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제 친구 단 둘이서 1985년 무덥고 태풍이 잦았던 여름에 온몸으로 겪은 23박 24일의 자전거 전국일주기를 올립니다. (저의 가족사랑여행 카페에서 발췌)
누가 먼저 생각 했고 제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나와 형기 둘은 우연히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 해보자는데 의견일치를 본 이후 전국일주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얼마나 설레고 재미가 있는지 벌써 수 개월째 매주 토요일만 되면 일요일까지 꼬박 이틀을 전국지도를 펼쳐놓고 언제 어디에서 야영하고 어디를 들르고 하는 자전거 전국일주 계획을 세우느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에 그리도 기다렸던 결행시점 인 1985년 대학3년 여름방학이 후반부로 치 닫고 있는 7월말이 다가왔는데 나는 안 하던 짓을 해야 할 때의 막연한 두려움과 중압감으로 휩싸여 표현은 못하지만 먼저 형기가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 안 되겠다고 말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만다. 형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만 속보이는 것 같아 물어 볼 수도 없고.
말 못하는 염원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시간은 가는데 둘 중 한명이 먼저 꼬리를 내리지 않으니 상대방이 겁먹으라는 선제공격의 일환으로 출발 하는 날까지 덥석 정하고서도 어찌 나오나 지켜보다 심지어는 출발당일 오전 까지도 서로 눈치를 보는데… 독한 넘 ! 속이 어떨런지는 모르지만 겉 보기에는 흔들리는 모습이 없으니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어 에라 한번
갈 때 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7월 29일 엄청 뜨거운 오후에 덜컥 출발을 하고 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덜컥 수는 바둑으로 치면 빠져 나올 수 없는 축 몰이 같은 이후 23박24일간의 사투의 시작 치고는 너무나도 싱겁고 거추장스럽고 우스운 모습의 출정식이 된다.
1일차
오전 내도록 선뜻 나서질 못하고 망설이다 이러다간 정말 포기 할 것만 같은 조바심에 오후에 출발하려고 둘이서 만났는데 그 모습이 실로 가관이다. 날렵한 싸이클도 아닌 일반 자전거에 배낭,텐트,카메라 가방을 가득 싣고 밀짚모자에 기타 메고….한 살림 차리겠다는 건지 여행을 떠나겠다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데 아무리 생각 해 봐도 형기가 멘 기타는 아닌 것 같아 집에다 도로 갖다 두고 출발을 한다.
몇일 후에서야 출발 할 때 기타 떼어두고 온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단이었는지를 알게 되지만 출발 할 때에는 이것도 필요 할 것 같고 저것도 긴요 할 것 같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몰라 잡다 한 모든 것을 챙겨 왔으니 “버려야 채운다”는 여행자가 갖추어야 할 미학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이다.
오후 늦게 출발하다 보니 16KM쯤 가니 벌써 야영지를 찾아야 할 때가 되어 마침 인근에 있는 안동대 캠퍼스가 잔디밭 있고 물 잘 나오고 화장실 있으니 최고의 야영지다 싶어 그곳을 야영지로 정하고 일찌감치 텐트를 치고 예의에는 어긋나지만 도서관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이빨 닦고 남 안 볼 때 후다 닥 발도 씻고…드디어 멀쩡한 학생 둘이 뻔뻔스러운 거렁뱅이로 망가지는 시작인가보다.
1박째 야영 : 안동대 캠퍼스
2일차
실전 연습이 부족한지라 텐트 걷고 취사 하고 출발하는데 일에 대중이 없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요리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아침은 머리 안 쓰고 만들 수 있는 라면으로 대충 해결하고 출발 하는 데만도 3시간 정도를 보낸 끝에서야 터덜터덜 본격적인 자전거 일주의 첫발을 내디딘다.
얼마 안가 이번 여행의 첫번째 난관인 꼬부랑 고갯길을 청송군 진보면 못 미친 국도상에서 만나는데 여기에서 팍팍한 고생길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별미인 미지근하고 짭짤한 육수를 처음으로 먹어본다. 이때 육수는 대개 머리와 이마에서 충분히 우려내어져서 눈을 거쳐 광대뼈쪽의 먼지를 양념으로 해서 입 언저리로 흐르는데 혀로 핥아 먹어야 제 맛이다.
노자 돈이라곤 일인당 10만원 합이 20만원이라 야영만 하고 식사도 직접 취사를 해야 할 형편인데 도저히 뜨거운 땡볕을 이길 엄두가 안나 오늘 점심만 딱 한번 사먹자고 결심하고 중국집으로 가 콩국수 한 그릇을 먹는다.
영덕으로 향하는 도중 휴식을 취하다 만난 이 바닥의 대 선배님 두 분은 서울에서 부산 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자전거 여행을 1주일째하고 있다고 하는데 겉 모습부터 날렵한 싸이클에다 짐도 매우 간편 한 차림으로 그 빠르고 여유롭기가 마치 딴 세상에서 온 구름 타는 신선인 듯 하다.
이때의 상황이나 기분은 2년 후 내가 훈련병도 되기 전 작대기 한 개 달린 모자 쓰고 강원도 양구의 선착장에서 줄 맞춰 가다가 반대편에서 걸어 내려오던 예비군 마크를 모자에 단 전설 속의 인물 같은 전역하는 병장을 만날 때도 거의 흡사하게 재생된다.
영덕에 도착하면 바다가 가까울 줄 알았는데 아직 바다는 강구나 영해 둘 중 한곳을 택해서 제법 더 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곳에 간다고 해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다 힘들어 더 못 가겠으니 그냥 아무데서나 텐트치고 자기로 한다..
2박째 야영 : 영덕읍내 어딘지 모를 공터
3일차
이제 바다를 보면서 북진을 하다 보니 자전거로 여행하는 다른 팀과 수 차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우리나 저들이나 죽어라 페달을 밟지만 어느 팀이나 쭉 빠져 앞으로 나가질 못하는 것을 보니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꼴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에 오르니 동해 바다가 장관인데다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시조가 절로 나온다.”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이건 큰 산에서 나오는 구절인가? 일찍이 뜻을 세워 독서를 멀리하다 보니 시흥은 일어나되 그럴듯한 구절은 안 나오지만 장쾌 하고 호방한 기분이라고 할까 하여간 최고다.
정자에서 형기가 갑자기 우리 또래의 토박이를 째려 보는 게 아닌가… 잘 못 걸리면 객지에서 낭패를 당하는데 하고 바짝 쫄아 있는데 둘이서 한참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더니 중학교 때 친구라고 한다.
