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공허한 하루.
저녁에 석모도 다리 놓은 후 배가 끊긴 석모도 선착장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러 식사하며 그곳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선착장 살리기에 대한 군의 지원과 프로잭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교동 다리 생긴 후 창우리의 식당가가 망한 것과는 달리 석모도 다리 놓은 후 보문사쪽 식당들은 대박 났고 이 곳도 어느 정도 손님이 있다고 했다. 무엇 보다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식사후 해안길 따라 산책. 달맞이꽃 마다 노란 그리움이 망울져 있다. 물이 가득찬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들은 먼 길을 떠나려는 외로운 나그네 같았다. 약간의 쓸쓸함이 좋아 서늘한 바닷바람을 즐기며 캄캄해질 때까지 한없이 해변을 걷고 싶었다.
23일
친구랑 진득이 고개에서 해명산, 낙가산에 이르는 긴 산행. 네 시간 정도 걸으니 기진맥진. 땀이 비오듯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절감. 땀이 흘러 눈을 뜨기도 힘들다. 산 위에 서면 모든 것이 발아래 있다. 산 아래에서 귀한 것들은 산 위에 서면 죽음 앞에서 그런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니다. 삶의 무게가 힘겨운 이들은 가끔 산에 올라, 지고 있던 모든 짐들을 내려 놓으면 좋을 것이다.
석모도의 두꺼비라는 식당(이 집은 추천하고 싶다.몇번 왔는데 된장찌개가 특히 맛있다)에서 연탄 불고기 먹으며 옛 향수에 젖어 친구는 술 많이 했다. 가난한 대학시절, 드럼통 연탄불에 둘러 앉아 고기 구어 먹고 독한 소주 마시던 일들을 기억하며 친구는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그 때 예수 중독자라 술 한잔 하지 않아 무슨 추억이라면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도한 기억 밖에 없다. 어찌 그럴 수 있었는지---
리안월드 야외온천에서 족욕을 하니 온 몸이 녹아버린 듯 잠이 쏟아진다.
24일
일산에서 가구공장을 하는 송도현 사장이 심도학사 방문. 일산에서 인문학 공부 모임을 하는데 선생님을 강사로 초빙하고 싶어 일부러 오셨다. 송형은 강화백북스에도 여러 차례 오셔 뒷풀이 할 때마다 술을 사 거의 새벽 한 시까지 몇 차례 술을 마셔 나와는 아주 친해졌다. 앞으로 강화로 이사와 문화해설사 하는 것이 꿈이라며 무슨 사장이 일은 않하고 공부만 하는 것 같다. 선생님은 강의 갈 형편이 못되는데 내가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다며 수락하신다.
저녁에 강화백북스 모임. 15명 정도 참여하셨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오늘 읽고 토론할 책이다. 임성식 내과 임원장이 개원한지 며칠 안되 바쁠텐데도 오웰의 책을 거의 다 읽고 와 발표를 해주셔 고마웠다.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사회. 모든 것이 다 감시되고 다른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그 혼자 지시하고 그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해준다. 이것에 의문을 품거나 저항하는 사람은 모두 투옥되어 세뇌 교육을 받거나 처벌된다.
사람은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 때 존엄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없다면 모든 좋은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천국 보다 나는 차라리 고통이 가득하다 해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옥을 택할 것이다.
나의 안에는 나도 모르게 나를 조정하는 사회의 시스템이 들어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돈이 신으로 작동하고 있고, 어릴적부터 종교에 중독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라 종교인이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자유인이 아니라 그냥 직장인이다. 이런 자아를 흔히 사회적 자아라고 한다. 우리는 자신을 조정하고 있는 이런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항할 때 비로소 주체적인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회의 관습이나 도덕에 무저항적으로 복종하며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불편이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빅 브라더인 김정은이 지배하는 북한에 살고 있다면 어떠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박근혜의 몰락으로 박정희, 전두환등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의 망령이 사라지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 것은 너무도 다행이다. 우리는 집권자들의 선전이나 협박, 회유에 놀아나지 말고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의심하고 저항하며 살 때 자유를 지킬 수 있다. 그건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끝나고 새벽 한시까지 뒷풀이.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이런 독서 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우리는 마치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런 위험도 없이 자기를 고백한다. 이런 비밀을 누설할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누설하는 이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가 고해자의 고백을 누설하는 것처럼 천벌을 받을 것이다.
25일
함 시인, 친구랑 길상산 등반. 네 시간 정도 원시림 그대로의 자연 속을 바다를 보며 걷는 기쁨은 알 사람만 안다. 이 산의 등반은 꼭 권하고 싶다. 가을에 등반을 같이 하고 싶은 분들은 연락주세요.
등산 후 선두리의 삼복호라는 횟집에 들려 한잔. 함시인이 이곳 어부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는 바로 그 집이다. 이 집에 들려 함 시인 소개로 왔다면 잘해줄 것이다. 친구는 비판력과 개성이 강하고 나는 뭐든지 좋은 점만 보려한다. 오늘 무슨 일로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나는 두리뭉실하지만 이렇게 날카로운 친구가 좋다.
어제 늦도록 과음하고 오늘 무리할 정도의 산행을 하고 나니 졸음이 쏟아진다. 누가 일기 안올라 온다고 문자 보내 서둘러 썼다. 다 쓰고나니 잠이 잘 올 것 같다. 이게 무슨 자승자박인지--
첫댓글 소소한 일상을 엿보는 관음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홍성환님의 일기를 읽으며....대천 해수욕장의 에피소드가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해서 잠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대학 시절,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내가 당시 입었던 "오직 예수"라는 글씨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내 모습만 있었는데...지금 만나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고 하거든요. ㅎㅎ
하하 오직 예수 ㅡㅡ
홍샘 일기에 중독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