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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체연호를 사용했던 호태왕
비문에 ‘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 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로 되어 있어 18세에 등극한 고주몽의 17세손 호태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다른 태왕들의 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가 1976년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전체 태왕들의 연호가 언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구리사초략> 영락대제기에 “원년 신묘(391년) 7월, 상이 군신들에게 ‘지금 4해(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를 세우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 시절(추모·유리·대무)에 건원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고 일렀더니, 명을 받들어 춘태자가 영락을 연호로 평안을 휘호로 올리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원문) 七月, 上謂群臣曰 “今四海諸國無不建元 獨我國無此久矣. 宜體三代建元之例, 更建新元.” 於是命 春太子上號乃以永楽為年號平安為徽號 上可之) ”
아울러 시조 추모대제(동명성왕)의 東明, 2대 광명대제(유리명왕)의 琉璃光明, 3대 대무신제의 大武, 5대 모본제의 慕本, 6대 신명선제와 태조황제의 神明 이후 호태왕 이전까지는 연호를 쓰지 않았으며, 이후 대부분의 태왕들은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20대 장수대제의 장수(長壽), 22대 안장대제의 안장(安藏), 23대 안원대제의 대장(大藏)등이 그것이며 그 외 나머지 태왕들의 기록은 필사해내지 못해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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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락 5년(395) 을미년 기사
(1) “其詞曰昔祖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征旅躬率往討 叵富山負山至鹽水上 破其三[丘]部族[落]六七百營(獲) 牛馬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 東來候城力城北豊 五備猶遊 觀土境田獵而還”
지금까지 대부분 학자들은 위 영락 5년 을미년(395) 기사의 밑줄친 부분을 ‘其三部族(落)六七百營’으로 인식했었다. 營은 대대급 병력으로 약 500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6~700營이면 약 30만 명이기에 3부락(部落)이 아니라 3부족(部族)이 되어야 옳을 것으로 보았었다. 三 대신에 丘라고 읽은 학자들도 많았고, 族으로 읽은 학자는 이형구 박사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落으로 읽었으며, 營 대신에 當 또는 獲으로 읽은 학자들이 각각 1/3씩 된다.
그런데 <고구리사초략)에 “5년(395) 을미 2월, 상은 비리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부산·부산을 정벌하여 염수(鹽水)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양·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五年乙未二月 以卑離漸違王化 親征叵山·冨山·負山至鹽水 破其部落七百余所 獲牛馬羊豕万数.)”라는 문구가 있어 ‘其丘部落六七百 獲牛馬群羊’이 되어야 옳을 것으로 판단했다. 언덕 丘는 지방(地方)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위 비문의 을미년 기사의 새로운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 글에 이르되, 옛 선조 영락 5년 을미(395)에 비려가 쉬지 않고 침범해오므로 왕께서 군사를 몸소 이끌고 가서 파산, 부산, 부산을 토벌하고 염수 위에 이르러 그 지방 6~700부락을 격파하고, 소· 말· 양떼를 노획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어 왕은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후성, 역성, 북풍, 오비유로 와서 땅의 경계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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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 을미년 기사 뒤에는 아래 그 유명한 세칭 신묘년 기사로 알려진 문구가 이어진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到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제는 이 문구를 조선침략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로 만들기 위해 □□ 두 글자를 지워버리는 등 관련 비문을 조작해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라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가야·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즉 없어진 □□ 두 글자는 가야(伽倻)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어지는 이듬해인 병신년(396) 기록에 고구리가 왜의 신민이 된 백제를 공격해 백제왕의 항복을 받는데도 종주국인 왜가 구원하러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며, 호태왕 입장에서는 이미 백제와 신라가 왜의 속국이 되었으면 종주국 왜를 쳐서 결판을 낼 일이지 왜의 속국인 백제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정인보 선생은 비문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리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고구려는)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오자 백잔과 □□과 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고구려인이 새긴 비에 왜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으나 이것 역시 고구리가 이미 속민이었던 신라를 굳이 신민으로 삼을 이유가 없는 등 해석이 뭔가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학자들의 어불성설의 해석이나 정인보 선생의 해석이나 또 지금까지 이 문구를 해석했던 모든 학자들의 해석이 지워져버린 □□ 두 글자 때문에 해석이 신통치 않아 고구리역사의 진실이 미궁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 두 글자를 김택영과 영희조봉은 ‘隨破’로 보아 “(고구리가) 백제를 깨고 이어 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으며, 이유립은 ‘聯侵’으로 보아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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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영영 찾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 두 글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구리사초략>이 그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영락대제기 5년 을미년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원문) “永樂五年乙未 (2월 기록 생략) 八月 真武又乘虗入寇 上以七千騎馳到浿水上 虜獲八千余級. 末曷侵羅悉直. 十一月 莘欲雪浿水之恥 将七千人過漢水至靑木岺 遇大雪多凍死 廻皈漢城而勞軍”
(번역) “영락 5년 을미 8월, 진무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 패수 위쪽에서 8천여 급을 노획했다. 말갈이 신라의 실직을 침입했다. 11월 아신은 패수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7천병으로 한수를 건너 청목령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 많은 이가 얼어 죽으니 군사를 돌려 한성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따라서 없어져버린 □□ 두 글자는 바로 ‘曷侵(갈침)’이었던 것이다. 다시 비문을 해석하자면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391, 호태왕 즉위년)부터 와서 (조공을 바쳤다). (고구리가) 바다를 건너가 백잔을 격파했고,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다.” 즉 왜가 가야·신라에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놓은 문구였던 것이다.