참 세상 좁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곧 바로 텐트치고 소주한잔 걸치는데 이건 또 뭐야 친구의 친구라는 무리 중에 거의 탁발승? 수준의 고수가 한명 있는데 그 사람은 이 자리의 모든 이들과 오늘 처음 만난 무전여행가로 달랑 배낭만 가지고 경주까지 걸어가고 있단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경주까지 가서는 차비 얻어서 서울로 돌아 갈 예정이라 하는데 우리 같은 거지에 얹혀서 숙식을 해결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인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도구인지 수저는 세트로 있고 반찬으로 고추장을 꺼내서 보탠다.
3박째 야영 : 망양정에서 울진읍내로 나오다 오른쪽의 강변에서
4일차
아침에 일어나니 탁발승?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동거까지 한 우리들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리고 보이질 않는다. 역시 무전여행을 하는 강호의 고수는 우리와는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우리도 빨리 고수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무거운 번민과 속세의 잡다 한 것들을 버려야 하나니 어찌해야 한걸음이라도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나? 득도의 첫걸음으로 짐 꾸러미를 뒤져 조금이라도 무거운 것,거추장스러운 것, 한 개 이상 있는 것을 추려서 꾸러미를 만들어 소포로 보내는데 정말이지 출발할 때 기타 안 들고 온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 이제부터는 신발은 슬리퍼밖에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 고상하게는 빨치산 같이 그대로는 거지 같이 살아야 할 것 같다.
잠시 더위를 피하려 국도에서 내려와 시원 한 개울물에 원시의 모습 그 자체로 첨벙 몸을 담그니 기분이 너무 고조 되는데 결국 나와 형기는 오십 여 미터 떨어진 국도를 달리는 차를 향해 누드 퍼포먼스까지 해 보는데 관객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공짜로 볼 만 한 구경거리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익명의 섬에서 누릴 수 있는 무한의 자유와 일탈의 기쁨 그리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이제부터 전국일주 기간동안에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내키는 대로 다해 보고 얼굴에 철판 깔고 빈대도 많이 쳐야겠다고 굳게 결심 해 본다. 얼굴에 철판 깔기로 결심 후 불과 1시간도 채 안 되어 국도변의 수박 밭에서 제일 작은 것이 천원인데 오백원 짜리 달라고 떼를 써서 두꺼운 얼굴 데뷔 전을 성공적으로 치른다.
싸게 산 수박 먹고 히죽 거릴 때는 좋았는데 날이 어두워 지니 약간의 야맹증이 있는 나는 앞이 안보여 한번씩 가로수와 갑자기 꽝하고 만나기도 하고 도저히 못 가겠는데 형기는 시원 할 때 좀 더 가자고 떼를 쓰니 더 가자 그만 텐트치자 더 가자 텐트치자는 말을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은 논쟁으로 번지고 만다. 집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벌써 몸이 피곤하니 마음까지 황폐해지는 기분이다.
4박째 야영 : 망상 해수욕장.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려는데 잔잔히 들려오는 김원중의 바위섬이라는 노래가 이 밤
의 분위기와 어찌 이리도 멋 지게 어울리는지.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 캬 분위기 좋다
5일차
텐트와 짐들은 그대로 둔 채 간단한 차림으로 코펠하나만 들고 오랜만에 문명의 혜택인 버스라는 것을 타고 무릉계곡으로 왔다. 삼화사를 지나 폭포까지 와서는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전날 연습 한 얼굴에 철판 깔기를 더 단련하는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도 아랑곳 없이 물로 텀벙 뛰어드는데 정말로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이 오한이 밀려 온다.
간단한 무릉계곡 트래킹을 마치고 해수욕장으로 돌아오니 아직 뜨거운 오후라 바다 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어디 한번 둘러보자 물이 어떤가 두리 번 두리 번. 흐흐흐
5박째 야영 : 망상 어제 그자리 그대로
6일차
망상에서 출발해서 강릉으로 한참 가다 보니 고갯길이 있는데 오지의 시골길 같은 비 포장도로 인지라 오르면서 땀은 비 오듯 흘러 배 터지게 물먹고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과연 바람대로 이따금씩 트럭이 지나 가면서 물이 아닌 먼지를 온몸의 땀 위로 골고루 뿌려 주어서 매우 양질의 때 국물을 만들어 준다. 고개 아래로는 고속도로 위를 차들이 쌩쌩 하고 달리는데 왜 우리가 가는 길은 꼬불꼬불 한데다 비 포장의 팍팍 한 모양인지 세상 참 더럽게 불공평 하다.
설상가상으로 내리막길에서 타이어가 펑크 나서 죽도록 고생하다 조그마한 마을의 구멍가게를 만나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하고 쮸쮸바 하나씩을 무는데 히야! 쮸쮸바가 이렇게 맛나고 시원한 물건이란 말인가….
정동진을 지나면서 고교시절 기차로 설악산 수학여행 가던 도중에 잠깐 역에서 폼 잡고 사진 찍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대구의 고등학교 들은 수학여행이 조금 색 다른 면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남자고교와 여자고교가 기차 한대를 아예 전세 내어서 대구에서 강릉까지 가는 것이었다. 한반도로 지면 휴전선쯤 되는 객차의 연결통로에는 양 학교의 공포의 대상인 학과가 딱 버티고 있어 분단의 아픔을 이따금씩 커브 길에서 창문 밖으로 고개 내밀어 손수건 날리고 받고 뭐라고 지껄이며 낄낄대고 하는 한심하고 유치한 짓거리로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여학교와 같이 수학여행을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 이던 시절 이었다.
선교장과 오죽헌을 들렀다 경포대 해수욕장을 향하며 오늘 여정도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6박째 야영 : 경포대 해수욕장
7일차 경포대
동해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이라서인지 역시나 경치도 좋고 바닷가에서만 침 흘리면서 볼 수 있는 좋은 그림도 많아서 그저 입이 벌어진다. 남녀 모두들 멀끔한 가운데 약 1주일간의 고행으로 인해 참으로 독특해진 우리 모습,비쩍 말랐으나 허벅지는 빵빵 하게 굵어져 있고 이빨과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 한 모든 부분이 새까맣고 헐 벗고 굶주리느라 입이 귀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 이 도리어 다른 이들에게 더 볼거리를 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구경이 있을지라도 가야 할 길이 멀기에 또다시 출발 하는데 자전거 이 웬수 가 내 고행의 모든 원흉인 것 같아 패대기 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전거 여행을 선택 하기를 백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행의 수단으로 선택 한 자전거가 업보가 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혹 같은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포기 할 수 없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점심은 간만에 큰 도회지로 나왔으니 초 호화판으로 지내기로 하고 중국 집에서 짜장면을 먹는데 돈 좀 쓰니 배낭 풀어서 코펠 과 버너 꺼내고 물 얻어와서 식사 준비하고 또 설거지하고 다시 배낭 꾸리는 귀찮은 일들이 20 여분 만에 그냥 이루어 져 이리도 편한 것을 갈 길은 멀고 노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앞으로 웬만한 건 몸으로 때울 수 밖에 없겠지.
어두컴컴해질 무렵 인구라는 동네를 지나는데 마침 식사를 하려던 어떤 가게 집 할머니가
“학생” 하고 불러 자전거를 세우니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시며 극구 초대를 하셔서 국수를 대접해 주신다. 약 1주일 만에 밥상에서 제대로 요리 된 음식을 먹으니 둘이서 후루룩 한 그릇 먹고 더 주는 두 그릇째도 쓱싹 해 치우고 밥까지 말아서 정신없이 먹어대니 우리 둘은 그야말로 걸신들린 거지를 서로 보고 있다. 어디서 오느냐고 묻기에 안동에서 출발해서 동해로 일주일째 올라온다 하니 대견하다면서 안동은 양반의 고장이라고 주위의 모든 분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의 지금 행색이 조금 무안하고 쑥스럽다.
부끄러움은 잠시 이고 집 나서면 등 따뜻하고 배 부른 것이 최고의 덕목 일진데 자전거 여행 하면서 최고로 땡 잡았다고 생각 되는 것은 역시 밥 얻어 먹는 것 아닌가? 앞으로도 이런 순간의 부끄러움과 등 따시고 배 부른 것을 바꾸는 일이 자주자주 일어나면 좋겠다.
어두워 져서야 양양 읍내에 도착 한지라 야영 할 장소를 정하지 못해 남대천변에서 텐트를 치기 시작 하는데 제방 둑에 조금은 불량 해 보이는 토박이들이 너무 많이 나와 있어서 불도 못 밝힌 상태에서 소리도 안내고 텐트를 치려니 행동거지가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워 처음으로 집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설움이 밀려와 괜히 우울 해 진다.
평상시 보다 훨씬 어렵게 또 많은 시간을 허비 한 끝에 드디어 텐트가 설치되어 자리에 누우니 그 얇은 한 겹의 천으로 된 텐트도 집이라고 너무나도 안락하고 아늑해서 이제는 토박이들이 한꺼번에 대들어도 한번 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후에 오랜만에 제법 큰 도회지인 양양 읍내에서 시장을 본지라 만찬을 준비해서 과식을 한 후 잠자리에 든다.
7박째 야영 : 남대천변
8일차
아침에 눈을 뜨면 그저 씻고 식사준비 하면서 텐트를 걷고 하는 일들의 반복이고 식사는 하루는 된장찌개 – 오뚜기 카레 – 라면 다음날은 오뚜기 카레 – 된장찌개 – 라면 하는 식으로 의 세 가지의 순서만 달라 질 뿐이라 엄청 난 체력 소진과 하루에 한 바가지 이상 짜내는 미지근하고 짠 맛의 육수에 비해 섭취하는 영양은 너무 부족하다.
열심히 나가다 보니 한 무리의 군인들이 행군 중에 길가에서 휴식 중인데 그들에 비해서는 우리가 훨씬 편한 것 같아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이며 지나치는데 놈들 전방까지 와서 고생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때 내가 측은지심을 발휘해서 물이라도 권했으면 2년 후 그들보다 훨씬 전방인 양구의 철책까지 가지는 않을 텐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 사는 것이 그렇지 뭐.
드디어 이번 자전거 여행의 최대의 난관인 한계령 아래 오색에 도착 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피하고만 싶어 우선은 텐트부터 치고 주차장으로 나와서는 어떻게 애물 단지인 자전거를 관광버스의 짐간에 넣을 수 있을까 연구 하는데 머리가 깨어 지도록 잔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전거가 없거나 짐간에 넣을 수만 있다면 한계령을 편안하게 넘어서 서울까지 쉽게 갈 텐데 결국은 우리의 업보인 자전거로 인해 그냥 끌고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수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에라 약수나 마시자 싶어 약수터로 가서는 배 부르게 약수를 마시고 그 것으로 저녁밥을 짓는데 밥의 색깔이 노르스름 한 것이 침 넘어가게 윤기가 흐른다.
8박째 야영 : 오색
9일차
약수로 아침을 지으니 이번에는 색깔이 거므스름 한 것이 역시 오색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체험 할 수 있겠다.
오전에 옥녀폭포로 가서 나무꾼과 선녀의 장면을 기대 하면서 옷을 홀라당 벗고 선녀를 기다리는데 선녀는 고사하고 얼어 죽겠다 싶다. 대충 라면 끓여서 점심을 때운 후 이제는 고개를 넘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엄두가 안 나서 망설이다….에라 하루 더 자자
9박째 야영 : 오색
10일차
오늘도 어김없이 뜨거운 해는 떠오르고 넘어야 할 고개는 아득히 그대로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이놈의 웬수 덩어리 자전거를 모시고 끝없는 오르막 길을 오르고 또 오른 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찐한 육수 한번 만들어 보자.
가도가도 황톳길이라더니 이건 가도가도 가파르고 뜨거운 아스팔트 길인데 고개이름이 이 상황에 너무나 절묘하게 맞는 것 같다. 한계령, 나의 한계를 넘나들며 시험하는 고개인 것 같은데 가능하면 멀리 안보고 바로 앞만 보고 가려고 엄청 노력하는데도 조급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리 앞을 내다 보는데 그때마다 곧 정상에 다다를 것이라는 희망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난다.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자전거와 씨름을 하며 오르다 보니 정말이지 부러운 사람은 다름아닌 냉방 되는 버스의 제일 뒷자리 가장 높은 곳에 편안히 앉아서 팔을 턱에 괴이고 우리를 내려다 보는 분인데 아마도 신라시대의 왕족 또는 조선시대의 사대부 집안 출신의 귀한 자제로 우리와는 출신성분 자체가 아예 다른 엄청나게 고귀하신 분이 아닌가 싶다.
가끔씩 봉고가 지나면서 창문을 열고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분들도 있어 한번 씩 숨도 돌리고 손도 흔들며 답례를 하며 웃기도 하는데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마음으로 하는 격려도 좋지만 이왕이면 시원한 물이나 고추 가루 섞인 반찬이 있는 먹을 거리도 함께 주면 더 존경 하는 마음이 들 텐데.
한참을 오르다 보니 간이 휴게소에서 쓰러진 나무에 박제 된 호랑이를 전시 해 놓고 한계령을 배경으로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분이 있는데 거지인 우리는 돈 주고는 못 찍고 잠깐 호랑이만 빌려서 걸터앉아서 한 컷을 찍고 담배도 한대 빨고….이때 까지는 기분이 매우 좋다가 그만 조금전의 그 조급함과 입 방정으로 후회 할 일을 만들어 버린다. 바로 이런 멍청한 대화를 주고 받게 된 것이다. 나(자신 있게 또 뿌듯한 마음으로) “아저씨 정상 다와 가죠 ?” 아저씨 “정상 ? 이제 3분의 일 정도쯤 왔을 걸” 아니 이분이 호랑이 공짜로 탓 다고 일부러 그러나…
하늘이 깜깜 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지만 어찌하랴 또 출발해서 고갯마루 인 것 같이 보이는 가짜 정상과 숨바꼭질을 수십 번 한 후 드디어 저 멀리 거무스름한 지붕을 한 휴게소가 보이는데 벌써부터 설렌다.
이젠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은 정상에 다다르자 웬걸 한 여름인데도 으스스한 바람이 불고 추운데다 날도 어두워지고 있어 후딱 사진만 몇 판 박고 더 이상은 머무르지 못하고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약 3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가까스로 오른 정상인데 썰렁하다 못해 춥기까지 하니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지만 어찌하랴 이젠 내리막길로 출발.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공짜로 내려 가는데 힘은 전혀 들이지 않은 체 자동차들 사이에 끼어서도 전혀 기죽지 않을 속도로 내려가는 것을 보니 시속 50에서 70KM 정도는 속도가 나는 것 같아 재미는 기가 막히나 한편으로는 겁도 많이 난다. 왜냐하면 브레이크가 잘 듣질 않아서 커브를 틀 때 툭하면 반대 차선으로 넘어가므로 그때 반대 쪽에서 무슨 차든 달려 온다면 영락없이 골로 가는 그야말로 러시안 룰렛 같은 모험과 어드벤처가 쉴 틈 없이 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을 페달한번 밟지않고 쏜살같이 원통까지 달려오니 날이 어두운데다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야영 할 장소를 찾다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기에 한 외딴집에서 주인 아저씨께 마당에다 텐트 좀 치자고 사정을 하니 흔쾌히 허락 해 주신다. 하늘을 보니 비가 쏟아 질 것 같아 걱정은 되지만 입구쪽 군부대에서는 군인이 보초를 서 주고 주인 아저씨께는 미안 하지만 마당에다 배수구 확실하게 파 놓은 텐트가 있겠다 그냥 쓰러져 잠이 든다.
10박째 야영 : 원통의 어떤 농가 앞마당
11일차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또 다시 페달을 밟는데 정작 어제 그 높은 한계령을 넘을 때 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든 것 같고 길이 조금이라도 오르막 같아 보이면 지레 다리에서 힘이 빠져 자전거를 끌어야 할 정도로 다리 힘은 개미만도 못한 것 같다. 특히나 군축령 이라는 한계령 증손자 뻘도 안 되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는데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끌고 또 끌고 이런 고난이 또 있을까 싶다.
땡볕 아래 페달을 밟다 자전거를 모시고 끌다 하기를 수 십 차례 하다 보니 점심때가 되었는데 마땅히 쉴 만 한곳을 찾을 수 없어 어론이라는 마을 국도변의 한 가게 집에서 일단 손님의 입장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쮸쮸바 한 개를 사 먹고는 뻔치 좋게 식수 좀 받고 취사까지 좀 하자고 졸라 짐을 푼다.
때가 마침 정오 무렵인지라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어 그늘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기에 옥상에서 겨우 머리 숨길 만 한 그늘을 발견하고는 식사를 마친 후 그 한 여름 낮의 콘크리트 바닥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천근만근 되는 몸을 어찌 할 수 없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다.
죽은 듯 깊이 든 낮잠에서 깨어나 다시 수시간을 달려 어둑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홍천에 도착 했는데 또 야영장소를 찾기가 수월치 않아 헤매다가 겨우 동네 어른들께 물어 물어 홍천강을 찾아 강변에서 텐트를 친다.
11박째 야영 : 홍천강변
12일차
자전거 여행을 한지도 어언 10 여 일이 지난데다 동해안의 그 굴곡이 심한 7번 국도를 거쳐 한계령을 넘은 우리들인지라 이제 어디에 가도 명함을 내밀 만 하고 허벅지의 굵기와 까무잡잡한 피부등의 외양으로 보나 실제의 파워에서도 짐도 없이 날렵해 보이는 싸이클을 타고 있는 하이킹족들을 일반 자전거에 이사 짐 한 트럭 분량의 배낭을 싣고서도 오르막길에서 추월을 할 정도이니 여행에도 급수와 단이 있다면 칠단 정도의 경지에는 오른 듯 하다.
점심 무렵 때 마침 강변의 나무그늘아래 마루가 있어서 아주 편안하게 쉬면서 취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더니 감히 여행 칠단 둘의 합계 14단의 초 고수들에게 마루 사용료를 내라고 하길래 거지 행색을 더 돋보이게 강조하며 돈 없다고 버티니 포기하고 나가 떨어지고 만다.
순식간에 양평을 거쳐 양수리 그리고 능내를 지나는데 국도변의 드넓은 호수와 호수 가운데 군데군데 산재 하는 작은 섬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눌러 않고 싶을 정도로 멋진 풍광을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단 말인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온 몸으로 느낀 경험은 첫째. 우리나라의 땅덩어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 둘째. 강산이 참으로 아름다워 복 받은 겨레라는 것 셋째. 산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과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며 이러 한 너무나 평범 한 사실들조차 실제 내가 보고 밟아보고 만지면서 직접 느낌으로서 확인 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이름이 재미있는 국수 그리고 덕소, 워커힐을 지나서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구의동 고모님 댁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이 시간에 이 모습으로 거기다 친구 놈이라는 혹까지 달고 들이닥치기가 참 면목 없지만 고수는 아무나 하나 철판을 깔아야 하지.
12박째 : 야영 아닌 호텔 같은 방에서 숙면 취함
13일차
서울에서 놀고먹고 호텔 같은 방에서 자고
13박째 : 고모님 댁에서 하루 더 신세
14일차
또 서울에서 먹고 놀고, 사촌이 자기네 학교 앞의 삐까번쩍하고 생기발랄한 젊음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친구들과 소개팅도 주선 해주는 등 우리에게 위문공연 하느라 고생이 많다. 이렇게 몇일 지내다간 그 동안 갈고 닦은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고 귀족이 되어 자전거여행을 포기하지 않을까 싶어 두렵다.
14박째 : 고모님 댁에서 또
15일차
거지와 왕자에서 뒤바뀐 신분의 왕자 같은 생활을 끝내고 남쪽을 향해 출발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실대교를 건너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려운지라 은폐엄폐에 적당 한 숲에서 열심히 영역표시 겸 내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얼굴이 빤히 보이는 인근의 주공 아파트에서 아리따운 여자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그 여자가 우리를 보고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군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잠시 부끄러워 지려다 가까스로 예전의 근성, 얼굴에 철판 깔기와 마구 게기는 거지근성,을 회복 해서 무대에 선 배우가 커튼 콜을 받은 것처럼 좀 더 과감 한 포즈를 취해주고 손을 흔들어 준다.
물어 물어 사당 동을 지나고 남태령을 넘고 내리막을 신나게 내려오니 벌써 안양까지 왔는데 날은 어두워 지고 일기도 심상치 않은 것이 곧 폭우라도 쏟아 질 것 같다.
비 내리는 와중에서 텐트를 설치하거나 철수할 때의 어설픔을 회피하고자 오늘은 어디 처마 밑이라도 구해서 하루 숙식을 해결할까 궁리하다 학교현관 또는 복도가 가장 좋을 것 같아 인근의 학교로 들어가 숙직하는 선생님께 사정 이야기를 하는데 현관아래는 고사하고 담장 안의 운동장에서도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현관아래에서 노숙 한번 하자는 청을 이렇게 매정하게 거절하니 정말 섭섭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다.
어쩔 수 없이 골목을 헤매다 어린이 놀이터를 발견해서 텐트를 치고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15박째 야영 : 안양천 인근 어느 어린이 놀이터
16일차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걱정 했던 일이 밤사이에 벌어지고야 말았는데 놀이터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있고 우리가 텐트 친 곳이 그나마 등나무 아래 높은 곳이라 섬 같이 동그라니 남아 있어 그럭저럭 짐을 꾸려 급하게 도망 칠 수 있어서 천만 다행으로 여기고 남의 집 마루로 피신 해서는 개천 물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이지 무섭게 물이 불어나 모든 것을 삼킬 듯 한 기세다.
잠시 해가 난 틈에 자전거점에서 타이어에 바람을 넣다가 “자전거를 세울 때 사용하는 스탠드는 없어도 굴러 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대단한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즉각 버리자고 결심 해서 떼어내어 들어보니 아니 이렇게 무거울 수가…그 무거운 것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나니 앞으로 여행은 참으로 가뿐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원 가는 1번 국도의 비상활주로를 지나는데 비가 얼마나 퍼부어 대는지 온몸이 다 젖어 더 이상 비를 피할 방도도 없고 피할 필요도 없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쏟아지는 비를 즐기게 된다. 장대비 속이라 지나가는 행인도 없고 십여 미터 앞도 안 보이는데다 빗소리가 나의 음치를 가려주니 둘이서 악다구니를 쓰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하고 통쾌 한 순간 인 지금 바로 이런 것이 온몸과 정신이 정화 되는 카타르시스 인가 보다.
송탄의 어떤 마을의 야트막한 야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페달을 밟는데 초기에 동해안 구비구비를 거쳐 한계령을 지나면서 쌓인 내공이 출중하다 보니 서해쪽의 평지를 달리는 것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쉽다.
아산 만 방조제를 지나면서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지점에서 발 한쪽은 경기도를 다른 한쪽은 충청도를 밟고 통과의례를 치르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양쪽의 땅에다 골고루 영역표시를 하는 것으로 경북에서 강원도로 그리고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접어들 때 같이 도의 경계를 지날 때 마다 빠뜨리지 않는 의식이다.
아산 만을 지나면서 난생 처음으로 서해의 일몰을 보니 일출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는 황홀 한 모습으로 다가와 넋을 잃을 정도인데 문득 “나의 황혼이나 마지막도 저렇게 멋지고 장엄해야 할 텐데…” 하는 철학자 같은 감상이 밀려온다.
어둑해질 무렵에 삽교호에 도착해 야영을 준비하며 사진도 몇 장 찍고 오랜만에 관광지에서 맛 볼 수 있는 약간 들뜬 마음과 함께 여유 있는 저녁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떠도는 생활을 하다 보면 몸 눕힐 텐트만 설치되어있고 배만 부르면 그저 행복감에 젖어 드니 단순한 생활은 단순한 사고를 낳는가 보다.
16박째 야영 : 삽교호 관광지
17일차
점심무렵 마땅한 취사장소가 없어 한 학교에서 식사를 하고 휴식도 취하면서 몇 일만에 뜨거운 해가 내리 쏟아지는 지라 눅눅한 물건 말리고 소독 하기에 좋은 기회 인 것 같아 배낭을 모두 풀러 오만가지 잡다한 물건들과 담요 등을 모조리 끄집어내어서 말리니 피난민 촌이 따로 없다.
기분까지 뽀송뽀송 해진 터라 상쾌하게 출발을 했는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내 자전거의 타이어에 펑크가 나 버려서 어쩔 수 없이 히치하이크를 시도 해야 하는데 좀처럼 차가 잡히질 안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 두명에 애물단지 같은 자전거까지 딸린 처지이니 승용차는 아무리 좋아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고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듯이 우리 눈에는 화물 트럭 이외의 모든 차는 눈에도 안 들어 오고 설사 고급 승용차가 서서 태워 준다고 해도 쓸데 없는 존재일 뿐 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트럭 한대를 잡아 자전거 수리 점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든 좋으니 태워 달라고 하는데 앞 자리는 여유가 없으니 뒤의 적재함에 타되 경찰이 단속 하므로 바닥에 누워 있으라고 당부 하신다. 적재함에 편안하게 누워서 자전거로 갈 때 보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 가가는데 이게 바로 오픈카의 장점에 침대 칸을 합쳐 놓은 초 호화 특급 여행이 아닌가 싶다. 다만 한번씩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오며 적재함 바닥에 부딪히니 정말 골 때리는지라 수건 하나를 몇 겹으로 접어서 받히니 승차감이 훨씬 좋아진다.
파란 하늘이 끝 없이 펼쳐져 있고 뭉게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새들이 힘차게 날고 있으니 트럭 적재함에 드러누워서 하는 여행도 다른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묘미와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반나절은 달려야 할 길을 펑크 덕분에 이 삼십분 만에 공짜로 얹혀 온 후 자전거점에서 펑크 난 타이어를 손보는데 주인 아저씨가 극구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랬는지 하여 간에 오늘은 공짜가 많았으니 참 아름답고 살만한 세상인 것 같다.
원래는 서쪽 바닷가인 태안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여행 좋아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인데다 야영 장소를 정해 놓고 버스를 타고 들어 가는 것도 여의치 않아 방향을 남쪽인 홍성으로 잡는다.
17박째 야영 : 홍성
18일차
새벽녘에 바깥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설치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마 결혼식에라도 가려는지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여기가 말씨 느리고 양반의 고장이라는 충청도가 맞는감유? 도저히 잠을 더 이루지 못하고 일어 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씨가 빠르고 목소리들이 크다.
점심무렵에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인 대천을 들러서 잠깐 해수욕을 즐기는데 물이 아무래도 동해만큼 깨끗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점심식사를 하다 보니 옆에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식사를 하다가 우리에게 열무김치를 전해주는데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고춧가루로 양념 된 반찬을 구경하지 못하던 차에 제대로 된 양념에 손 맛까지 가미 된 김치를 입에 넣으니 시원하고 맵고 하여 간에 맛이 기가 막힌다.
서천에 도착 후 마땅히 야영 할 곳을 찾지 못하던 차에 어떤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 우리들 꼴을 보고는 괜찮다면 자기집의 쓰지 않는 방에서 하루를 묵으라고 하시길래 좋다고 따라 가 보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부자집 행랑방 또는 곳간 같은 방을 내어 주신다. 하지만 이게 어디인가 텐트에 비해서는 비가 아무리 와도 괜찮지 훨씬 넓지 설치하고 걷고 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지 우리에겐 호텔이나 마찬가지다.
갑자기 시간도 많아지고 느긋하게 저녁 준비를 하려는 참에 점심때 대천 해수욕장에서 형기가 물 얻기가 여의치 않아 저녁에 자기가 설거지를 하마하고 대충 닦은 후 가져 온 코펠을 꺼내더니 설거지를 나에게 미루는 게 아닌가. 말 타니 종 부리고 싶은 건지 호텔방에 들어오니 손에 물 묻히지 않으려고 티격태격하다 둘 다 똑 같은 좀팽이인지라 굽히지 않고 하릴없이 배를 곯고 있는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학생들 밥 먹었어 ?” 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둘의 눈이 부딪치며 빛이 남과 동시에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뇨 못 먹었어요”
밥 한 그릇 얻어 먹으니 뒤주에서 인심 난다고 소주 한 병 사와서 화해 주를 들이키고는 잠자리에 든다. 사내 대장부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삐 지고 공짜 밥 한 그릇에 또 기분이 좋아 지니 조금 한심스럽긴 하다.
18박째 서천 어느집의 행랑채
19일차
텐트 걷는 시간을 절약 한 덕분에 가뿐하게 출발을 해서 장항에 도착하니 충남과 전북 도 경계인 금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건너려면 도선이라는 것을 타야 한단다.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하는 철선인데 장항과 군산 사이를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참 단순하고 아무 생각 없는 배인 것 같아 눈만 뜨면 밥 먹고 자전거 달리다 잠자는 우리와 단순한 면에서는 많이 닮은 것 같다.
배를 타려니 요금을 내야 하는데 참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까지 도 경계를 넘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았던 통과의례 인 영역 표시도 못하니 조금은 아쉽지만 금강을 건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금강과 바다를 감상 하는 수 밖에.
부안읍에 도착 후 어떤 민가에다 자전거를 맡겨 두고 텐트와 코펠 등 최소한의 짐만 꾸려 시내버스를 타고 변산반도의 채석강으로 향하는데 버스의 안내양 아니 안내원이 특이하게도 남자라서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나 같은 거지들이 차비 떼어 먹고 달아 나거나 시비 걸기는 어려울 테니 좋은 점도 있겠구나 싶다.
채석강을 잠깐 유람하고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일찌감치 누우니 파도소리가 철썩 철썩 엄청 시끄러운 것이 잠을 이루기도 어려울 정도로 소란스러워 “밀려오는 그 파도소리에 단잠을 깨우고 돌아 누웠나…” 딱 이 노래 분위기인데 참으로 낭만적인 밤이다.
19박째 야영 : 부안 채석강
20일차
부안을 출발 해서는 이제 내륙쪽인 김제를 지나는데 말로만 듣던 지평선이 보이는데 경북의 산골짜기에서 태어 난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생경하고도 멋진 광경이다.
어떤 동네에 접어들어 느티나무 아래가 너무 시원해 보여 점심식사 장소로 삼고 열심히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장기 두던 동네의 어르신들이 우리보고 가까운 밭의 고추나 깻잎 등을 따 먹어도 괜찮다며 여행 시에는 의례 히 그래야 한다고 하시는데 아마 젊으셨을 때 한 가닥 하신 풍류를 아는 분들인 것 같다.
신 태인을 지나 일부 비포장 도로를 거쳐 드디어 정읍역에 도착을 해서 너무나도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이란 다름아닌 애물덩어리 자전거와 이별을 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버릴 수는 없기에 지금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일주를 계속 해 왔는데 20 여일을 돌아 다니다 보니 여비도 떨어지고 심신도 지쳐서 아무리 생각 해 봐도 목포까지 갔다가 동진해서 부산까지 가서는 영덕 까지 북진 후 안동까지 돌아가는 전국일주를 완수 하지는 못할 것 같아 이즈음 해서 자전거는 철도역이 있는 정읍에서 소화물로 보내고 나머지 구간은 홀가분하게 돈 떨어 질 때까지 버스로 일주여행을 하기로 결정 한 것이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소화물로 보낸 후 우리는 한계령을 넘으면서 가장 부러워 했던 버스 탄 고귀한 귀족? 으로 변신하여 내장산으로 향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얼마나 빨리 가는지 마치 도시에 처음 온 깡촌의 국민학교 수학여행단 같이 버스를 신기 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20박째 야영 : 내장산 야영장
21일차
새벽에 일어나니 폭우가 바람과 함께 휘몰아 치는데 야영장에 남은 텐트가 몇 개 되지 않을 걸 보니 대부분 황급히 철수 한 것 같고 우리 텐트가 반으로 찌그러졌다 다시 펴지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이렇게 있다간 침수가 될 것 같아 황급히 전천후 외출복인 수영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배수로를 넓고 깊이 파내고 들어오니 아직 불안 하긴 한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라 텐트 안에서 라면을 끓여서 식은 밥을 말아 배불리 먹고는 소주 몇잔 마시니 모든 근심걱정 거리가 거짓말 같이 물러가고 한 숨 자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등 따시고 배 부른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그냥 잠에 떨어 진다.
잠이란 건 인간에게 참으로 좋은 치료 제이고 피난처이고 휴식처 인 것 같다. 그렇게 사납던 폭풍우도 한 숨 자고 일어나니 물러가고 해가 뜨는데 이제 야영장에는 우리 텐트만 달랑 남아 있는 걸 보니 최후까지 우리만 버틴 모양이다. 점심 식사 후 텐트 안의 눅눅한 물건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햇볕에 말려 놓고 형기는 내장산 등산을 하자고 하는데 나는 그냥 말려놓은 물건들 지키고 있으마 해서 텐트에 남고 형기만 산행에 나선다.
오후 다섯시 경에 형기가 내려오는데 난데 없이 여자3명을 모시고 오는 것이 아닌가. 거지꼴로 어찌 했는지 물으니 산을 오르다가 여자 분들이 하는 사투리를 듣고서는 대구쪽에서 온 것 같아 말을 붙여서는 모시고 왔다고 한다. 역시 애물 단지인 자전거를 버리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복이 다시 채워지는구나 하하하.
이때부터 우리로서는 잃을 것 없는 2남 3여의 짧은 동행이 시작 된다. 첫날은 모악산 금산사 매표소 못 미친 공터에 텐트를 설치 하고 저녁 식사를 하는데 여자와 다니니 좋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입이 즐거운 것이 첫째인 것 같다. 수시로 군것질 거리를 제공 해 줄 뿐 아니리 식사를 할 때도 제대로 된 밑 반찬에 찌개에…이건 뭐 그야말로 평강공주 만난 온달장군 마냥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우리 꼴이나 3여의 미모로 봐서는 향단이 만난 방자가 더 가까운가…
한 텐트 안에 2남 3여가 있으니 불자나 스님은 아니지만 그간의 고행과 수도생활로 경지에 오른 나로서도 야릇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데다 이 여자들이 글쎄 아무 생각 없이 계곡에서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왔는데 젖은 머리 결과 샴푸냄새로 인한 시각과 후각의 묘한 상승작용으로 그 동안 쌓은 공덕과 몸에 생긴 사리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찰나 “에라 사고 쳐버려 ?” “아니 안돼 짝도 맞질 않고… 나무 관세음보살 참아야 하느니라”
21박째 야영 : 금산사 입구
22일차
수도승이 겪은 최대 난관인 시험의 밤은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니 몸에는 사리가 몇 개 더 생긴 것 같고 햇살은 눈 부시고 밥 맛은 최고인지라 이 정도면 군자의 삶의 언저리에는 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장산 때부터 남은 여비라곤 대구를 거쳐 안동으로 갈 차비 밖에 없는 처지라 밥 얻어 먹고 군것질거리 얻어 먹고 줄곧 빈대만 치니 이거 군자 체면이 말이 아니라 하다 못해 재미있는 추억거리라도 주어야 하겠기에 우리가 매표소에서 돈 내지 않고 들여 보내 주겠다고 제안을 하니 너무 좋아 한다.
모두들 재미 있겠다고 하길래 매표소를 피해 산을 올라 능선을 타는데 수풀이 얼마나 무성한지 한명이 선두에서 칼로 길을 개척 해야 할 정도이다. 돈 삼사천원만 내면 십 여분 만에 통과 할 수 있는 사람 다니는 길을 못 가고 다섯 명이 약 삼십분 이상을 몸이 긁혀 가면서 산 짐승도 다니지 않을 법 한 산속을 헤맨 후 드디어 매표소 우회 작전에 성공 하는데 고생은 되지만 참 재미있고 여자 분들도 너무 좋아해서 점수도 좀 딴 것 같은데 오늘 저녁에는 맛 있는 것 좀 더 사 주려나?
금산사를 둘러 본 후 다음 행선지는 여자들 따라 마이산으로 정하고 진안에 도착 해 보니 마이산 가는 차 시간이 맞아 떨어지질 않아 히치하이크를 해야 할 상황인데 인원도 다섯 명인데다 외모상으로 구성이 향단이와 방자의 모임이니 쉽지 않다.
가까스로 봉고차를 얻어 타고 마이산 입구의 상가에 도착 후 여러 가지 기념품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가게 아주머니가 뜻밖의 돈 되는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매표소를 지키는 분들이 여섯시만 되면 퇴근 하니 기다리다 들어가면 공짜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공짜로 들어가는 방법을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쳐 주는 걸 보니 아마 우리 모습이 남들에게는 영락 없이 무전여행 하는 고수로 보이는 모양으로 이 방면에서 일가견을 이룬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한참을 죽치다 가게 아주머니가 몇 명의 내려오는 무리를 보고 싸인을 해주시기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이산 매표소를 당당하게 통과한다.
22박째 야영 : 마이산
23일차
마이산 탑사에서 수십 년을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수많은 돌탑을 보고 있노라니 탑을 쌓으신 분의 신념과 고행을 짐작 할 만 하다만 솔직히 왜 그런 외롭고 어려운 길을 택해서 우직 한 일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2박 3일을 동행 했던 여자 분들이 진안 터미널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 간다고 하기에 배웅을 하는데 고맙게도 남은 음식들은 물론 가게로 가서 이것 저것 엄청 챙겨서 전해 준다. 먹을 것 많이 주는 사람은 착하고 훌륭하고 복 받을 사람이다.
나중에 같이 찍은 사진 돌려주는 것을 핑계로 한번 만나기로 하고 작별을 하고 우리는 남원을 거쳐 구례 화엄사로 방향을 잡는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 지리산을 종주해서 경남쪽의 중산리로 하산해서 대구를 거쳐 안동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번 여행의 마무리 코스로 잡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이 가까워 질수록 과연 한반도 남쪽의 영산인지라 산세와 산 정상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에 우리는 압도 당해 입만 벌리고 있다. 약간은 긴장 된 모습으로 화엄사에 도착하자말자 비가 억수로 쏟아 붓기 시작 하는데 십여 미터 앞을 보기도 힘들 지경이지만 아직 야영장은 멀기만 하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데 민박을 할 여비는 없으니 이 산중에서 보통 일이 아니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올라가다 보니 어떤 착하게 생긴 분이 그만 올라가고 여기다 텐트를 치라고 권하지만 발로 바닥을 더듬거려 보니 온통 자갈 밭인 것이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망설이는데 그 분이 “내가 지금 일주일 때 여기에서 야영하고 있는데 이곳은 끄덕 없다” 고 자신 있게 말을 한다.
우리야 뭐 산에 들어오면 산 선배 말 잘 듣는 순진 한 학생들이니 조금 불안 하긴 하지만 더 올라간다고 더 좋고 안전 한 자리가 있다는 보장도 없고 날이 너무 어두운지라 그냥 텐트를 치기로 하고 쏟아 지는 빗속에서 그분의 도움으로 어찌 어찌 하여 텐트를 치고는 안도감에 그 동안 아껴 두었던 조그마한 양주를 셋이서 나누어 마신 후 잠자리에 든다.
23박째 야영 : 지리산 화엄사 계곡.
24일차
새벽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형기가 다급하게 나를 흔들어 깨우며 “큰일 났다 여기 한번 만져 봐라” 하길래 텐트 바닥을 더듬어 보니 자갈 밭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우리 텐트가 물침대가 되어 가고 있는데 잠이 덜 깬지라 급류에 휩쓸릴 심각한 위기상황 이라는 것을 판단 하기에는 한참 걸린 느낌이다.
우선 급한 대로 텐트안의 물건들과 젖어서는 안 될 물건들을 돗자리로 싸 말아서 높은 곳으로 옮기고 형기는 손전등도 오래 전에 소포로 보내 버린지라 촛불을 켜 코펠 뚜껑으로 덮어서는 흔들며 죽어라고 외친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도와줘요” 한편 나는 불어나는 물 때문에 떠 내려 갈 것 같은 텐트를 걷는데 자갈 밭이라 팩으로 고정 하지 않고 노끈으로 묶어 둔 텐트를 걷는 것이 너무나도 경황이 없고 어렵다.
마음은 급한데 노끈은 안 풀리고 물은 이제 발목까지 차 오르고 결국은 물이 텐트 입구로 들어가서 반대쪽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텐트의 한쪽이 막혀 있으니 폴 이 부러 질 정도로 휙 굽는다. 급기야 나도 외친다 “형기야 텐트 떠내려 간다 잡아라”
사투 끝에 텐트를 대충 말아서 높은 곳에 올려둔 체 한참을 떨고 있노라니 손전등 불빛이 보인다. 조카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 왔다 폭우 때문에 급히 철수 하고 있는 분이 비치는 생명의 불빛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정을 말하고 같이 좀 내려가자고 해서 손 전등 하나에 4명이 의지해서 화엄사까지 줄행랑을 친다.
화엄사에 도착 해서는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텐트와 이불 그리고 옷가지들을 빨래 줄에 걸고 마루 밑에서 라면을 끓여 오들오들 떨며 먹고 있는데 어떤 여자 분이 방문을 열고서는 추울 텐데 들어와서 먹으라고 호의를 베푼다. 우리의 꼴로서는 거절 할 형편이 아닌지라 잠깐 방에 들어가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갑자기 한 스님이 오셔서는 이 곳은 여 신도들이 묵는 곳이니 빨리 나가라고 우리를 가차 없이 쫓아 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아직도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옷가지,텐트,이불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마루에서 조금만 더 머물겠다고 버티어서 승낙을 받는다.
내려와서야 알게 된 일인데 그 동안 우리가 내장산부터 만났던 폭우들은 태풍의 영향이라고 한다. 여행 기간 중 신문이나 TV등을 통해 뉴스를 들을 길이 없었기에 태풍이 와도 모르고 화엄사 계곡으로 들어 올 때만 해도 슬리퍼 싣고 지리산 종주를 할 생각을 했으니 우리가 바로 무식 한 놈이 용감 하다는 진리의 산 증인인 셈이다.
태풍을 만나 혼비백산해서 지리산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종주를 해낼까 생각 해보니 지리산 산신령이 우리의 용기에 감명 받아 보살펴 주시던가 아니면 건방 진 놈들에게 뼈 저린 교훈을 주시던가 둘 중 하나일 텐데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은 것이 태풍이 오히려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섭외담당 형기가 주차장을 다녀 오더니 대구까지 가는 차를 구했다고 빨리 내려 가자고 채근 한다. 주차장에서 대구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분이 애인과 함께 지리산에 왔다가 대구번호판만 눈이 벌겋게 찾고 있던 형기에게 그만 포착되어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야 차비도 부족 한 판에 공짜 자가용으로 대구까지 갈 수 있어 땡잡았다고 좋아 하지만 경찰관 아저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애인 분은 꽤나 불편 한 마음이겠지만 그런 것에 개의 할 우리가 아니지 않는가.
대구로 오던 중 휴게소에서 우리 배낭에 남아있는 모든 재료들을 털어서 점심식사를 준비 하는데 풍부 한 재료에다 그 동안에 갈고 닦은 요리실력을 있는 대로 발휘 해서인지 두 분이 태어나서 먹어보는 가장 맛있는 찌개라고 너무 잘 드시는지라 차비 좀 보탰다는 생각에 우리도 기분이 좋아진다. 편하고 즐겁게 대구에 도착하니 모자라던 여비에 갑자기 여유가 생기는지라 동성로에서 시원 한 팥 빙수를 먹은 후 북부정류장에서 안동 행 직행 버스에 오른다.
비록 처음의 계획대로 동해,서해,남해의 해안도로를 모두 누비지도 못했고 태풍 때문에 지리산에서도 얼떨결에 줄행랑을 치느라 마무리가 조금 어수선했고 정신이 없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23박 24일 간 참으로 많은 이 땅의 산하와 사람들을 만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젊은 날의 값진 경험을 이루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여행은 떠나기 위함이 아니라 이렇게 돌아오기 위함이고 우리의 여행은 끝이 아닌 진행형일지니 몇 년 내에 이번 여행에서 계획대로 완성하지 못한 지리산 종주를 위해 중산리를 꼭 찾아 천왕봉을 올라 화엄사 계곡으로 하산해서 이번 여행의 마무리를 지어야지 하는 또 다른 여행을 생각하며 버스 창에 기대 눈을 붙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야!!! 제 꿈도 자전거 전국일줍니다. 제게도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재미잇습니다...............젊은 날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